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사진 민학수 기자

1998년 박세리가 맨발 투혼을 발휘하며 US여자오픈 정상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한국 여자 골프는 한국인의 자부심이자 세계 여자 골프를 호령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한국의 최고 수출 상품’이라는 외신 찬사까지 나올 정도다.

20년 이상 지속돼 온 한국 여자 골프 왕조(dynasty)는 2021년 도쿄 올림픽(2020 도쿄 올림픽)에서 아무런 메달도 따지 못했고, 미국여자프골프(LPGA)투어 최다 우승국 지위까지 미국에 내줬다. 메이저 대회에서도 무관에 그치는 등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2022년 이후 한국 여자 골프는 어떤 모습일까? 많은 골프팬이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한국 여자 골프 왕조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다. 스포츠에서 특정 국가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요인으로는 △세계무대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롤모델의 지속적 출현 △사회적 관심과 지원 △유망주 풀(pool)의 선순환 구조 △세계적 스타를 키워낼 제도와 과학적 훈련 시스템 구비 등 네 가지가 꼽힌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영국 드몽포트(DMU)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한 스포츠 역사와 문화 관련 전문가다. 그는 ‘스포츠가 어떻게 한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가 되고 산업이 될 수 있었는가?’를 파고들며 남북한 축구 역사를 다룬 ‘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와 스포츠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한 ‘스포츠 문화사’를 저술한 학자다. 이 교수와 함께 특정 스포츠 종목에서 왕조를 이룬 국가의 등장과 성장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여자 골프의 미래를 다섯 차례에 걸쳐 조망하고자 한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는 202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7승을 합작하는 데 그쳐 6년 연속 지켜온 최다승 국가 자리를 미국(8승)에 내줬다. 사진은 2021년 LPGA투어 최종전에서 우승하고 축하받는 고진영. AP연합
한국 여자 프로골프는 202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7승을 합작하는 데 그쳐 6년 연속 지켜온 최다승 국가 자리를 미국(8승)에 내줬다. 사진은 2021년 LPGA투어 최종전에서 우승하고 축하받는 고진영. 사진 AP연합

한국 골프는 불모지에서 피어난 꽃이다. 박세리가 등장하기 이전, 골프는 한국에서 특권층과 부자들의 놀이였고 골프장 수도 극히 적었다. 동양 선수가 오랜 역사와 월등한 체격 조건을 지닌 서양 선수와 대적한다는 것은 상상 속의 꿈이었다. 먼저 이와 유사한 구조를 깨트린 종목이 바로 한국 양궁의 존재다.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에서 여자 골프와 다르지만, 한 번 정상에 오른 이후 저변 확대를 통해 지속적 왕조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깊다.

한국 양궁 신화는 특정 국가의 스포츠 왕조를 형성하는 네 가지 성공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한국은 ‘동이(東夷)’ 민족으로 불렸다.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신궁’으로 알려진 이성계나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 묘사된 활 쏘는 장면 등을 거론하며 한국의 양궁 전통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역사 이야기가 자긍심을 높인 건 맞지만 1970년대 말 한국이 양궁 강국으로 떠오른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한국 양궁 발전의 요람은 여자 중·고등학교였다. 1959년 수도여중 체육교사였던 석봉근은 임기를 마치고 전근할 때마다 새로운 학교에서 양궁부를 만들었다. 석봉근은 노년층만 즐기던 스포츠 석궁을 젊은 세대에 전파하고자 여자 중·고등학교를 거점으로 양궁 보급에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문교부가 양궁을 여자 고등학교의 안보체육종목으로 지정하면서 전국 여자 고등학교에서 양궁부가 생겨날 수 있었다.

한국 양궁은 김진호가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오르며 전 국민의 화제가 됐고, 1984년 LA 올림픽에서 서향순이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열기가 치솟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메달 유망주 발굴에 총력전을 펼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현대차그룹은 1985년 정몽구 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것을 신호탄으로 인재 발굴과 장비 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양궁은 1984 LA 올림픽부터 2020 도쿄 올림픽까지 무려 27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간 한국 양궁의 유망주 풀은 급속도로 확장됐다. 현재 초등학교 양궁팀은 164개이며 대학은 32개, 실업은 37개다. 2000명이 넘는 양궁 선수가 올림픽 메달을 꿈꾸며 훈련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는 세계 양궁계에서 독보적인 규모다.

한국과 경쟁하는 대부분 국가에는 실업팀이 없거나 수가 적어 대학 졸업 이후 양궁에 전념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국의 양궁 선수들이 대학 졸업 이후에도 실업팀 소속으로 활약하며 기량 향상에 매진할 수 있는 장점과 대비된다.

한국 양궁은 훈련 방식에서도 혁신적이었다. ‘타도 한국’의 깃발이 나부끼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대표팀은 미국에 패했다. 패배 원인으로 현지 경기장 환경을 고려하지 못한 훈련 방법이 제기되자 한국은 2000년대부터 올림픽 개최지 경기장과 거의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훈련하기 시작했다.

지난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양궁 대표 선수들은 일본 유메노시마 올림픽 양궁 경기장과 비슷하게 꾸며진 진천선수촌 경기장에서 훈련했다. 유메노시마 경기장처럼 LED 전광판을 설치하고 일본어 안내 방송까지 나오게 했다. 바닷바람이 강한 유메노시마 경기장 특성에 대비해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 따로 특별 훈련까지 했다.

37년간 한국 양궁을 후원하는 현대자동차의 첨단기술은 훈련의 과학화에 큰 역할을 했다. 고정밀 슈팅머신을 활용해 불량 화살을 가려내는 방식뿐 아니라 궁사의 손에 가장 적합한 그립을 3D 프린터로 제작하고 선수들의 심장 박동 수 등 생체 정보와 훈련 영상을 자동 편집해 활용하는 기술을 적용했다.

‘실전이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은 특별하다.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 방식부터 바꾸었다. 전년도 국가대표 선수의 경우 3차 선발전부터 참가했지만 도쿄 올림픽 예선에서는 기존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도 예외를 주지 않고 1차 선발전부터 참가하도록 해 ‘전관예우’를 없앴다.



도쿄 올림픽 양궁 3관왕에 빛나는 안산은 2021년 9월 27일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양크턴에서 끝난 2021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도 혼성전과 여자 단체전에서 2관왕에 올랐다. 연합뉴스
도쿄 올림픽 양궁 3관왕에 빛나는 안산은 2021년 9월 27일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양크턴에서 끝난 2021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도 혼성전과 여자 단체전에서 2관왕에 올랐다. 사진 연합뉴스

정확성만 앞서는 한국 골프

아마추어 스포츠인 한국 양궁의 사례를 그대로 한국 여자 골프에 대입해 평가할 수 없다. 대한골프협회가 운영하는 아마추어 국가대표 시스템은 한국 양궁 사례 못지않게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렇지만 한국 여자 골프 왕조가 흔들리는 현시점에서 기존의 시스템이 세계 경쟁력을 유지하는 올바른 방법인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골프 선수의 여러 가지 평가 요소 중 US여자오픈을 비롯해 LPGA투어 대회들이 점차 서양 선수들의 강점인 장타 능력에 유리한 코스를 만들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한국 선수들 샷은 ‘초크 라인(분필로 그린 것처럼 똑바로 샷이 날아간다는 의미)’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놀라운 정확성으로 유명하지만 대체로 장타 능력에서 뒤지고 있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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