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가업을 물려받아 한 가지 제품만 100년 이상 생산하는 ‘한 우물 경영’의 고집스런 사람들이 있다. 독보적인 생활옹기 개발 기술로 유명한 전통예산옹기의 황씨가와, 명품 벼루로 불리는 한진공예사의 김씨가의 자손들이다.

전통예산옹기의 황충길 사장과 막내아들 진영씨

충남 예산군 오촌리. ‘전통예산옹기’라는 간판을 따라 들어가자 옹기 천지다. 마당 둘레에는 옹기가 담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붕이 옹기로 엮인 공방에 들어서니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과 머리띠로 긴 머리를 고정시킨 젊은이가 옹기를 만들고 있다. 전통예산옹기 황충길(66) 사장과 그의 막내아들 진영씨(35).

아무 것도 없던 물레 위에 흙을 몇 번 쌓아 올리고, 물레를 발로 돌리면서 모양 만들기를 10분쯤 했을까? 물결무늬가 새겨진 높이 50㎝짜리 항아리와 10cm짜리 항아리가 금세 완성됐다.

황 사장이 옹기를 빚은 지는 벌써 50년이 넘었다. 진영씨는 만드는 것마다 자를 댄 듯 똑 같다고 아버지 솜씨를 은근히 자랑한다. 황 사장은 머리와 눈, 손과 발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만든다고 한다.

“점토의 강도와 끈기, 가마의 온도는 세월이 지나면서 축적된 노하우죠. 그냥 만져보고,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어요.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 10배 이상의 공을 들인다는 자세로 옹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전통예산옹기는 150년간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황 사장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 옹기를 만들고 있으니 4대째다. 전통예산옹기는 1860년쯤 천주교 신자였던 황 사장의 할아버지인 황춘백 옹이 박해를 피해 충북 영동에 정착해 옹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출발했다.

황 사장은 17세 되던 1958년부터 옹기를 만들었다. 1961년 부친 황동월 옹이 옹기 굽는 가마 앞에서 쓰러진 이후 가업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후 좋은 흙을 찾아다니다 1975년 지금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 당시만 해도 옹기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가업으로 이을 생각조차 없었어요. 아들들이 옹기를 만들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래서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세 아들 모두 대전으로 유학을 보냈죠. 옹기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했어요. 행여 옆에서 보게 되면 따라할까 봐서였죠.”

황씨는 ‘옹기를 만들어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들들에게만 이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옹기를 만드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흙에다 물을 끼얹고 치대는 작업은 뼈 마디마디를 쑤시게 한다. 옹기를 팔아 돈을 만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옹기 만드는 건 저도 싫었어요.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그 당시만 해도 다른 기술을 배울 수가 없었죠. 어쩔 수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황씨는 중학교 진학시험에 합격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방 한 칸 얻을 돈만 있으면, 옹기 만드는 것은 때려치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옹기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가. 예산지역에만 옹기를 빚는 곳이 15군데를 넘었지만 1980년대 9군데로 줄었다. 지금은 전통예산옹기 한 곳만 옹기를 빚고 있다. 그만큼 옹기를 빚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반증이다.

처음에는 물려주지 않을 생각

전통예산옹기도 겨우 입에 풀칠하던 수준에서 웬만한 매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6년이다. 황 사장이 옹기 빚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가업으로 승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였다. 전통예산옹기가 만든 냉장고용 옹기 김칫독이 히트를 치고, 이것으로 제1회 농민의 날 행사에서 황 사장이 민속공예 부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 때문에 황 사장은 옹기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흙으로 만든 옹기가 친환경적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졌죠. 옹기는 그 자체로 숨을 쉬기 때문에 저장하는 음식물이 쉽게 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옹기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옹기 빚는 일이 어느 순간 천직이 된 거죠.”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던 둘째 아들 진씨와 막내 진영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옹기사업에 뛰어 든 것도 9년 전 이때부터였다. 진영씨가 먼저 가마터 생활을 시작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진영씨는 군대를 제대한 이후 혜전대학 도예과에 진학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도 했다. 진영씨는 공장에서 일하던 강현숙씨(30)와 결혼하면서 옹기와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1999년에는 삼성전자 수원공장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던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부름에 흔쾌히 내려왔다.

비가 군데군데 새고, 이를 막기 위해 한 뼘짜리 비닐을 덕지덕지 붙인 초라한 공장은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15명의 직원이 하루 평균 250개의 옹기를 만들고 있다. 전통예산옹기가 만들던 쌀독이나 간장독 등 단조로운 제품은 접시, 머그잔, 양념통, 그릇, 가마솥, 찻잔 등 100여 종으로 늘어났다.

매출도 예전에는 입에 풀칠하던 수준에서 백화점, 홈쇼핑, 온라인을 통해 제품이 팔려나가면서 지난해 1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일본으로 수출도 한다. 지난해에는 해외에 2억원어치를 팔았다.

요즘은 옹기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황 사장의 설명이다. 그래서 올해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 가마를 고쳐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주거환경의 변화와 기능성 유리, 플라스틱 용기 때문에 옹기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이 회사 제품이 끊임없이 팔리는 것은 전통 제조 기법을 통한 품질 때문이다. 경북 고령, 예산, 전북 정읍 등 전국에서 소문난 점토 5~6가지를 섞어 빚은 후 소나무, 참나무 등을 태운 재로 만든 유약을 발랐다.

“좋은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직접 가서 흙을 구하죠. 좋은 흙을 구하면 그 자리에서 차에 실어 보냅니다. 혹시라도 흙이 다른 데로 샐까봐 걱정돼 끝까지 확인을 합니다.”

황 사장의 꿈은 아들들의 아들들이, 또 그 이후로도 옹기 빚는 일이 가업으로 승계됐으면 하는 것이다. 일단 아들 대까지 이어졌으니 안심이다. 그는 전통예산옹기가 옹기의 맥을 잇는 집결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옛날 옹기를 빚는 모습을 재현한 옹기박물관을 건립하는 게 꿈입니다. 옹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자자손손 가업으로 승계되고, 박물관이 건립되면 자연히 이곳은 옹기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한진공예사의 김진한 사장과 외아들 성수씨

옛날 선비들이 가까이 두고 가장 아끼는 문방사우 중 벼루는 먹이 곱게 잘 갈려 먹물에 윤이 나고 잘 마르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중에서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충남 보령 남포벼루다. 지금도 보령에서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명품 벼루를 생산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남포벼루 만들기에 가업 3대 100년간을 이어온 한진공예사가 그곳이다.

충남 보령시를 지나 청라면 의평리. 길을 묻지 않아도 벼루 만드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길에서 가까운 농가에 검은 돌이 몇 트럭분이나 쌓여있다. 세 사람 정도가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공방에서 김진한(66) 사장은 조각도로 검은색 돌에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단단한 돌은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새가 되고, 매화가 된다.

“벼루의 명품으로 수백 년 이름을 떨쳐온 것이 바로 보령 ‘남포벼루’입니다. 최상석으로 만든 벼루는 먹을 갈아 뚜껑을 닫아두면 20일이 지나도 마르지 않아요. 또 돌이 단단해 1000년은 버틸 수 있어요. 먹을 갈았을 때 먹물 입자가 고와야 하고, 먹물에 윤기가 돌아야 하며 먹물이 쉬 마르지 않아야 좋은 벼루죠.” 그가 입김을 불자 벼루에 입김이 서린 자리가 선명하다.

벼루 만들기로 인간문화재와 명장이 된 김 사장은 조부인 김형수 옹과 선친인 김갑룡 옹을 이어 3대째 가업을 이어온 남포벼루의 대표적 장인이다. 그는 어릴 때 집안에서 어른들이 벼루 만드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5형제 중 둘째로 가업을 이었는데 벼루를 만들며 돌을 쪼개고, 연마하고, 새긴 지 어느덧 50여 년이 훌쩍 흘렀다. 그는 1996년 국내 최고 수준의 기능을 보유한 기능인에게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수여하는 석공예 부문 명장에 선정됐으며, 충남 무형문화재(6호)이기도 하다.

“어릴 때 아버지 몰래 작업실에서 벼룻돌을 파다 망가뜨려 꾸지람도 많이 들었죠.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제가 어깨 너머로 배우면서도 참 잘한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용기가 불끈 솟았어요.” 아버지께 손재주를 인정받은 그는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정식으로 벼루 기술을 전수받았다.

우리나라 벼루 생산의 2대 산지는 충남 보령과 충북 단양이다. 충북 단양은 겨우 명맥만 이어오고, 충남 보령 남포벼루가 전국 생산량의 80~90%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벼루를 만들어 온 주된 이유는 보령 성주산에서 나는 질 좋은 돌 때문이다. 성주산에서 나는 벼룻돌 중 제일 좋은 돌은 ‘백운상석(白雲上石)’으로 돌에 흰 구름 문양이 박혀있으며 돌끼리 부딪쳤을 때 경쾌한 쇳소리가 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현대식 설비가 없었고 공구마저 빈약해 질 좋은 원석을 찾아내도 운반하기조차 힘들었다. 또 자르기도 어려워 주변에 떨어져 나온 작은 돌을 찾아 등짐을 지고 가져오는 등 고행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성주산에서 돌을 구하면 20~30리 길을 등짐을 져 날랐어요. 처음에는 좋은 돌을 보면 욕심이 생겨 많이 짊어지죠.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거움이 더해져요. 하나씩 버리다 보면 결국 절반 밖에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가 만든 벼루는 실용적인 벼루도 있지만, 가보로 대물림할 수 있는 명품벼루를 오직 주문에 따라 수작업으로만 만들어 판매한다. 전문 서예가나 소장용으로 찾는 사람의 주문이 대부분이다. 짧게는 2~3일 만에 만들기도 하지만 두세 달이 걸리기도 한다. 만드는데 한 달 이상이 걸리는 명품 벼루는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주문은 항상 밀려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작업으로만 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지난해 매출은 1억5000만원가량.

벼루 제작은 그림과 조각이 함께하는 종합예술이다. 이중에서 벼루 뚜껑에 사군자, 용, 자연경물 등 밑그림을 그려 음각, 양각으로 새겨 넣는 정교한 조각 작업이 가장 어렵다. 예전에는 공구가 제대로 없어 예리하게 각을 내기가 어려웠고, 모래를 이용해 갈아서 망치와 징으로 쪼고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간신히 벼루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평평한 표면에 입체감 있는 문양을 새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인근 성주산에서 채취한 돌을 벼루 크기로 잘라 돌이 생긴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문양을 수작업으로 새깁니다. 하나하나 조각칼로 파내는 게 가장 어렵죠. 집중하지 않으면 다치기 일쑤입니다.” 진열장에 전시해 놓은 다양한 벼루를 보고 있자면 조각으로 새긴 매화가 막 피어나는 듯,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배우는 사람 없어 기술 단절될까 걱정

요즘 김 사장이 걱정하는 것은 혹시나 기술이 단절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벼루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조각이나 미술을 공부한 젊은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지만 단단한 돌을 조각하다 결국엔 2~3달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엔 보령지역에 벼루를 만드는 공방이 100여 군데나 있었는데, 지금은 10여 군데로 줄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벼루 제작 과정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전망이 없어 보이는 지 모두 중도 포기했다고 한다. 김 사장이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아들 성수씨(36)도 곁에서 배우고 있는데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명지대 산업대학원에서 전통공예를 공부한 성수씨는 한때 문화 관련 공무원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황씨는 가업은 이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벼루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 기술이 단절될까 걱정이다.

“돈을 벌지 못해 굶을 때도 오직 벼루를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고, 또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텨왔어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혼자서는 무리죠.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 벼루의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벼루 만들기에 50여 년을 종사하면서 큰 욕심 없이 낙천적으로 살아 온 것 같다며 소탈한 웃음을 보이는 그는 여생을 벼루의 맥을 잇기 위해 벼루박물관과 체험학습관을 건립하는 데 쏟을 계획이다.

이미 한진공예사의 벼루전시장 옆에는 체험학습관을 짓기 위한 부지가 조성돼 있었다. 올 6월이면 완공될 듯한 학습관에서 젊은이들에게 전통벼루의 맥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