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원호문(1190~1257) 묘 앞의 조각상. 그는 조국 멸망의 대재난을 겪으면서 문인으로서 역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결과가 된 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원호문(1190~1257) 묘 앞의 조각상. 그는 조국 멸망의 대재난을 겪으면서 문인으로서 역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결과가 된 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원호문(元好問)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 말기와 몽골족의 원(元) 초기에 활동했던 시인이다. 청(淸) 말기의 저명인사 증국번(曾國藩)이 역대 최고 시인 18인의 작품을 선별해 엮은 ‘십팔가시초(十八家詩抄)’에 그의 작품이 다수 수록돼 있다.

그는 몽골족의 침입으로 금이 멸망해가는 전란 속에서 조국의 문헌들과 수많은 시인의 작품이 망실될 것을 염려해 오랫동안 동분서주하며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애쓴 결과 그가 정리한 자료들은 후일 ‘금사(金史)’의 중요한 기초가 됐고, 시인들의 작품은 ‘중주집(中州集)’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남송(南宋)과 대치하던 금이 북방의 중원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수록된 작품들 앞에는 각 시인들의 전기도 지어 넣었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금나라 시인들의 시 중에서 남겨진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호문의 시문집은 그의 호를 붙여서 ‘유산집(遺山集)’이라 부른다. 그의 시 가운데는 조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겪은 사연과 감회가 깃들어 있는 것이 많다. 그 작품들이 독자에게 주는 감흥은 뭔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청 중기의 유명한 사학자이자 시인 겸 평론가인 조익(趙翼)이 ‘제유산시(題遺山詩: 유산의 시에 붙임)’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운, 세상의 상전벽해 읊으니 시구가 절묘해지네(國家不幸詩家幸, 賦到滄桑句便工).” 결과적으로 왕조 멸망의 대재난이 시인에게는 훌륭한 시편들을 남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두보(杜甫)의 시는 대부분 명작으로 꼽히지만 특히 안록산(安祿山)이 일으킨 전란을 겪으면서 지은 시 중에 대표작이 많다. 그 가운데 이른바 ‘삼리(三吏)’나 ‘삼별(三別)’ 같은 시에는 부족한 관군을 충원하기 위해 관리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잡아가는 등의 횡포와 이로 인한 대중의 고통이 그려져 있다.

‘삼리’ 중의 ‘석호리(石壕吏)’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관리가 사람을 끌고가는 정황이 생동감 있게 서술됐다. 지방의 하급 관리로 부임하는 도중 날이 저물어 시인이 석호촌(石壕村)의 어느 민가에 투숙했다. 그때 관리가 찾아오자 주인 노인이 담을 넘어 도망쳤다. 관리의 호통 소리에 그 아내가 나와 하소연했다. 세 아들이 모두 군대에 끌려가 집에는 노부부와 젖먹이 손자를 기르는 며느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꼭 사람을 데려가려면 자기가 대신 가서 군사들의 밥을 지어주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할머니가 관리를 따라갔다. 밤늦도록 남은 가족의 흐느낌 소리를 듣고 잠이 든 시인은 이튿날 아침 노인과 작별하고 임지로 떠난다. 또 ‘삼별’ 중의 ‘신혼별(新婚別)’에는 어젯밤에 혼례를 올리고 오늘 아침에 군사로 징집된 남편을 떠나보내는 젊은 여인의 애끓는 마음이 절절하게 묘사돼 있다. 그리고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그대로 있다(國破山河在)”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작 ‘춘망(春望)’이나 ‘등악양루(登岳陽樓)’ 같은 작품 역시 전란 속에서의 비탄과 고뇌를 읊은 것이어서 더욱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이러한 작품들은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민간의 고통과 사회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문학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를 ‘시사(詩史·시로 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적의 침입이나 병란 등 국가와 사회의 위기가 개인에게 좋은 기회가 된 예는 당연히 무인에게도 많다. 평소에 ‘영웅에게 무용을 펼칠 곳이 없어서(英雄無用武之地)’ 안타까웠던(?) 무인이 큰 공을 세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10년 동안 군대를 양성하는 까닭은 한때에 쓰기 위해서다(養兵十年, 用在一時)”라는 말과 같이 준비가 잘돼 있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국가나 사회의 위기뿐 아니라 개인의 불행이나 곤궁함이 때로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북송(北宋) 중기의 구양수(歐陽脩)는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고 표현했다. “시는 곤궁해진 다음에 더 절묘해진다”는 뜻이다. 그의 친구 매요신(梅堯臣)의 삶이 비록 곤궁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시가 더 훌륭해졌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전국시대 후기 굴원(屈原)이 ‘이소(離騷)’로 대표되는 20여 편의 ‘초사(楚辭)’를 세상에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초(楚)의 고관으로 있다가 왕의 미움을 받은 끝에 조정에서 쫓겨나 강호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또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하지 않았다면 ‘사기(史記)’가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식(蘇軾)도 관직에서의 갖가지 우여곡절과 수차례의 유배 생활 없이 순탄하게 일생을 보냈다면 다양한 분야의 많은 명편들을 짓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국문학사에서도 정철(鄭澈)과 윤선도(尹善道)가 관직 생활에서 불운을 겪지 않았다면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오우가(五友歌)’ 등의 명작들이 나올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오랜 유배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지금과 같이 방대하지 않았을 테고,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겪지 않았다면 ‘세한도(歲寒圖)’는 그릴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를 두고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기 위해 먼저 그 마음에 고통을 주고 몸을 힘들게 한다. 또한 궁핍함을 겪게 하고 하는 일도 어렵게 만든다. 이로써 그 내면이 단련되고 능력도 증강되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을 때 흔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을 쓴다. 모든 사전에 ‘화가 바뀌어 복이 되다’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해석이다. ‘화를 돌려서 복이 되게 하다’로 풀이해야 옳다. 화가 저절로 복이 되는 경우는 없다. 화가 복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의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지혜와 인내와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랜 쓰라림을 겪으며 참고 견뎠기 때문에 그 쓰라림이 다한 결과 달콤함을 맛볼 수 있으며(苦盡甘來),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상황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것(必死則生)이다. ‘역경(易經)’의 말처럼 인간이 곤궁한 처지에 이르면 이를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하면 마침내 곤궁함에서 벗어나 형통할 수 있게 된다(窮則變, 變則通). 여기서의 ‘변화’에는 인간의 적극적인 자세와 강인한 의지, 그리고 진취적 사고와 역발상(逆發想)의 지혜 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복이 화가 되고 그 화가 다시 복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이미 지난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의 삶에 희망을 걸어 긍정적으로 잘 살아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논어(論語)’에 ‘지난 것은 아무리 말해야 소용없으나, 앞으로 올 것은 아직도 쫓아갈 수 있다(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는 말이 있다. 이를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지난 것은 말해도 소용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올 날은 쫓아갈 수 있음을 알겠노라(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는 운문으로 변형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즐겁게 시작하는 교훈으로 삼았다.

작금의 세상은 국가와 사회와 기업과 가계를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에서 경험했듯이 모두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어려운 상황은 얼마든지 반전돼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 겸하여 우크라이나가 공전(空前)의 환란(患亂)을 잘 극복해 전화위복할 수 있게 되고, 우리에게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기를 바란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