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난처럼 고통스런 것은 없다. 특히 화가는 가난이 닥치면 자존심(명분)과 생계(현실)라는 갈림길에서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큰 고민을 한다. 모네와 모딜리아니의 경우를 보자.

가난했으나 예술을 인정받아 고통에서 벗어난 모네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가장 가난으로 고통을 받았던 화가가 클로드 모네(1840~1926)다. 중하층 계급에서 태어난 그는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로 파리 미술아카데미에 입학 한다. 그렇지만 아카데미 미술에 관심이 없었던 모네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화가들과 화실을 얻어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가끔씩 초상화나 작품을 의뢰받아 집세, 생활비, 모델료로 사용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작품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보헤미안적이었으나 모네는 다른 화가들과 달랐다. 모네는 돈 한 푼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포장했다. 레이스가 달린 고급 셔츠를 즐겨 입기 위해 화실을 같이 쓰는 동료 화가들보다 더 절약하곤 했다. 그는 남들에게 철저하게 부르주아처럼 보이고 싶었다.

모네는 출세의 지름길인 살롱전에서 주목받기를 원했다. 모네는 모든 화가들의 꿈인 인물화를 그렸다. 인물화는 의뢰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네의 인물화는 살롱전에서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모네는 천민 출신의 모델 동거녀인 카미유가 임신하자 돈이 필요했다. 그는 그림 주문을 받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다. 모네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카미유와 헤어지기 전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한다. 결국 그는 카미유와 헤어졌다고 속이고 시골로 내려가 그림에 전념한다. 빈곤과 절망의 나날 속에서도 모네는 카미유를 잊지 못했다. 모네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기로 마음을 먹고 파리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살롱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모네는 점점 빛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가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을 그릴수록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모네는 후원자는커녕 빚쟁이를 피해 그림을 그려야할 형편이었다.

“미래를 굳게 믿고 있긴 하지만 현재를 견디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모네는 빵과 고기를 사기 위해 부유한 친구들에게 구걸을 요청하는 편지를 수없이 보내야만 했다. 특히 수집가들이나 후원자를 찾아 작품을 헐값에 사가기를 애원했다.

굴욕의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모네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성공을 거머쥔 모네는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네는 말년까지 검소하게 생활했다.

클로드 모네는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하고 끝없이 노력하고 탐구했다. 평범한 자연에 영혼을 부여해 자연은 모네의 손에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어서 유명해진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의 생애(1884~1920)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가난의 고통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에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후손이다. 부모의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그가 태어날 때 가재도구에 차압이 붙을 정도로 집안은 궁핍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학식과 교양이 있는 어머니 덕분에 가난한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그림 하나만으로 인생을 꾸려가고 싶은 모딜리아니가 선택한 곳은 파리였다.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믿고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는 해박한 지식과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20세기 예술운동의 용광로였던 파리는 젊은 모딜리아니의 야망을 외면했다.

모딜리아니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야망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계속해 그림을 그렸다. 모딜리아니를 괴롭힌 것은 동시대 예술가들과 다른 자신의 표현 기법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인정받지 못하자 술과 마약으로 방황한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술과 마약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술값을 위해 간판까지 그렸다. 그럼에도 모딜리아니는 가난에 비굴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부르주아 기질을 가지고 있어 절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인생의 마지막 희망인 잔느를 만나면서 꺼져버린 삶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1917년 이후 삼 년도 안 되는 잔느와의 짧은 만남은 그에게 ‘생명의 예술’을 창조하게 했다. 

“짧더라도 강렬한 인생을 살고 싶다.”

모딜리아니를 가장 사랑했던 여인 잔느는 그가 죽은 다음날 만삭의 몸으로 자살한다.

모딜리아니는 무절제한 생활과는 다르게 그의 작업 태도는 매우 엄격했다. 비이성적인 감정과 다르게 그의 그림은 질서와 균형을 보여주고, 그만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조형언어가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