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텔 베함(Barthel Beham)의 1540년작 바니타스(Vanitas). 사진 위키미디어
바르텔 베함(Barthel Beham)의 1540년작 바니타스(Vanitas). 사진 위키미디어

필자는 독일 함부르크 중심부에 있는 쿤스트할레 미술관을 즐겨 찾는 편이다. 방대한 소장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유럽 지역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북독일 지역의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쿤스트할레 미술관은 수십 번이 넘게 가보았던 탓에 이제 눈감고도 미술관 곳곳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갈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그림이 하나가 있다. 전시실 한구석에 있는 필자 상반신 크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에로티시즘이 깃든 한 여인의 누드와 그 뒤에 음침하게 서 있는 해골이 그려진 그림이다. 너무 이질적이면서도 섬뜩해 이 그림 앞을 지날 때면 으스스하고 소름이 돋는 것 같다. 무서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본체만체하고 일부러 지나친 적도 있다.

언젠가 쿤스트할레 미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 이 그림 앞에 여러 사람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발꿈치를 들어보니 사람들 머리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큐레이터의 모습이 보였다. 필자도 근처에 가까이 다가가 큐레이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다.

“이 그림은 독일 후기 르네상스 화가 바르텔 베함(Barthel Beham)의 바니타스(Vanitas)입니다. 바니타스는 ‘인생무상’이라는 뜻이 있는 라틴어로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종교적 메시지가 들어간 정물화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죠. 이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한 젊은 여성의 누드가 보입니다. 여기서 표현된 젊음이 발산하는 풍만함은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풍요를 상징합니다. 모든 육신을 가진 생명체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이 여인 뒤에 있는 해골은 병 또는 죽음을 상징하며 그림 하단에 죽어있는 여인의 모습이 바로 살아있는 육신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여인이 움켜쥔 꽃은 순결, 신앙, 순수함을 상징하는 백합이고 더불어 그림 배경에 있는 큰 나무는 전통적으로 영생 또는 부활을 상징하는 만큼 인간은 삶에서 욕망, 사치 등을 지양하고 겸손해야 하며 또 교회 신앙에서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난 뒤, 조용히 그림 앞으로 다가가 다시 한번 큐레이터의 설명을 더듬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좀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또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그림이 내포하는 뜻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이해하면서 감정이 더욱 증폭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의미를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은 서양 회화나 음악에도 많다. 약 4년 전 필자가 독일 브레멘 국립음대에서 피아노의 전신 악기인 하프시코드를 전공했을 때 지도 선생님과 한창 토론을 나눴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반음계적인 환상곡과 푸가 작품번호 903’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건반으로 음을 누르기 전, 음형을 읽고 곡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엘리아스 고틀롭 하우스만(Elias Gottlob Haussmann)의 1748년작 바흐 초상화. 사진 위키미디어
엘리아스 고틀롭 하우스만(Elias Gottlob Haussmann)의 1748년작 바흐 초상화. 사진 위키미디어

미술에서 상징을 찾아가며 해석하는 것처럼 음악에도 여러 수사학적인 표현이 있다. ‘음형이론(Figurenlehre)’이 대표적이다. 여러 음형에 수사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작곡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또 가사가 있는 경우 가사의 의미를 더 증폭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 음형이론은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17세기에 여러 학자를 통해 집대성됐다. 서양 음악사에서 음형이론은 꽤 체계적으로 분류돼 있는 편으로, 음형의 종류에 따라 약 150가지가 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분류돼 있다.

일례로 독일 바로크 시대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는 그의 음형이론 저서에서 “수사학자와 웅변가가 예술적인 비유를 들어 청자를 웃음과 탄식이 깃든 감동의 순간으로 이끌 듯이 음악도 수사학적 음형을 통해 예술적 감동을 제공한다”라고 언급했다. 서양 음악에서 음악감상이란 ‘감성이 지배하는 직관적인 감상’과 ‘수사학적 표현을 알아채고 이해하는 이성’과의 조화라는 의미다. 감동의 묘미를 증폭시키고 동시에 감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이다.

필자가 당시 공부한 바흐의 반음계적인 환상곡과 푸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사학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많았다. ‘고통’을 상징하는 반음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뜻하는 갑작스러운 전조, ‘탄식’을 상징하는 짧은 쉼표, ‘유한한 삶’을 상징하는 규칙적인 박자와 ‘안식’을 상징하는 협화음이다. 정리해보면, ‘인간 고통도 삶도 신이 정해준 시간 안에서 마무리된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물론 음형이론을 집대성한 독일 바로크 시대의 이론가 요아킴 버마이스터(Joachim Burmeister)가 “음악의 수사학적 표현 방법은 작곡가마다 천차만별이고 그 수를 헤아리기도 불가능하다”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수사학적 표현은 나라, 시기, 작곡가마다 상이할 수 있다. 그리고 바흐 및 당시 작곡가들이 이런 이론을 전제로 창작했다고 증명할 만한 사료도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17세기 초반에 촉발된 독일의 30년 전쟁으로 죽음이 늘 삶 가까이에 있었던 당시 비극적인 상황 때문에 이런 음악이나 회화 장르의 작품이 많았고 또 여러 이론가들이 음형이론에 대한 저서를 편찬한 것처럼 당시 작곡 사조에 상당히 일관되게 음형이론의 내용이 등장하기에 의미를 유추할 뿐이다.

바흐의 반음계적인 환상곡과 푸가를 수사학적으로 읽고, 다시 들어보면 이전보다 남는 게 많다. 서양 음악과 미술에 이런 수사학적 표현이 있다고 알게 된 후로는 그림을 볼 때도, 악보를 읽을 때도 이성적으로 표식을 이해하는 동시에 마음속 직관적인 감정을 느낀다. 복잡한 인간의 삶을 감동과 위안으로 전달하기 위한 작곡가들의 고뇌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라단조,
작품번호 903
작곡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주 알프레드 브렌델

바흐가 35세 때인 약 1720년쯤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추정되며 바흐가 살아 있을 때도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기괴한 듯하며 즉흥적인 표현이 인상적인 환상곡과 엄격한 박자와 작곡 형식으로 대비되는 푸가 부분으로 구성 돼 있다.

바흐의 작품 중에서도 음악적, 기술적으로 연주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곡으로 여겨지지만 많은 연주자의 사랑을 받으며 현대 공연장에도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