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내향성인 사람과 외향성인 사람으로. 외향성인 사람은 정신적 에너지가 주로 바깥 세계로 열려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내향성인 사람은 정신적 에너지가 주로 내면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 부류다. 솟구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담아두는 부류와 모든 걸 겉으로 팍팍 드러내는 부류.”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고전 <주역>에서는 그걸 ‘음과 양’이라고 이른다. 융이 인간의 유형을 내향성과 외향성으로 나누게 된 것도 <주역>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년의 두 친구가 있다. 예민하고 내향적인 남자는 와인을 음미하듯이 인생을 음미하며 조용히 살고 싶어 한다.

그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소설을 쓴다. 소설은 편집자의 손 안에 머물러 있을 뿐 출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영혼은 메말라 가고 인생길은 변변찮다. 어머니 집에 들러 돈을 슬쩍할 정도로 가진 것도 없다. 게다가 이혼한 아내가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좌절감으로 어쩔 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담아 둔 채’ 좋아하는 와인에서 위안을 구한다.

그에겐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단짝 친구가 있다. 변변찮기는 친구도 마찬가지다. 직업은 텔레비전 스타지만(한때는 정말 반짝거리기도 한) 지금은 사람들이 얼굴도 잘 기억 못하는 신세다. 그래도 ‘모든 걸 겉으로 팍팍 드러내는 쪽’인 그에게 삶은 여전히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다. 그의 에너지는 온통 바깥세상으로만(그것도 주로 여자들에게) 향해 있다.

영화 <사이드 웨이>는 그 두 남자가 와인 농장을 찾아다니는 동안 벌어지는 얘기를 담고 있다. 극적인 반전이나 드라마는 없지만 영화는 내밀하게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극적인 게 있다면 두 남자의 성격뿐이다. 어쩌면 저리도 다를까 싶게 한쪽은 에너지가 안으로만 향하고 한쪽은 밖으로만 뻗친다. 그래서 좌충우돌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이 안쓰럽고도 경쾌하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격 유형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외향성인 타입은 정신적 에너지의 충족을 밖에서 구한다. 계속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그에겐 즐겁다. 행여 기분이 우울할라치면 재빨리 운동을 하든가 사람들을 만나 떠들썩하게 보낸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과 해결방법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반대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두려워해서 모든 내적 감정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훈련통해 부분적 극복 가능해

내향성인 타입은 에너지를 내면에서 찾는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인 반응이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책을 읽든가 음악을 듣든가 하면서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겉보기에 수줍음을 많이 타고 입이 무거우며 속으로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 대신 자신의 내향성을 존중하며 개인적인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 존중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외향적 에너지와 내향적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균형이 맞으려면 내향성과 외향성이 5대5의 비율이 돼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내향성이거나 외향성인 사람도 없다. 대개는 8대2나 7대3 정도의 비율로 외향성인 쪽에 가깝거나 내향성인 쪽에 가깝게 마련이다. 6대4 정도의 비율로 균형을 맞추는 사람도 있기는 하나 매우 드물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정신적 에너지의 균형을 취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다. 모자라는 부분을 반대쪽에서 채워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속에 내가 쳐놓은 바(bar)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 바란 “난 이런 타입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단정 짓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은 바를 내려놓았으면 그때부터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나치게 외향성이라고 느껴지면 에너지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리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내향성인 사람은 에너지의 충전을 밖에서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게 과연 가능한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일이나 되풀이해서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지게 되어 있다. 몸만 피트니스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도 다를 바 없다. 반복해서 훈련하고 애쓰면 마음의 피트니스도 가능하다.

겸손하지만 의지굳은 리더가 되야

특히 리더라면 정신적 에너지의 균형을 취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리더라는 자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섬세하고 부드럽고 내향적인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도 남 앞에 나서서 활발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 타입일수록 대개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전 조율을 원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조금만 움직여도 일이 매끄럽게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회의를 주재할 때도(지나치게 내향적인 타입은 그런 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려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조용히 듣기만 한다. 덕분에 아랫사람들로서는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반면에 외향적인 리더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확확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계획 단계에 있는 일이라도 활발하게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성취 욕구를 북돋우면서 결국 일을 성사시키는 예가 많다.

회의를 주재할 때도 대개 혼자서만 얘기를 이끌어 가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대체 무엇 하느라 창의적인 머리를 못 쓰느냐고 화를 내거나 자기가 앞서서 아이디어를 마구 내놓고는 그대로 하라고 다그칠 때도 있다. 그 결과 아랫사람은 때때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실패하기도 한다. 그럴 때도 물론 책임은 리더가 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극도로 내향적인 리더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서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고 무슨 은둔자처럼 지내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조직에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다.

반면에 지나치게 외향적인 리더는 자기중심적인 면이 강해서 무슨 일에나 자신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그런 성향이 지나치면 자칫 독불장군이 되기 쉽다. 덕분에 그 자신은 자주 매스컴에도 오르내리고 유명세를 타지만 회사나 조직이 그 유명세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되는지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결국 극도로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인 두 경우 모두 문제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접점을 찾는 길밖에 없다. 내향적인 타입은 외향적인 데서, 외향적인 타입은 내향적인 데서 내게 필요한 분량만큼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어렵기만 한 작업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백 퍼센트 내향성이거나 외향성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내향성인 사람도 무의식에는 외향성이 자리 잡고 있고 외향성인 사람 역시 그 무의식에 내향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내 속에 있는 그 두 가지 성향의 상호 보완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신적 에너지의 좌우 균형을 갖추는 일은 리더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짐 콜린스는 그의 책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가장 바람직한 리더의 모델로 ‘겸양과 의지’를 함께 지닌 리더를 꼽고 있다. 좋은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시킨 리더들을 연구한 결과 그들 모두 한결같이 ‘겸손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변변찮아 보이면서도 두려움이 없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정신적 에너지의 좌우 균형을 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겸양과 의지라는 전혀 다른 두 패턴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공했을 때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다른 사람들과 외부적인 요인 그리고 행운에 찬사를 돌렸다고 한다. 결과가 나쁠 때는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이나 외부적 요인, 불운 등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마음 경영에 성공한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