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이로써 남편은 지척에 직장을 두게 되었고, 나는 일터에서 천리나 떨어지게 되었다.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말해 보라.’ 남편의 제의는 이런 상황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간 머릿속은 예전부터 염두에 둔 초소형 노트북, 얼마 전 지인이 샀다는 에스프레소머신, 최근에 본 명품 핸드백으로 복작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한 한 가지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아이와 남편으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엄마도, 아내도 아닌 그저 ‘나’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햇살처럼 빙긋대는 한 여인이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방 한 칸을 ‘나의 것’으로 배정받은 직후 뒤적거리던 미술잡지의 전시 프리뷰에서였다. 나이가 여인에는 못 미치고 소녀는 지나버린 듯한, 그래서 어떻게 불러야 할지 조금 막막한 ‘그녀’였다. 꽃장식이 달린 분홍 스웨터 차림의 그녀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도톰한 입술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움직거린다. 어느새 입술 끝에 올라앉은 미소는 볼을 타고 홍조 어린 눈가로 번진다. 결코 예쁘지 않은 얼굴이다. 미간은 너무 벌어졌고, 눈썹은 너무 초라하고, 콧방울은 너무 넓적하다. 하지만 ‘같이 웃어 주실래요?’라고 청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녀의 동그란 눈을 보라. 정령 무작정 사랑스러운 <새침데기>다.

 슬슬 <새침데기>의 화가 육심원(1974~  )이 궁금해졌다. 며칠 뒤 육심원의 네 번째 개인전을 찾았다. 장지에 분채를 올린, 파스텔의 부드러움과 유화의 화려함을 끌어안은 동양화였다. 유쾌해서 사랑스러운 그녀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나는 한 작품 앞에 딱 붙박이가 되었다. <신어 볼까>. 시선은 화려한 드레스를 모아 쥔 왼손을 지나 턱선을 받치고 있는 오른손을 거쳐 한쪽으로 쏠린 두 눈동자를 타고 앙증맞은 구두에 안착한다. 얼굴에 주근깨가 귀여운 그녀는 이제 막 신고 있는 붉은 구두를 벗고 새로운 구두에 도전해 볼 생각인 모양이다. 푹신한 쿠션 위에 놓인 뒤가 트인 털장식 구두는 마치 도발적인 고양이와 같아 보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쉽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육심원 그림의 첫인상에 기인한다. 대동소이한 그녀들에게서 나는 행위에 철저히 몰두하는 듯한 ‘집중과 몰입’의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음미하며 와인을 마시며, 혼절한 듯 휴식을 취하는 그녀들. 기어이 그녀들은 나를 화면으로 끌어들여 행위에 동참시키거나, 나아가 내가 곧 그녀가 되는 듯한 집중과 몰입의 경험을 청한다. 내 방이 생겼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런 경험들이 각별한 공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정짓고 만다. 형태도 색도 각별할 것 없는 각별한 공간 말이다. 이처럼 육심원 그림은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공간의 아이러니를 반복한다. 이곳은 오직 그녀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인 것이다. 

 ‘여자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존재다.’ 화가가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작업 화두로 삼았다는 데야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여자들은 예쁜 척할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라든지 ‘세상의 모든 여자는 공주여야 한다’라든지 젊은 미혼 예술가의 시각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하다. 그럼에도 건성으로나마 딸 둘과 남편을 챙기고, 별수 없이 시간 반이 걸리는 화랑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지금 나에게 육심원 작업은 희망의 메시지로 유효하다.

 이제 겨우 확보한 나만의 공간. 나는 이곳에서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차를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다. 행복한 착각이고, 아름다운 오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충분히 기쁘다. 그곳에 그렇게 나를 위해 준비된 나만의 공간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