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피에르 불레즈 홀. 사진 위키미디어
베를린 피에르 불레즈 홀. 사진 위키미디어

그리스 여신들의 우아한 춤이 눈앞에 펼쳐진다. 곧 그들이 사라지고 미스터리한 바람이 들판에서 매섭게 불어오기 시작한다. 바람이 잦아든 사이 지중해에 반사된 밝은 햇빛에 눈이 부셔왔다. 그러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지고 쓸쓸한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불과 1시간 반 남짓한 순간에 이 모든 것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바로 작년 11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피에르 불레즈 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말이다. 당시 연주회에서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는 클로드 드뷔시의 전주곡(前奏曲) 24개 전곡을 모두 연주했다. 

피에르 불레즈 홀은 원형 경기장처럼 객석이 무대를 타원형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구조다. 이러한 곳 한가운데 등장한 피아니스트는 드뷔시의 시적인 감성을 자신만의 예술적인 터치로 무대 위에 지중해에서 햇빛을 가져왔고, 매서운 바람을 불러내기도 했으며, 폐허가 된 성당을 그려내며 그곳에 있던 관객들의 눈과 마음 모두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연주가 끝나고 공연장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는 이국적인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탐험가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홀가분하고 즐겁지만, 서운한 감정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연주와 드뷔시의 작품은 특별했던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 반년이 흘렀다. 겨울은 지나갔고 봄을 넘어 여름으로 가는 시점이다. 장소는 베를린에서 서울로 바뀌었고 필자는 매일 집과 직장을 분주히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삶을 사는 중이다. 누군가는 도시의 떠들썩하고 다이내믹한 라이프 스타일이 좋다고 하지만, 시끄럽고 정신없는 삶에 이내 권태로워졌다. 마음은 여유를 찾아 다른 세계로 떠나고자 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갈망을 늘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잊었다가 새롭게 깨달을 때 드뷔시가 남긴 말을 떠올리곤 한다. “여행을 실현할 수 없을 때는 당신의 상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의 말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 드뷔시 전주곡 악보의 음표를 손가락으로 옮기거나 헤드폰에서 귀로 전해지는 드뷔시의 음반을 즐겨본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벗어나 저 먼 대륙에서 경험할 것 같은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들을 마음 안에 실현해본다. 

유로화를 쓰기 전 사용했던 프랑스의 20프랑짜리 지폐에는 드뷔시가 그려져 있었다. 드뷔시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자부심과 예술에 대한 애정이 담긴 셈이다. 사진 셔터스톡
유로화를 쓰기 전 사용했던 프랑스의 20프랑짜리 지폐에는 드뷔시가 그려져 있었다. 드뷔시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자부심과 예술에 대한 애정이 담긴 셈이다. 사진 셔터스톡

클로드 드뷔시는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살다 간 프랑스 작곡가다. 당시 프랑스 문학, 회화에 흐르던 인상주의 사조를 자신의 음악에도 받아들여 음악사에서도 대표적인 인상파 작곡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여러 명작을 남겼는데 그중 특히 ‘달빛(Claire de lune)’은 영화, 드라마 및 광고에도 자주 쓰일 정도로 대중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위에서 언급한 전주곡을 언급하고 싶다. 이 전주곡에서 그는 모네에 필적할 정도로 인상주의적인 현상을 음악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음향의 아름다움을 최상으로 끌어냈다. 이는 프랑스 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미래의 프랑스 음악을 그려내려 한 그의 의지가 실현된 작품이기도 하다. 

드뷔시가 활동한 19세기 중후반은 독일어권 지방의 음악 영향력이 엄청났던 시기였다.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말러 그리고 당시 전 유럽이 열광한 바그너 등. 물론 프랑스에도 당시 생상스, 포레 등의 작곡가가 있었지만, 독일어권 지방의 영향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당시 드뷔시는 “독일 음악 영향력에서 프랑스가 벗어나려면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라고 편지에서 탄식했다고도 전해진다. 

프랑스 음악계도 이러한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음악에서 프랑스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표현할 수 있을지 프랑스 국립 음악 협회(Société Nationale de Musique) 같은 단체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히 이어졌다. 그들 논의의 중심에는 특히 어떻게 하면 바그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음악을 창작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고 한다. 

드뷔시는 17~18세기 프랑스 바로크에서 해답을 찾는다. 바로 프랑스가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던 ‘위대한 세기(le grand siècle)’에서 말이다. 드뷔시는 자신의 전주곡에서 루이 쿠프랑의 ‘마디가 없는 전주곡’에서 원칙과 자유의 조화를, 프랑수와 쿠프랑의 시적인 부제가 노래하는 모호한 아름다움을, 또 장 필립 라모의 창의적인 표현에서 받은 영감을 투영했다. 또 장 앙투완 와토의 그림 ‘시테라섬으로의 순례’와 같이 페트 갈랑트가 표현하고자 한 이상적인 세상으로 가고자 한 동경의 시각적 표현 또한 음악에 담고자 했다. 

따라서 24개 작품으로 구성된 드뷔시의 전주곡은 곡마다 부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음과 향기는 밤하늘에 흐르고’ ‘눈 위의 발자국’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 그리고 ‘달빛이 쏟아지는 테라스’ 등 시적인 부제를 갖는 전주곡이 테마에 맞는 인상적인 현상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피아노로 이러한 작품을 연주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기술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드뷔시가 표현한 감정이 변화하는 인상적인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해야 하고, 당시 언어와 전통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 바로크의 하프시코드 연주 기법을 받아들여 악보에 나와 있는 음가와는 다른 루바토와 세밀한 뉘앙스적인 표현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드뷔시 작품은 음악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데도, 피아니스트들이 연주 프로그램에 넣는 데 주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노력은 장 필립 라모가 17~18세기에 강성했던 이탈리아 음악, 특히 오페라의 영향권에서 프랑스 음악의 정체성을 정의한 것과 비슷하다. 드뷔시 또한 당시 독일어권 음악의 영향력 탓에 모호했던 프랑스의 음악에 다시 한번 정체성을 심어주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는 전주곡과는 별개로 과거 선배들의 예술로 받은 영감에 자신이 느낀 감사와 존경을 헌사하고자 ‘라모를 찬양하며’라는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드뷔시 전주곡 피아노 장 이브 티보데

필자는 지난해 베를린에서 티보데의 연주로 드뷔시의 전주곡을 감상했다. 그의 섬세한 터치는 소리의 작고 크고의 평면적인 개념을 넘어서 멀고 가깝고 밝고 흐릿한 소리를 표현하는 3D의 입체적 음향의 향연이었다. 현대적인 프랑스 감각이 녹아있는 연주라 할 수 있겠다. 이 음원으로 듣는 감상자 또한 필자가 베를린에서 경험했던 입체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의 여행으로 초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