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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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하며 만들어지는 결말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도 있다. 전자의 경우 작가는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내용에 비추어 가장 합당한 마지막을 그리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고려한다. 후자의 경우 최선의 결말보다는 최악의 결말에 이를 확률이 높다. 합당한 결말이 아니라 불가해한 결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그리기 때문이다. 전자를 도착점으로서의 결말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출발점으로서의 결말이라 부를 수 있겠다.

도달하며 만들어지는 결말은 인간의 관점으로 쓰인다. 가능한 현실 중 가장 바라는 현실을 그린다는 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이뤄지는 원리와 매우 흡사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출발점으로서의 결말은 인간 너머의 관점으로 쓰인다.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해서 벌어져야 하고 끝내 그 상황은 극복될 수 없어야 한다. 더 나은 결말로 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희망에의 의지다. ‘바로 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희망의 부재를 견뎌야 한다. ‘일몰의 저편’이 선택한 엔딩은 시작하는 결말이다. 더 나은 결말을 모색한 흔적 따위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 소설의 끝은 완전체로서의 죽음이다.

작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를 두고 낯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비참한 죽음은 처음이다. ‘기저귀를 찬 볼품없는 모습’으로 절벽 가까이 다가가는 ‘나’의 직업은 소설가다. 기리노 나쓰오의 신작 소설 ‘일몰의 저편’은 ‘나’라는 한 개인의 죽음을 암시하며 끝나지만, 사실 이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나’로 대표되는 문학의 죽음이며 문학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죽음인 동시에 예술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종의 정신에 선고된 죽음이기도 하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 결말을 통해 문학과 예술이 기저귀 찬 볼품없는 모습으로 절벽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금기나 양식 따위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지점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믿고 독자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었던 주인공 마쓰 유메기가 출간한 소설은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페티시 등 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마쓰는 총무성 문화국 문화예술윤리향상위원회라는 곳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소환장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에 대한 독자의 제소를 심의하고 사전 청취를 하고자 귀하에게 심의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정된 기간 안에 회답하지 않았으므로 아래 기일에 하기 장소에 출두할 것을 요청한다. 이곳에서는 약간의 강습 등이 예정되어 있으며, 숙박 준비물을 부탁한다⋯. 과거 요양원으로 쓰였던 건물에 도착한 마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견디는 와중에 좋은 소설을 쓸 것을 요구받으며 소설을 써나간다. 보이지 않는 억압에 저항하는 동시에 억압을 내면화하면서.

성숙한 시민이자 교양인으로서의 자기 검열과 억압이자 폭력으로의 자기 검열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가운데 허구의 세계로 창작된 ‘소설’을 평가하는 수많은 판단 중 윤리라는 항목은 어떻게 얼마만큼 적용돼야 할까. 요컨대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일몰의 저편’은 전 세계적인 관심사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와 창작 행위의 자유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불협의 문제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다. 한 원로 소설가가 작심하고 발언하는 ‘작가를 위한 변론문’이자 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시점을 증언하듯 쓰인 ‘남루한 예술가 소설’이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문학의 시대’가 끝났다고 느낄 테지만 누군가는 이 소설에서 ‘시대의 문학’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소설의 일몰일까, 어떤 소설의 일몰일까. 전자라면 완전한 비극으로서의 결말이겠지만 후자라면 희망을 내재한 결말일 수 있겠다. 대답은 쉽지 않다. 글의 끝에 이르자 나도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단언할 수 없게 됐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

1951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태어났다. 1984년 로맨스 소설 ‘밤이 떠나간 자리’로 데뷔한 후 10년 동안 노바라 노에미, 기리노 나쓰코 등의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 청소년 소설, 만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1993년 ‘얼굴에 내리는 비’로 일본 추리 소설의 등용문인 제39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스터리 추리 소설 작가로 뛰어들었다. 1995년 신주쿠 가부키초를 무대로 한 여성 탐정 ‘무라야 미로’ 시리즈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고, 여자 프로 레슬링을 소재로 한 ‘파이어볼 블루스’를 출판해 이름을 알렸다. 그러던 중 1998년 발표한 ‘아웃’이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에 선정되며 일본 전역에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 열풍이 일었다. 평범한 주부들이 잔혹한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는 호평을 받은 이 소설을 통해 일본에 새로운 여성 하드보일드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웃’은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추리상인 에드거 앨런 포상 최고 소설 최종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