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의 진주,마데이라섬 경관. 사진 주스티노스
대서양의 진주,마데이라섬 경관. 사진 주스티노스

마데이라는 북대서양에 위치한 포르투갈령 화산섬이다. 크기가 제주도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데이라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다. 1949년 영국 수상 처칠이 이 섬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만찬 때 1792년산 마데이라가 서빙됐는데, 와인의 풍미가 여전히 깊고 진한 것에 감탄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이 와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마데이라는 와인 중에 가장 긴 수명을 자랑한다. 서늘한 곳에서 숙성되는 일반 와인과 달리 열기 속에서 숙성되기 때문이다. 단맛이 많아 디저트 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신맛이 탄탄해 식사에 곁들여도 좋은 와인이다. 설 음식과 즐겨도 궁합이 색다르니 이번 설에는 마데이라를 준비해 보면 어떨까. 오랜만에 모인 일가친척과 100년 넘게 유지되는 강인함을 나누며 올 한 해 무탈과 건강을 기원한다면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마데이라섬 경사면에 일군포도밭. 사진 주스티노스
마데이라섬 경사면에 일군포도밭. 사진 주스티노스

대항해 시대와 마데이라

유럽 대륙 서쪽 끝에 자리한 포르투갈은 육로를 통한 향신료 수급이 어려워 뱃길 개척에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던 1419년 포르투갈은 모로코 해안에서 약 500㎞ 떨어진 대서양 바다에서 화산섬들로 이루어진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했다. 깎아지는 경사면에 삼림만 가득했던 이곳을 포르투갈은 농경지로 개발하고자 불을 놓았다. 그런데 숲이 어찌나 울창했던지 그 불이 무려 7년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16세기에 들어서며 인도로 가는 뱃길이 완성되자 유럽의 각 나라들은 너도나도 배를 이용한 교역에 뛰어들었다. 지나가는 배에 와인을 공급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던 마데이라는 농경지를 포도밭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범선으로 인도를 다녀오는 데 1년이 넘게 걸리던 시절. 그런데 긴 항해 중에 와인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적도를 네 번 통과하는 동안 무더운 배 밑창에서 서서히 익은 와인의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진 것이다. 사람들이 이 와인을 ‘비뉴 다 호다(Vinho da Roda·왕복 여행을 한 와인)’라고 부르며 앞다투어 구매하려 들자 마데이라에서는 아예 섬에서 이런 와인을 만들 방안을 고안해냈다. 처음에는 집 안에 불을 지펴 열기를 더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화재 피해가 빈번하자 아열대 기후라는 장점을 이용해 지붕 아래 다락에 와인을 두고 숙성시키기 시작했다. 칸테이루(Canteiro)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와인이 긴 시간 천천히 익으면서 풍부한 복합미를 품기 때문에 지금도 프리미엄급 마데이라는 이 방법으로 숙성되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안에 열선이나 온수 파이프를 설치해 빠르게 숙성시키는 에스투파젬(Estufagem) 방식도 개발됐지만 칸테이루보다 맛이 못해 주로 엔트리급 와인 생산에 쓰인다. 18세기와 19세기는 마데이라 와인의 최전성기였다. 1776년 7월 4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뒤 마데이라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마데이라가 얼마나 귀한 와인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추천 와인1. 엔리크 앤드 엔리크, 레인워터 2. 바르베이투, 세르시알 10년 숙성 3. 주스티노스, 말바시아 10년 숙성 4. 주스티노스, 싱글 캐스크 2000. 사진 김상미
추천 와인1. 엔리크 앤드 엔리크, 레인워터 2. 바르베이투, 세르시알 10년 숙성 3. 주스티노스, 말바시아 10년 숙성 4. 주스티노스, 싱글 캐스크 2000. 사진 김상미
마데이라 와인라이브러리. 사진 IVBAM
마데이라 와인라이브러리. 사진 IVBAM

 

종류에 따라 설 음식과 환상 궁합

마데이라는 포도즙이 발효되는 도중에 알코올 도수가 96도인 증류주를 더해 만드는 주정 강화 와인이다. 미처 다 발효되지 않은 잔당이 남아 단맛이 나지만 가장 당도가 낮은 드라이부터, 미디엄 드라이, 미디엄 스위트, 가장 단맛이 강한 스위트까지 스타일이 다양해 취향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다. 당도는 포도 품종에 따라서도 구분되는데 드라이한 세르시알(Sercial)은 신맛이 경쾌해 설 음식 중에서도 나물, 잡채, 호박전, 생선구이 등 채소나 해산물과 즐기기 좋다. 미디엄 드라이인 베르데호(Verdelho)는 단맛이 적당하고 열대 과일향이 풍부해 불고기나 갈비찜 등 달콤하고 짭짤한 양념이 가미된 육류와 잘 어울린다. 부알(Boal)은 미디엄 스위트로 보디감이 묵직하고 말린 과일과 견과 향이 탁월해 떡, 유과, 강정과 잘 맞는다. 말바시아(Malvasia)는 포르투갈에서도 케이크나 초콜릿 등 디저트와 즐기는 스위트 등급으로 약과나 정과처럼 꿀에 절인 한과와 즐기면 궁합이 환상적이다.

프리미엄급 마데이라는 숙성 기간에 따라 10년산부터 50년산까지 10년 단위로 나뉜다. 오래 숙성된 것일수록 풍미가 탁월하지만 그만큼 가격도 비싸다. 가성비를 고려한다면 10년산이 가장 추천할 만하다. 10만원대 가격으로 마데이라 특유의 감미로움과 복합미를 맛볼 수 있다. 좀 더 부담 없이 즐기고 싶다면 3년이나 5년 숙성된 것도 좋은 선택이다. 

떡, 한과와 잘 어울리는마데이라 와인. 사진 김상미
떡, 한과와 잘 어울리는마데이라 와인. 사진 김상미

이런 와인은 레인워터(Rainwater)라고도 부르는데, 이 이름이 붙은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마데이라섬이 너무 가파르다 보니 밭에 물을 줄 수 없어 포도가 빗물만 먹고 자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미국에 수출된 마데이라가 실수로 선착장에 오래 방치돼 비를 맞아 와인이 희석됐는데 의외로 맛이 좋아 ‘레인워터’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레인워터는 보디감이 비교적 가볍고 단맛과 신맛의 밸런스가 좋아 짭짤한 올리브와 함께 식전주로 즐겨도 좋고 다양한 음식과도 두루 잘 어울린다.

마데이라는 대부분 여러 해에 생산된 와인을 섞어 만들지만 작황이 좋은 해에는 그 해에 수확한 포도로만 만든 콜례이타(Colheita·빈티지 마데이라)도 출시된다. 마데이라 애호가들 중에는 출생이나 결혼 등 뜻깊은 해의 콜례이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워낙 생명력이 길어 환갑이나 결혼 50주년에 열어도 진하고 풍부한 맛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일반 와인과 달리 마시고 남은 와인의 맛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데이라의 큰 장점이다. 한 병쯤 냉장고에 넣어두고 저녁 식사 후 디저트로 조금씩 즐기면 하루의 피곤이 달콤하게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