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가와히로시게(歌川広重)의‘오하시아타케의소나기’와빈센트 반 고흐가 이를 모사한‘빗속의 다리’.야후재팬
우타가와히로시게(歌川広重)의‘오하시아타케의소나기’와빈센트 반 고흐가 이를 모사한‘빗속의 다리’. 사진 야후재팬

필자가 대학에 재직하던 10여 년 전, 한 동양학 관련 학회로부터 논문 심사 의뢰를 받았다. ‘주자(朱子)의 문학이론 연구’라는 제목이었다. 논문을 읽어가다 보니 필자에게 상당히 익숙한 내용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로부터 수년 전에 필자는 ‘주희(朱熹)의 문론(文論)’과 ‘주희의 시론(詩論)’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시차를 두고 발표한 바 있다. 대조 결과 그것은 두 편의 졸고를 한편으로 ‘짜깁기’한 가짜 논문으로 확인됐다. 만약 그 글이 필자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 발표됐다면 후일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30여 년 전 필자가 조간신문 문화부에서 학술과 출판을 담당하고 있을 즈음, 구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보리스 옐친이 급부상해 세계적 인물이 됐다. 시류에 편승해 국내 출판사가 그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를 필자가 가장 먼저 문화면 특집기사로 썼다. 그런데 필자의 글이 그날 유수한 어느 석간신문에 그대로 실렸다. 안면 있는 선배 기자가 토씨 몇 군데만 고쳐 자기 이름으로 기사를 낸 것이었다.

몇 년 전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시위 현장 공연에 자주 등장한 어느 가수의 유명 곡이 표절(剽竊) 시비에 휘말렸다. 인터넷상에는 독일의 원곡과 비교하는 영상도 다수 올랐다. 누가 들어도 템포가 빠르고 느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같은 멜로디였다. 독일 민요 ‘오 소나무여’가 19세기 말 영국의 노동운동에서 행진곡풍의 전투적인 ‘적기가(赤旗歌)’로 바뀌어 전혀 다른 곡으로 들리는 것과 유사한 경우다. 뒤늦게 불거진 이 문제로 해당 가수도 많은 애를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 애창곡 반열에까지 오른 이 노래를 처음 발표할 때부터 번안곡이라고 밝혔으면 당연히 그런 곤욕은 치르지 않았을 터다.

사회적으로 표절 문제는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표절의 판정 기준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누가 봐도 표절이 분명한 것 같은데 관련 단체의 판단이나 사법기관의 해석이 전혀 다른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표절은 문자 그대로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쳐서 자기 것으로 삼는 부도덕한 행위이므로 근절돼야 마땅하다.

이에 비해 모방은 창조의 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흉내 내면서 말을 배우듯이 모든 일에서 모방 없이는 훌륭한 창조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주 만물이 ‘이(理)’라는 근원적인 원리에서 생성됐다는 성리학 이론이나 ‘이데아’라는 이념의 모방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처럼 모든 분야에는 저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가장 이상적인 법칙과 형식이 있다. 전통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경험이 집대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전통을 모방하고 숙달시켜 나감으로써 해당 분야에서의 건설적인 창조를 추구할 수 있다. 조선 최고의 명필 김정희(金正喜)가 젊은 시절 선인들의 글씨를 끊임없이 임서(臨書)하고 모방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추사체(秋史體)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천하의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지는 이백(李白)은 세상의 모든 격식에서 초탈한 것 같아 보이지만, 젊은 시절 그는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엮어서 전한 방대한 양의 시문 선집인 ‘문선(文選)’에 대한 모방 작업을 세 차례나 감행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의 작품 중에는 옛 시를 모방한 것이 적지 않다. 남북조(南北朝) 시대 포조(鮑照)가 옛 악부시(樂府詩)를 모방한 ‘의행로난(擬行路難)’을 그가 다시 모방한 ‘행로난(行路難)’은 특히 유명하다. “상을 마주하고도 먹지 못해, 칼 뽑아 기둥 치며 길게 탄식하네(對案不能食, 拔劍擊柱長太息)”라는 포조의 구절을 이백은 “잔 멈추고 젓가락 던지며 먹지 못해, 칼 뽑아 사방 돌아보니 마음만 멍하네(停杯投筯不能食, 拔劍四顧心茫然)”라고 흉내 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탕기영감’에는 우키요에가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 야후재팬
빈센트 반 고흐의 ‘탕기영감’에는 우키요에가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 야후재팬

포조보다 조금 앞선 서진(西晉)의 육기(陸機)와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지만 옛 시를 모방한 ‘의고(擬古)’ 작품이 유달리 많다.

그러나 이들의 시편은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비록 다른 작품의 형식과 시어를 빌려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의 심경과 정서를 잘 표현해냈기 때문에 훌륭한 창작품으로 평가받아오고 있다.

모방에 있어서 당연히 두보(杜甫)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리저리 많은 본받음을 더하는 것이 너의 스승이다(轉益多師是汝師)”라고 말할 정도로 모방을 중시했다. 그 역시 이러한 모방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시성’으로 떠받들어지기는커녕 한낱 ‘거친 형태의 시’나 짓는 평범한 시인에 불과했을지 알 수 없다. 청(淸)의 비평가 심덕잠(沈德潛)이 “옛 작품을 배우지 않고 쓴 시를 일러 ‘야체’라 한다(詩不學古, 謂之野體)”라고 주장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낡은 말은 힘써 버리라(陳言之務去)”고 부르짖을 만큼 독창성을 강조한 당(唐) 중기의 한유(韓愈)도 사실은 모방의 달인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진학해(進學解)’는 전한(前漢) 중기의 동방삭(東方朔)이 쓴 ‘답객난(答客難·손님의 힐난에 답함)’과 후기의 양웅(揚雄)이 쓴 ‘해조(解嘲·조롱에 대한 해명)’를 모방한 글이다. 국자감(國子監) 박사(博士)로 부임한 작자가 학생들에게 훈시하다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조롱 섞인 질문을 받고 이를 해명한다는 구성 설정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를 모방작이라고 폄하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작자의 사상과 감정이 잘 드러나 있고 문장의 전개 과정에 창의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의사는 ‘우수마발(牛溲馬勃)’까지도 약재로 갖추어 둔다고 한 이 문장 속의 숙어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장편 시 ‘황무지’로 유명한 T.S. 엘리엇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란 글에서 “발전도상에서는 셰익스피어나 호머는 말할 것도 없고 구석기 시대의 암벽화까지도 버려질 수 없다”라고 밝힌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북송(北宋)의 황정견(黃庭堅)이 ‘점철성금(點鐵成金)’과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제창한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작가가 내면세계와 외면 사물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면 비록 낡은 시어라도 쇠를 두들겨 금을 만들 듯이 빛을 발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고, 후자는 지난 작품 속의 의미를 되살려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100여 년 후 금(金)의 왕약허(王若虛)는 “다만 교활하게 표절하려는 자일 뿐이다(特剽竊之黠者耳)”라고 혹평했지만, 꼭 그처럼 단순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육기가 문학 창작 과정에서의 고뇌와 경험을 부의 형식으로 지은 ‘문부(文賦)’라는 글에서 “비록 지난 것을 이어받지만 더욱 새롭게 만든다(襲故而彌新)”라고 한 말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과연 여하히 새롭게 만드느냐가 관건이지만, 이는 개인의 재능에 달렸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방에 관한 담론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19세기 후반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에서 들어온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에 매료돼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모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후진 세계였던 동방의 문화를 그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속의 대한민국도 과거 구미와 일본 등 선진 문명에 대한 모방에서 이뤄졌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모방하는 나라에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나라로 눈부시게 변모했지만,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모방하고 재창조하는 열린 자세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선진과 후진을 막론하고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어느 곳의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여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의 발전 상태를 이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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