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앙의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의 삽화. 사진 아동판 ‘당시삼백수’
진자앙의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의 삽화. 사진 아동판 ‘당시삼백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으뜸으로 꼽히는 완적(阮籍·210~263)은 삼국시대 위(魏)의 대표적 명사로서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다. 남북조(南北朝)시대 양(梁)의 종영(鍾嶸)이 역대 오언시(五言詩)에 대한 그의 저명한 비평서인 ‘시품(詩品)’에서 완적의 시를 ‘상품(上品)’에 두어 높이 평가했다. 그 문학적 성취는 ‘영회시(詠懷詩)’ 82수에 집약돼 있다. 다음이 그 첫 작품이다. 

“한밤에 잠 못 들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 울린다. 엷은 휘장에 밝은 달 비치고, 맑은 바람 내 옷깃 스친다. 외기러기 밖의 들에서 울고, 날 새 소리 북쪽 숲에서 들려온다. 서성거림에 무엇이 보이는가 하니, 시름겨워 홀로 마음 아파하노라(夜中不能寐, 起坐彈鳴琴. 薄帷鑒明月, 淸風吹我襟. 孤鴻號外野, 翔鳥鳴北林. 徘徊將何見, 憂思獨傷心).”

고독으로 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는 정경이다. 역대의 일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관직에 나아가는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지만 늘 고독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지식인들이 걸핏하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뇌와 불안의 내면을 그는 이와 같은 시편들로 승화시키는 한편 장기간의 음주로써 달래려고도 했다. 그래서 술에 얽힌 그의 여러 기행(奇行)도 이야깃거리로 전해져 온다.

초당(初唐) 때의 진자앙(陳子昂·659~700)은 사람됨과 시풍에서 모두 높은 기상을 보여준 강골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 대표작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라는 고풍(古風)의 시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앞에서는 옛사람을 보지 못하고, 뒤로는 올 사람을 보지 못하도다. 하늘과 땅의 아득함을 생각하노니, 홀로 슬퍼지며 눈물이 흘러내린다(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유주대’는 전국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인재를 맞이하던 ‘황금대(黃金臺)’를 지명을 붙여 부른 이름이다. 여기에 올라 관직에서의 실의로 인해 생겨난 고독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곳에 얽힌 옛일을 떠올리니 소왕과 같이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 그를 더욱 고독하게 한 것이다.

유종원의 ‘강설’을 소재로 한 그림. 사진 바이두
유종원의 ‘강설’을 소재로 한 그림. 사진 바이두

유종원(柳宗元·773~819)은 문장으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으로, 시로는 중당(中唐) 최고 시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짧은 오언절구 ‘강설(江雪)’에는 절대고독의 환경적 상황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묘사돼 있다.

“천 봉우리 산에 새 날갯짓 끊어지고, 만 갈래 길에 사람 발자국 사라지다. 외로운 배 위 도롱이 삿갓 차림 늙은이, 홀로 눈 내리는 찬 강에서 낚시질한다(千山鳥飛絕, 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이 시는 세속을 초탈한 노인의 달관한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이면에는 시인의 고독한 심경이 가득 차 있다. 정쟁으로 인해 조정에서 영주(永州)라는 산간벽지로 쫓겨난 시인이 10년간이나 유배 생활과 다름없이 쓸쓸한 나날을 보낼 때 지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주 문왕(周文王)이 감옥에 갇힌 고독 상태에서 주역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존 번연도 12년간의 외로운 옥살이 중에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썼다. 또한 붓다와 예수도 고독 속에서 각각 깨달음과 하늘의 계시를 얻었으며, 강태공(姜太公)은 늙도록 고독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경륜과 신출귀몰한 병법을 구상할 수 있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독을 느끼는 상황과 양상은 제각각일 것이다. 꼭 깊은 산 속 외딴곳(窮山僻壤)이나 절해고도(絕海孤島)에 홀로 있어야 고독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는(道不同, 不相爲謀)’ 상태나 ‘대화가 통하지 않아 반 마디 말도 많다(話不投機半句多)’고 생각되는 경우에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 또는 ‘광장의 고독’이다. 반면에 초당(初唐) 시인 왕발(王勃)의 말처럼 “이 천지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아득한 하늘 저 끝에 가더라도 바로 이웃에 있는 것과 같다(海內存知己, 天涯若比鄰)”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앞의 예들에서 보듯이 고독은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불행한 상태도 되지만, 때때로 창작과 생산의 원천이 된다. 그러다 보니 고독하지 않은데 이를 위해 스스로 고독을 찾으려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북송(北宋) 후기의 진사도(陳師道·1053~1102)는 시를 지을 때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혼자 끙끙댔다. 그의 아내는 집 안의 개나 닭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가족들도 모두 방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시 창작을 위해 억지로 일시적 고독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시구를 갈고 닦기 위해서 이와 같은 과정도 필요한 경우가 있겠으나, 작가의 참된 내면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어 ‘병이 없는데 신음한다(無病呻吟)’고 비판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독은 이처럼 창작의 자극제가 되거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면의 본 모습을 찾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효용이 있으므로 예부터 많은 철인이나 현인들이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찬하기까지 했다.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고뇌가 없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렵지 않다(遯世無悶, 獨立不懼)(‘역경’)”거나 “무소의 외뿔처럼 다만 혼자서 걸어가라(붓다)”거나 “고독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므로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은 고독을 반갑게 맞이한다(쇼펜하우어)”는 말들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정신력의 결핍이나 부정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자칫 어려운 일을 당해 고독해질 때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나 현실에서 종종 보게 된다.

‘초사(楚辭)’라는 문학 장르를 개척, 수많은 명편을 남긴 굴원(屈原)은 문학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나 인간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이다. 고독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어부사(漁父辭)’에는 “온 세상이 다 흐리지만 나 홀로 맑고, 여러 사람들이 다 취했으나 나 홀로 깨어 있다. 그래서 쫓겨났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는 말이 나온다. 조정에서 자기 혼자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간절한 마음으로 특립독행(特立獨行)하다가 남들의 모함을 당해 버림받았다는 뜻이다. 제도권 안에서도 소통되는 자가 없어 외로웠는데 그 밖으로 쫓겨났으니 더욱 고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그에게 어부는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관모의 끈을 씻을 수 있지만,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수 있다”며 생각을 넓게 해 외곬으로 치닫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격한 감정을 못 이겨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물론 이는 후대의 위작(僞作)으로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굴원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굴원의 작품들 곳곳에 그러한 외골수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개성에 따라서 고독을 잘 견디는 사람이 있고,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는(不甘寂寞) 사람이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대사처럼 구슬픈 선율을 들으면서 웃음 짓는 낙관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우스운 농담을 들어도 이조차 보이지 않는 비관적인 사람이 있는 세상이다. 굴원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독으로 생겨나는 시름을 떨치기 위해 약물이나 술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정신과 육체를 더욱 황폐하게 할 뿐 정도가 아니다. 이백(李白)의 시구처럼 “칼을 빼어 물을 끊으려 해도 물은 더욱 세차게 흐르고, 잔을 들어 근심을 삭이려 해도 근심은 더욱 근심을 부르기(抽刀斷水水更流, 擧杯銷愁愁更愁)” 마련이다. 

고독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극복할 정신력을 기르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 일이 인생에서 무엇보다 요긴한 과제 중의 하나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혹은 짧게 혹은 길게 고독 상태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에 언제부터인가 ‘고독력(孤獨力)’이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게 됐다. 고독을 극복할 정신적인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된 서적도 수없이 많아 간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정신 수양을 위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가장 절실함은 물론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