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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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부모님이 사는 경북 예천에 다녀왔다. 2년 전에 퇴직한 부모님은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것과 동시에 도시 생활도 정리하셨다. 지난 20여 년 동안 주말마다 고향인 예천을 오가며 전원생활을 준비하시더니, 드디어 주말의 터전이었던 곳을 삶의 터전으로 바꿀 결심을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생 후반기를 살겠다는 결심은 두 분의 직업을 바꾸는 데에서 출발했다. 부모님은 인생 2막을 농부로 살고 계시다.

예천은 사과의 고장이다. 가을 무렵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은은한 사과 향기가 기분 좋게 코끝을 자극한다. 지난 주말 부모님 댁에 갔을 때도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사과 향이었다. 그 말인즉,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과 수확의 계절이 왔다는 얘기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였지만 이렇다 할 휴식도 없이 사과밭으로 투입됐다. 밭으로 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사과 따는 데 집중한 시간은 올해 내가 보낸 시간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기쁘고 자연스럽게 충만했다. 사과 한 알을 붉게 만들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사과나무에 붙어살아야 한다. 열매 하나에 영양이 집중될 수 있도록 다른 열매들을 끝도 없이 솎아 주어야 하고 사과가 해를 받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변 잎을 하나하나 정리해 주는 일은 기본,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냥 빛깔 좋은 사과가 달려 주는 것도 아니다. 힘들게 키운 사과들을 하나하나 따서 상자에 담아 이리저리 옮기는 것도 모두 사람이 직접 하는 일. 어느새 환갑이 된 우리 부모님이 그토록 강한 체력을 요하는 일들을 직접 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올려보내 주는 사과며 사과주스를 받아먹은 지는 어느새 두어 해가 됐지만, 부모님이 키운 사과라고 해서 각별히 다른 마음으로 사과를 대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사과밭에서 몇 박스 분량의 사과를 따고 나서 사과를 둘러싼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아니,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가 달라졌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먹는 사과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할 수 없게 됐다. 맛이 있다거나 맛이 없다거나 하는 판단들은 그 시간을 모를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때로 우리 인생은, 알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알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혜진의 소설 ‘경청’은 많은 것을 빠르게 판단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주인공은 삼십대 후반의 유명한 심리상담사 임해수다. 해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느 배우를 비판하는 내용의 대본을 별생각 없이 읽었다가 그 배우를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로 낙인찍힌다. 인터넷에서 해수의 신상은 엉터리로 짜깁기된다. 해수를 소재로 만들어진 밈이 유행어쯤으로 사용되며 그녀를 모욕하기도 한다. 잘나가던 과거의 삶은 한순간 끝난다. 지금 그녀는 모욕의 한가운데에서 수치심에 휩싸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일자리를 잃고, 남편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단절되고, 가까운 마트조차 편하게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에서 자신이 추방됐다고 느낀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사과’와 ‘진정한 뉘우침’이란 뭘까? 뉘우치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이전의 삶이란 뭘까….

소셜미디어(SNS)는 놀라울 만큼 뛰어난 ‘연결망’이지만 SNS로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는 판단에 취약한 집단이 될 수도 있다. 잘 모르는 채로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연결돼 있으므로 같은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큰 힘을 만들어 내는 건 어느 때보다 쉬운 일이 됐지만, 판단의 근거는 점점 더 단순해질 수 있다. 세상사의 많은 일이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기 힘들지만, 판단의 세계에서는 많은 것이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해수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한편 해수와 같은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 속에도 우리는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해수의 입장에서 그녀를 옹호하지도 않고, 해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은연중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편을 가르는 것이라면 오히려 소설은 끝까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보다 무엇인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 있으며 나아가 필요한 일일 수도 있음을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구조는 중요하다. 소설은 ‘말하는 임해수’와 ‘듣는 임해수’, 두 개의 구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말하는 해수는 매일 밤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쓴다. 그중에는 사과 편지도 있고 항의 편지도 있다. 사과로 시작했지만, 항의로 이어지는가 하면 항의로 시작했는데 사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하는 편지는 결국 누구에게도 보내지 못하므로 해수의 말하기는 누구도 듣지 못한다. 반면 듣는 해수는 산책 중 만난 아이와 길고양이를 구조한다. 이 소설은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말로 끝이 난다. 희망이 있다면 말하는 해수가 아니라 듣는 해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듯, 여론 재판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한 이 소설은 듣기를 시작하며 끝난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김혜진

사진 민음사
사진 민음사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치킨 런’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과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불과 나의 자서전’이 있다. 특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딸이 서로의 삶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소설 ‘딸에 대하여’는 전 세계 16개국 언어로 번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