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어벤져스’가 개봉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10년 전, 그 영화에 열광했던 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 같은 슈퍼히어로들이 팀을 짜서 지구를 지킨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각각의 캐릭터가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되고, 한 작품에서 뭉친다는 영화 사상 유례없는 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 시도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고 7년 후 ‘어벤져스: 엔드 게임’이라는 장대한 영화로 완결됐다. 스스로의 충분한 서사와 팬덤을 만들어내고, 이를 또 다른 작품에서 집결시키는 시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공적인 지식재산권(IP)으로 만들어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을 앞세운 DC의 실패가 말해주지 않나.

K팝의 역사를 하나의 나무로 비유한다면, SM엔터테인먼트(SM)는 이 나무의 나이테 대부분을 차지한다. 1996년 H.O.T.와 1997년 S.E.S.는 한국 아이돌 산업의 분기점이자, K팝 산업의 묘목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1990년대 전반의 댄스 그룹들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지고 활동하는, 과거 연예 산업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SM은 캐스팅과 오디션 그리고 트레이닝을 통해 신인 그룹을 만들고 이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성공시키는 아이돌의 공식을 만들어냈다.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맞먹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터닝 포인트였으며 지금껏 통용되는 K팝 산업의 모태였다.

1세대 아이돌 영광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건 두 가지 변수였다. 첫째, 시장이 급변했다. 21세기와 함께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고 MP3와 P2P가 세상을 휩쓸었다. 음반 시장이 몰락했다. 100만 장 판매라는 영광의 시절은 순식간에 과거의 일이 됐다. 아직 공연을 비롯한 부가 수익 모델이 미흡하던 그때, 음반 판매의 급감은 고비용이 투여되는 아이돌 산업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에 대한 음악계의 대책은 아이돌 ‘그룹’을 ‘솔로’ 아이돌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비, 휘성, 세븐 같은 가수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SM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트레이닝 시스템을 고수, 아니 더욱 강화해서 보아를 내놨다. 이전까지 트레이닝 시스템이 고등학생 때 시작됐다면, 초등학생 시절부터 다방면의 엘리트 교육을 받아 15세에 데뷔한 보아의 파괴력은 놀라웠다. 그리고 한국 음악 시장의 외연을 아시아 최대의 음악 시장인 일본까지 넓혔다. 국적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본 활동을 시작해서 차차 자연스럽게 한국 가수임을 드러내는 전략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한국 아이돌이 ‘한류’로 불리던 그때, 보아가 아니었다면 동방신기, SS501 등의 일본 내 성공은 몇 년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보아로 인해 내수에 머물고 있던 한국 아이돌 산업은 수출 산업으로 확장됐다. 기성세대와 미디어가 10대 하위 문화로 여기던 아이돌을 진지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SM의 나이테 새기기는 그 후로도 계속됐다. 아이돌은 노래를 못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아예 메인 보컬을 맡을 예정이던 연습생들로만 팀을 구성, 동방신기를 만들었다. 슈퍼주니어와 샤이니는 ‘누나 부대’ ‘이모 부대’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아이돌 시장을 기성세대로 확대했다. 10대와 20대 때 1세대 아이돌 팬 문화를 경험한 세대가 나이를 먹었다는 점을 간파하여 시장에 연착륙시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소녀시대가 있었다. 빅뱅과 원더걸스가 열어젖힌 2000년대 중후반의 아이돌 르네상스에서 소녀시대는 걸그룹 최후의 승자였다. ‘섹시’와 ‘청순’이라는, 이전까지의 걸그룹 이미지 중 소녀시대는 어느 쪽에도 편중되지 않았다. 티셔츠와 청바지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으며 멤버 8명, 그 누구도 묻히지 않고 각자의 팬덤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그들은 SM의 역량을 보여주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팬을 넓혀나갔다. 2011년 소녀시대를 전면에 내세워 파리에서 열린 SM타운콘서트는 한국 아이돌이 탈아시아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자, K팝이라는 단어가 아이돌과 한류를 대체하는 계기였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여성 아티스트들이 테마별로 새로운 조합의 유닛을 선보이는 프로젝트 ‘갓 더 비트(GOT the beat)’. 걸스 온 탑(Girls On Top) 첫 유닛이다. 왼쪽부터 카리나, 웬디, 태연, 보아, 효연, 슬기, 윈터. 사진 SM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여성 아티스트들이 테마별로 새로운 조합의 유닛을 선보이는 프로젝트 ‘갓 더 비트(GOT the beat)’. 걸스 온 탑(Girls On Top) 첫 유닛이다. 왼쪽부터 카리나, 웬디, 태연, 보아, 효연, 슬기, 윈터. 사진 SM엔터테인먼트

그 후로도 SM은 성공의 보증수표이자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하는 레이블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아이돌 산업의 필수요소처럼 된 ‘세계관’을 공식적으로 도입한 엑소, 대중적 코드를 비켜 나감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이미지와 콘셉트를 개척한 에프엑스,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의 중간지점을 포착하여 2010년대 중반 걸그룹 세대 교체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레드벨벳 그리고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의 성공 사례처럼 여겨지는 에스파까지. 단 한 문장에 담았지만 꽤나 긴 문장이 될 만큼 SM의 아이돌은 모두 각자의 특성으로 시장을 견인해 왔다. 그만큼 풍부한 IP를 확보해 왔다는 얘기다.

각자의 팬덤이 있고 레이블 안에서의 역사가 있다. 팬들은 상상한다. 다른 팀 멤버끼리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 밴드는 슈퍼 엠이라는 성공 사례가 있지만 걸그룹은 아직 없었다. ‘걸스 온 탑(Girls On Top)’은 팬들의 염원을 현실화한 프로젝트다. 일회성으로 활동하는 이 프로젝트의 첫 유닛은 ‘갓 더 비트(GOT The Beat)’. 에스파, 레드벨벳, 소녀시대 그리고 보아까지, 같은 시기 그룹을 넘어 약 20년의 SM 여성 아이돌 역사를 장식하는 주역들이 하나로 뭉쳐 ‘스텝 백(Step Back)’을 발표했다. 첫째인 보아(35)와 막내인 윈터(20)의 나이 차는 15세. 한 세대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과 영상에서 세월의 벽은 없다. 보아와 소녀시대 정도면 추억의 영역에 들어갔다 해도 좋지만, 그들은 레드벨벳은 물론이고 에스파에도 꿀리지 않는 역량을 보인다. 한국 음악의 역사가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그 나이테 하나하나를 새겼던 이들이 한 무대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는 화려하고 현란하다. 마치 한 번에 굵게 태어난 나무처럼 나이테를 지운다.

그래서 갓 더 비트는 ‘어벤져스’보다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가깝다. ‘어벤져스’가 처음부터 팀업을 기획하고 준비된 프로젝트라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팬들의 상상이 예고 없이 현실로 찾아온 것이니까. 팬과 비즈니스를 모두 만족시키는 IP 활용이란 무엇인지를 SM은 갓 더 비트를 통해 멋지게 보여줬다. 회사 자체의 역량과 멤버들의 녹슬지 않는 관리 그리고 오래도록 이탈 없이 관계를 유지해온 기업 문화로 가능한 프로젝트다. 어쩌면 세계 팝 시장을 통틀어 SM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리라.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