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학교에 다니던 1960~1970년대의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은 정말 무서웠다. 가게마다 호객꾼들이 비좁은 통로에 나와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낚아채곤 했다. 그렇게 일단 반강제로라도 끌려 들어가면 뭔가를 사야 했다. 아니면 주인과 으르렁대거나 나올 때 뒤통수에 대고 뱉어대는 욕설을 듣던지.
언감생심 반품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격은 고무줄 같아서 요즈음 중국에 가서 그래야 하듯이 엄청나게 깎지 않으면 십중팔구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상대로 값을 깎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매와 불친절, 바가지 가격! 이 땅의 예전 상인의 모습은 그처럼 고약했다.
그러다가 백화점이 나타나서 정찰제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점원들이 강매를 하지도 않고, 구경만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산 것은 군말 없이 바꾸어 주는 일도 시작했다. 새로운 방식의 판매 형태였고, 그것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바가지와 흥정과 불친절에 지친 사람들은 조금 비싸더라도 마음 편하게 대접받으며 쇼핑할 수 있는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친절하게 대해야 돈이 벌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기존의 장사꾼들도 점점 더 친절을 파는 방식으로 전환해 갔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형할인점들까지 생겨나서 소비자들을 친절하게 섬기기 시작했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과 다른 재래시장들은 불친절함과 불투명함에 대한 대가로 손님과 수입을 잃어갔다.
궁해야 통한다고 했던가. 불친절의 대명사이던 동대문도 살기 위해 변신을 시도했다. 밀리오레라는 파격적 이름의 시장이 동대문표 백화점이라는 이미지를 내걸고 돈 벌이에 성공했다. 두타와 프레야타운 같은 것들이 그 뒤를 따라 친절과 정직 장사를 시작했다. 남대문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불친절한 가게와 상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손님이 조금이라고 불평을 하면 무조건 “죄송합니다”부터 하고 보는 것이 오늘날 상인들의 모습이다.
예전의 고약한 상인이나 오늘날의 친절한 상인, 같은 DNA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친절하게 바꾼 것은 경쟁과 소비자들의 가혹한 선택이다. 바가지 씌우기는 잠시 동안은 가능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아예 바가지 씌울 상대방을 찾아볼 수조차 없어지는 것이 경쟁과 선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의 원리다.
우리는 보기 흉한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때가 너무 많다.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의 그 험한 모습도 자본주의의 얼굴이라고 말하곤 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들을 유인해서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것도 자본주의라 했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라는 말 앞에는 늘 ‘천민’이라는 단어가 앞서 다녔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한다. 각자에게 자유가 인정되지만, 그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다. 또 자본주의는 각자마다의 재산권을 존중한다.
길가는 행인을 낚아채서 물건을 강매하고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고개 마루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행인의 소지품을 털던 산적들의 소행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세, 정직한 이윤 추구, 당당하게 경쟁에 임하기, 이런 것들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언감생심 반품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격은 고무줄 같아서 요즈음 중국에 가서 그래야 하듯이 엄청나게 깎지 않으면 십중팔구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상대로 값을 깎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매와 불친절, 바가지 가격! 이 땅의 예전 상인의 모습은 그처럼 고약했다.
그러다가 백화점이 나타나서 정찰제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점원들이 강매를 하지도 않고, 구경만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산 것은 군말 없이 바꾸어 주는 일도 시작했다. 새로운 방식의 판매 형태였고, 그것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바가지와 흥정과 불친절에 지친 사람들은 조금 비싸더라도 마음 편하게 대접받으며 쇼핑할 수 있는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친절하게 대해야 돈이 벌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기존의 장사꾼들도 점점 더 친절을 파는 방식으로 전환해 갔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형할인점들까지 생겨나서 소비자들을 친절하게 섬기기 시작했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과 다른 재래시장들은 불친절함과 불투명함에 대한 대가로 손님과 수입을 잃어갔다.
궁해야 통한다고 했던가. 불친절의 대명사이던 동대문도 살기 위해 변신을 시도했다. 밀리오레라는 파격적 이름의 시장이 동대문표 백화점이라는 이미지를 내걸고 돈 벌이에 성공했다. 두타와 프레야타운 같은 것들이 그 뒤를 따라 친절과 정직 장사를 시작했다. 남대문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불친절한 가게와 상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손님이 조금이라고 불평을 하면 무조건 “죄송합니다”부터 하고 보는 것이 오늘날 상인들의 모습이다.
예전의 고약한 상인이나 오늘날의 친절한 상인, 같은 DNA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친절하게 바꾼 것은 경쟁과 소비자들의 가혹한 선택이다. 바가지 씌우기는 잠시 동안은 가능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아예 바가지 씌울 상대방을 찾아볼 수조차 없어지는 것이 경쟁과 선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의 원리다.
우리는 보기 흉한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때가 너무 많다.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의 그 험한 모습도 자본주의의 얼굴이라고 말하곤 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들을 유인해서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것도 자본주의라 했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라는 말 앞에는 늘 ‘천민’이라는 단어가 앞서 다녔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한다. 각자에게 자유가 인정되지만, 그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다. 또 자본주의는 각자마다의 재산권을 존중한다.
길가는 행인을 낚아채서 물건을 강매하고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고개 마루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행인의 소지품을 털던 산적들의 소행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세, 정직한 이윤 추구, 당당하게 경쟁에 임하기, 이런 것들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