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화(清華)대 교훈인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 사진 바이두
칭화(清華)대 교훈인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 사진 바이두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국학자이자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가 갓 설립된 칭화(清華)대학에서 ‘군자’를 주제로 강연한 바 있다. 그는 ‘역경(易經)’의 ‘자강불식(自强不息: 천체의 운행처럼 군자는 스스로 강해져 쉬지 않음)’과 ‘후덕재물(厚德載物: 땅이 만물을 싣듯이 군자는 덕으로 모든 것을 포용함)’을 인용, 학생들의 분발과 면학을 격려했다. 그 후 이 두 구절이 이 대학의 교훈으로 채택돼 지금도 이 여덟 자가 새겨진 큰 바윗돌이 교정을 장식하고 있다.

‘역경’에서 나온 잠언(箴言)과 격언은 많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넘치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넘친다(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라거나 “세상 이치는 같이 돌아가나 길을 달리하고, 한곳에 이르나 생각은 백 가지다(天下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라거나 “느슨한 감춤은 도적질을 가르치고, 야한 얼굴꾸밈은 음란함을 가르친다(慢藏誨盜, 冶容誨淫)”는 말들이 그 예다.

장제스(蔣介石)의 이름 중정(中正)과 자(字) 개석은 모두 ‘역경’의 ‘예괘(豫卦: ䷏)’에 있는 “가운데에서 바르게 스스로를 지킴에 그 굳기가 돌과 같다(中正自守, 其介如石)”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태극기에는 팔괘(八卦) 중 4괘와 음양의 도형이 응용됐다. 혹시라도 나라의 상징이 중국 고대문화에서 비롯됐다고 거부감을 갖는다면, 일본 문자 히라가나(ひらがな)와 카타카나(カタカナ)가 모두 한자의 초서체 모양과 해서체의 편방(偏旁)에서 취해졌고, 중국과 한국의 상용어에 일본에서 전래된 말과 단어들이 무수히 섞여 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서양문화의 뿌리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역경’은 동양에서 첫째로 꼽혀온 고전이다. 그런 만큼 우리의 생활에서도 은연중에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다.

팔괘를 각각 결합시킨 64괘는 당초 점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대량 발굴된 갑골문(甲骨文)의 대부분이 복사(卜辭)였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64괘를 최초로 풀이한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중의 ‘길(吉)’, ‘흉(凶)’, ‘회(悔)’, ‘린(吝)’과 ‘무구(无咎)’ 등 앞일을 예측하는 단어들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후일 ‘문언(文言)’과 ‘계사(繫辭)’ 등 ‘십익(十翼)’이란 10편의 해설문이 붙어 반복 순환하는 삼라만상의 법칙과 변화무상한 인간세상의 철리를 담은 경전으로 변모했다.

팔괘는 건(乾: ☰), 곤(坤: ☷), 진(震: ☳), 손(巽: ☴), 감(坎: ☵), 리(離: ☲), 간(艮: ☶), 태(兌: ☱)다. 하늘(天), 땅(地), 우레(雷), 바람(風), 물(水), 불(火), 산(山), 못(澤)을 상징한다. 이를 방향에 대입하면, 건은 서북, 곤은 서남, 진은 동, 손은 동남, 감은 북, 리는 남, 간은 동북, 태는 서다. 양효(⚊)와 음효(⚋)가 섞여 있는 괘는 적은 수의 효로 음양이 결정된다. 진, 감, 간은 양괘, 손, 리, 태는 음괘다. 순위는 밑에서부터 정해진다. 따라서 인륜에 대비하면 건과 곤은 부모, 진과 손은 장남장녀, 감과 리는 차남차녀, 간과 태는 막내다. ‘십익’ 중 ‘설괘(說卦)’편의 설명이다.

팔괘만으로는 세상의 복잡다단함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므로 이를 포갠 ‘䷀(건괘)’, ‘䷜(감괘)’ 등과 같은 형태의 64괘가 만들어지고 각각 상징하는 의미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대장동 스캔들로 유명해진 ‘동인(同人)’은 ‘䷌’이고, 상하가 바뀐 그 다음의 ‘䷍’가 제14괘 ‘대유(大有)’다. 전자는 위가 하늘이고 아래가 불이므로 ‘천화(天火)’, 후자는 ‘화천(火天)’을 각각 붙여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제64괘 ‘미제(未濟)’는 ‘䷿’이므로 ‘화수(火水)’가 붙는다.

‘역경’에서 양효는 9, 음효는 6으로 표기된다. 맨 밑의 효에는 ‘초(初)’를 붙여 ‘초구(初九)’와 ‘초륙(初六)’, 맨 위에는 ‘상(上)’을 붙여 ‘상구’와 ‘상륙’이 된다. 중간은 ‘구이’, ‘육이’, ‘구삼’, ‘육삼’, ‘구사’, ‘육사’, ‘구오’, ‘육오’다. 그 중 ‘건괘’의 ‘구오’는 지존(至尊)을 상징하여 천자의 자리를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 한다. 맨 위의 ‘상구’는 너무 높이 올라가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음효를 6으로 표기한 것에 대해 역대의 주석가들이 음수의 가장 큰 수이기 때문이라고 해설했으나 허무맹랑한 말이다.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했듯이 9가 최고 양수인 것은 맞으나, 8을 두고 6이 제일의 음수라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이는 중간의 빈 부분이 전체의 3분의 1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때문이다. 따라서 9에 대응해 6을 써야 한다. ‘역’의 괘는 철저하게 수학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둘의 차이도 수학적으로 보아야 옳다.

60간지(干支)는 십간과 십이지가 홀수는 홀수끼리, 짝수는 짝수끼리 순서대로 결합돼 이루어졌다. 따라서 갑자(甲子)는 있지만 ‘갑축(甲丑)’은 없으며, 을축(乙丑)은 있지만 ‘을인(乙寅)’은 없다. 십이지로 동물과 하루의 시각 및 방향을 나타냈듯이 십간에도 여러 의미가 부여됐다. 갑을(甲乙)은 동, 병정(丙丁)은 남, 무기(戊己)는 중, 경신(庚辛)은 서, 임계(壬癸)는 북이다. 동은 식물의 싹이 돋는 푸른(靑) 봄, 남은 중천의 해가 붉게(赤 또는 朱) 작열하는 여름이 된다. 중앙은 누런(黃) 땅이다. 해가 지는 서쪽은 초목이 마르고 흰(白)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 되고, 북쪽은 어두운 밤(黑 또는 玄)으로 겨울과 연결된다. 지난 신축(辛丑)년을 ‘흰 소’, 올 임인(壬寅)년을 ‘검은 호랑이’라 하는 연유다. 청룡(靑龍), 주작(朱雀), 백호(白虎), 현무(玄武)도 여기서 생겨났다. ‘좌청룡, 우백호’는 고분 속의 주인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조선시대 도성에서 내려다 볼 때 지도상 전라도의 왼쪽을 전라우도, 경상도의 오른쪽을 경상좌도라 한 것과 같다.

동은 생기가 돋기 시작하는 나무(木)다. 남은 이글거리는 해와 같은 불(火)이며, 중앙은 삶의 터전인 흙(土)이다. 서는 차가운 쇠(金)이고, 예부터 북해(北海)가 있다고 여겨진 북은 물(水)이다. 오행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도 자연의 순리로 보면 쉽다. 상생은 순서대로다. 나무에서 불을 취하므로 ‘목생화(木生火)’, 불에 탄 재가 흙이 되므로 ‘화생토(火生土)’, 흙에서 쇠가 나오므로 ‘토생금(土生金)’, 쇠는 차면 물방울이 맺히므로 ‘금생수(金生水)’, 물이 나무를 살리므로 ‘수생목(水生木)’이다. 반면에 나무가 흙에서 양분을 뺐으므로 ‘목극토(木剋土)’, 흙이 물을 막으므로 ‘토극수(土剋水)’, 물이 불을 끄므로 ‘수극화(水剋火)’, 불이 쇠를 녹이므로 ‘화극금(火剋金)’, 쇠가 나무를 베므로 ‘금극목(金剋木)’이다.

‘불에 태우다’는 뜻의 ‘부병정(付丙丁)’ 또는 ‘부병’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일본어에서는 십간의 명칭이 이 오행에 따라 각각 키노에(木の兄)와 키노토(木の弟), 히노에(火の兄)와 히노토(火の弟), 쯔치노에(土の兄)와 쯔치노토(土の弟), 카노에(金の兄)와 카노토(金の弟), 미즈노에(水の兄)와 미즈노토(水の弟)로 불린다.

이러한 역과 음양오행의 기본지식을 상식적으로 알 필요는 있으나 이에 맹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사회지도층조차 여전히 점술과 미신에 의지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이와 관련된 정치권 인사들의 가십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대중의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서 각별히 신중하게 처신할 일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