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10월,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앞바다에서는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지상에서 만들어진 10만5000톤급 원유 운반선(자체 무게 2만톤)을 맨땅에서 만들어 바다에 집어넣는 ‘선박 육상 건조 공법’을 선보인 것이다. 세계 선박 제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현대중공업 육상 건조 공정을 찾았다.





 산 경제의 핵심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위치한 곳으로 가려면 ‘아산로’를 지나야 한다. 왕복 6차선 도로의 진입로 입구에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기려 이 도로를 아산로라 명명한다’는 입간판이 서 있다. 작은 지방 도시 울산이 국내 최대 중공업 도시로 성장하기까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끼친 영향을 아산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현대중공업은 오늘의 울산을 있게 한 시발점이다. 작은 어촌 마을을 세계 제1의 조선소로 키움으로써 울산은 국내 제1의 공업도시가 될 수 있었다.



 조선 부문 연간 5조원 매출로 세계 1위

 300만평에 달하는 공장 부지에서 지상으로부터 120m 상공에 위치한 대형 크레인이 적게는 수십톤짜리 선박 구조물을 옮기는 광경은 지켜보는 이를 압도한다. 조선 부문은 해양, 플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시스템, 건설장비 등 모두 5개 부문의 사업 분야 가운데 현대중공업 전체 매출(7조억원)의 절반 이상(5조1000억원)을 차지하는 간판 사업 분야다. 한국 조선업의 메카이자 세계 1위의 매출, 건조 능력을 자랑한다. 현대중공업 단지 안에는 2만6000명의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150개의 협력업체 직원 1만5000명을 포함, 모두 4만여명이 일하고 있다.

 “해운업의 호황으로 현재 향후 3년간 건조할 물량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주요 원자재인 철강 가격이 지나치게 빠르게 올라 선박 제조에 주로 쓰이는 후판 가격만 올해 들어 50% 상승했어요. 환율도 이미 대책을 세워 놓긴 했지만 원화 가치 상승이 지나치게 크면 부담이 됩니다.”

 한 해 동안 현대중공업이 만들 수 있는 선박 수는 유조선, 컨테이너선, LNG선 등을 합쳐 70척 정도. 1년 52주로 할 때 1주일이 채 안돼 배 한 척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선박 한 척 건조에 들어가는 부품은 4만개 안팎.

 선박 건조에 있어 생산성을 측정하는 단위는 ‘맨 아워’(man/hour, m/h)가 쓰인다. 풀이하자면 배 한 척 건조에 소요되는 인원과 시간이 핵심인 셈이다.

 “초대형선의 경우 현재 50만m/h 정도 됩니다. 33년 전, 처음 배를 만들 때는 700만 m/h이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인 셈이죠. 그렇지만 보다 나은 생산성 혁신을 위해 45만 m/h 정도로 줄이는 게 당면 목표입니다.”

 선박 제조 공정은 여느 제품의 생산 공정과는 다르게 자동화가 어렵다. 설계→절단과 가공→조립→건조→시운전으로 나뉘는 공정 대부분이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한 엔지니어와 숙련공의 노하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실내에서 작업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실외에서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선박 건조 현장을 가리켜 ‘탄광의 막장 다음으로 힘든 곳’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여름엔 땡볕에 가열된 철판 위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겨울엔 반대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얼음처럼 차가운 철판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체력과 안전, 복지가 생산성에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육상 건조 공법, 조선 역사에 한 획 그어

 기자가 찾은 날도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바다에서 세찬 바람까지 불어대고 있었다. 겨울엔 대부분 이런 날씨를 딛고 일을 한다고 했다. 이런 작업 환경을 보다 안전하고 쾌적하게 바꾸기 위해 악천후에도 작업이 가능한 '이동식 쉘터(shelter)' 등을 자체 개발하는가 하면, 한여름 무더위 속 작업이 가능한 에어컨 탑재 의류를 제공한다.

 도크에서 배를 만드는 조선 사업 부문을 지나 육상 건조가 이뤄지는 해양 사업 부문으로는 자동차로 약 15분이 걸린다. 300만평이라는 공장 규모가 말해 주듯 각 공정을 이동하기 위해 대부분의 작업자는 차량이나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자체 제한 속도가 있어 공장 안에서는 시속 30km를 준수해야 하고, 속도 감지기가 있어 적발되면 규제를 받는다.

 해양 구조물 현장은 ‘해양 야드’라 불린다. 해양 야드 한쪽에선 두 척의 선박이 건조중이었다. 지난 1월,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초 육상 건조 공법으로 탄생한 러시아 노보십사의 원유 운반선을 성공리에 바다에 띄운 바 있다. 현재 제작중인 선박은 두번째 것으로 2004년 7월부터 제작을 시작해 오는 4월20일 인도될 예정이라고 해양 부문 책임자 오병욱 전무는 말했다.

 “육상 건조의 관건은 만들어진 배를 바지선 위에 태우는 일입니다. 이를 로드 아웃이라고 하는데, 바지선 건조 경험이 축적되어서 가능해졌죠.”

 배의 제작은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후판을 각종 부문에 맞게 잘라 여러개의 작은 블록(선각이라고도 한다)을 만든다. 작은 블록들은 다시 배의 부문별로 조립돼 큰 블록으로, 이 블록들을 연결하면 배의 대강 모양이 완성된다. 외형이 완성되면 도크에 물을 채워 끌어낸 다음 ‘안벽’이라 불리는 부둣가에 배를 고정시킨 후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된다. 육상 건조의 핵심은 배를 만드는 웅덩이인 도크가 없이 맨 땅 위에서 배를 만드는 것이다. 관건은 지상에서 만들어진 배를 바다로 넣는 과정에서 변형이나 왜곡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땅 위에 있는 배가 바지선 위로 이동될 때 APS라는 부양 에어패드(질소 가스 사용)가 쓰인다. 140개의 에어패드에 실린 건조 선박은 바지선 위로 옮겨진다. 배를 실은 바지선은 잠수 바지선으로, 배를 싣고 바다로 나간 뒤에는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잠수 바지선이 가라앉은 다음 선박을 안벽으로 이동시켜 마무리 작업을 하는 공정은 다른 배를 만드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 오전무의 설명이다.

 “세계 조선 공정의 트렌드는 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 걸 값싸고 쉽게 다룰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플랜트의 경우 5만t까지는 바지선에 태운 경험이 있습니다. 선박의 경우 3만t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이론상으로는 아무리 무거워도 할 수 있지만 해보지 않고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지요.”

 육상 건조의 장점은 작업의 편의성이다. 평지에서 모든 공정이 이뤄지는 만큼 작업이 쉽다. 육상 건조 공정으로 만들어진 첫 배(‘NS 챌린저’로 명명)도 45일 이상의 공기(工期)를 단축할 수 있었다. 경험이 축적될수록 공기는 보다 더 단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육상 건조로 만들어질 경우, 소요 비용은 도크 건조보다 조금 더 든다. 그러나 공기 단축으로 이는 해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도전 “조선만큼은 어림없어”

 현대중공업의 2만6000명 직원 가운데 설계 엔지니어, 디자인 엔지니어는 2700명으로 10% 이상이 연구원이다. 현대중공업은 자체에 두개의 연구소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연구 개발에 핵심 역량을 쏟고 있다. 흔히 중공업은 기술 개발보다는 노동력 위주의 사업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선박 제작은 고도의 과학과 첨단 공법의 종합 결과물이다. 육상 건조 공법은 1000척의 배를 만든 경험과 연구 개발에 쏟은 열정의 최신 결과물인 셈이다.

 생산, 조립, 건조 능력에 있어 현대중공업은 명실상부한 세계 1위다. 자체 설계 능력의 경우도 발전을 거듭해 현재 중상위급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 이 회사의 설명이다.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각종 도면과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 전산화를 도입한 것이 비결이었다.

 최근 중국도 조선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측은 내심 ‘해볼 테면 해보라’는 자신감에 차 있다. 기술 축적, 지근거리에 위치한 협력사와의 협력 관계, 숙련 기술자 확보가 필수적인 조선산업의 특성상 한국의 경쟁력을 중국이 따라오려면 멀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측 방문자들이 조선소를 방문하면 차에서 둘러보게만 할 뿐 절대 핵심 공정은 보여주지 않는다”고 귀띔한다. 이유를 물으니 “한국에서 처음 조선소를 세우고 배를 만들 때, 한국의 기술자들이 일본 조선소에서 본 것을 눈으로 익혀 그것을 토대로 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중공업 조선 부문은 향후 3년 동안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2007년까지 201척의 선박을 수주받은 것. 그 중 육상 건조 방식으로 수주한 배는 모두 16척으로 2007년말까지 순차적으로 건조될 예정이다.

 한편 현대중공업의 선박 육상 건조 공법은 특허를 출원한 상태다. 자세한 공법은 국제 경쟁력 유지 차원에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한국의 조선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고, 현재도 40만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미래에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Plus Interview



 오병욱 해양사업본부 전무

 “육상 건조 공법으로 초일류 조선업체로 도약”



 현대중공업의 선박 및 해양 플랜트 설계 부문의 명장인 오병욱 전무(58)는 세계 최초로 무(無)도크 선박 육상 건조 공법을 세상에 내놓은 주인공이다. 선박 설계 엔지니어 출신인 오전무는 2년 전부터 선박 육상 건조를 담당하는 해양사업본부의 모든 책임을 맡고 있다.



 조선사업본부가 아닌 해양사업본부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게 이채로운데.

 현대중공업은 1998년 육상 조립 공법을 이용해 잠수식 시추선을 도크 없이 진수했다. 육상 건조 노하우는 도크 건조를 주로 하는 조선사업본부보다 해양 플랜트를 주로 제작, 생산하는 해양사업본부가 더 적합하기 때문에 해양사업본부에서 육상 건조를 맡고 있다.

 선박 육상 건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배는 도크, 즉 웅덩이에서 조립한 다음 물을 채워 넣는 것이 근대 조선 공법의 기본이었다. 소형 어선 같은 경우는 가능하지만 일정한 크기나 무게 이상의 배는 육상에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현대중공업이 그 상식을 세계 최초로 깬 것이다.

 육상 건조 기술의 핵심은.

 쉽게 말해 수만톤급의 배를 육상에서 만들어 바다에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는 것이다. 땅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 배의 모양이나 기능에 변형이 생겨서는 안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육상 건조 공법의 핵심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30년 동안 도크를 이용한 선박 제조는 물론, 육상에서도 다양한 해양 플랜트를 만들어 왔다. 이 해양 플랜트를 바지선을 이용해 바다에 진수하는 방법을 선박의 건조와 진수에 응용한 것이다. 조선사업본부가 아닌 해양사업본부에서 선박 건조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래에는 도크식 건조로 육상 건조가 대체되는가.

 세계 조선업계 현황을 보면 도크는 이미 포화 상태다. 과거 조선업계를 이끌었던 영국 등은 생산성 악화로 도크를 놀리고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더 이상 도크를 짓지 못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육상 도크는 이같은 제한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크를 이용한 선박 제조가 우선이고, 육상 건조는 넘쳐나는 수주 물량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 설계 측면에서 발전이 이뤄지면 상당량의 선박이 육상 건조로 제작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