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초 인도 라자스탄주(州)의 북쪽 끝 필라니. 뉴델리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4시간을 달려야 나오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글로벌 기업 박람회’가 열렸다.
섭씨 45도의 폭염을 뚫고 몰려든 이들은 구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MS), HP, 모토롤라 등 미국 초일류 기업들의 인사담당자들. 뿐만 아니다. 노키아, 지멘스, 인피니언 등 유럽 기업들과 삼성전자 관계자도 눈에 띄었다. 더 많은 기업들이 달려가고 싶었지만 허락을 받은 곳이 겨우 15개 기업 정도라고 했다.
산골 대학에 초일류 기업들 몰려와
누가 허락을 하고, 이들은 왜 여기로 왔을까? 바로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곳 비츠 필라니대학(BITS/PILLANI)의 취업 설명회 때문이다. 우리에겐 낯선 이 대학은 인도공과대학(IIT)와 자웅(雌雄)을 겨루는 인도 최고의 사립 공과대학.
우수 인재를 유혹하기 위해 회사 로고가 찍힌 티셔츠에다 50달러가 넘는 USB(휴대용메모리)칩까지 준비했던 기업들은 저마다 10명 안팎의 인재들을 스카우트 했다. 글로벌 인재 사냥꾼들의 목표물은 이곳만이 아니다. 인도 전역 7곳의 IIT에다 바라나시 힌두대학(IT/BHU) 등 최우수 대학 10여 개가 그들의 먹잇감이다.
글로벌 기업마다 인도에서 우수 인재를 뽑겠다고 난리지만 인도라고 가만있지 않는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벵갈루루에서 140㎞ 떨어진 인구 50만 명의 소(小)도시 마이소울(Mysore). 여기선 거꾸로 인도 최고 기업이 미국의 수재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다.
인도 IT 대표기업인 인포시스가 자랑하는 33만 평 규모의 세계 최대 규모 교육센터. 그 중 한 교육실엔 신입사원 교육이 한창인데 인도인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20대 초반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바로 미국의 MIT, 펜실베니아대학 등 명문 대학을 졸업한 수재 130명이다.
인포시스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고팔라크리쉬난 사장은 “세계화 된 기업은 세계의 인재들을 유혹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올해 말까지 미국 학생은 300명까지 늘리고, 영국 12개 대학과 일본 유수 대학들을 돌면서 인재를 채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11억 명의 인구 대국(大國) 인도에서 인재 쟁탈전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명문대를 나온 IT 전문가들은 물론 설계 전문가, 회계사 등 전문 직종과 생산직 사원들까지 그 범위가 무한대로 확산되고 있다.
몸값이 급속히 치솟는 것은 워낙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쓸만한 인재’의 품귀 현상이 벌어지는 것. 매년 100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인도 정부로선 때 아닌 기업들의 구인난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지난해 10월 중순 인도 중부의 오지(奧地)인 마디아프라데시주(州) 사가르의 고속도로 공사 현장. 델리에서 경비행기로 1시간 40분, 다시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야 나오는 곳이다. 뉴델리의 회계법인을 통해 소개받은 32살의 인도인 회계사는 오후 3시쯤 현장에 도착했다. 공사를 맡고 있던 쌍용건설 측은 “일단 쉬고 다음 날 만나자”고 호텔로 안내했다. 5성급 호텔은 아니지만 쌍용건설 김석준 회장이 와도 묵는 이 지역 최고 호텔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7시. 현장 관리 담당인 이충세 과장 집으로 인도인 회계사가 찾아왔다. 그는 대뜸 “델리로 돌아가겠다. 여긴 영화관도, 쇼핑몰도 없어 힘들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난 한국에서 와서도 버티지 않느냐”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에게 제시한 연봉은 50만루피(1100만원) 수준. 델리의 웬만한 회계사 급여 수준이지만 이미 인도의 쓸만한 인재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12명 안팎의 회계사가 필요한 쌍용은 지금도 6명으로 버티고 있다. 특히 재무제표를 작성할 수 있는 정식 공인회계사는 단 1명. 엄청난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해야 할 판이다.
임금상승률 연 40~50<%/FONT>
인건비 상승부터가 심각하다. 쌍용건설 사가르 현장의 토목엔지니어 지텐드라씨(36). 그의 월급은 4년 전만 해도 1만5000루피(33만원)였지만 지금은 4배가 오른 6만루피(132만원)다. 개발 시대로 본격 접어든 인도에선 각종 도로 건설 등이 활발해지며 토목기사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는 수준이다.
구인난을 겪는 쌍용 측은 현지 헤드헌터 업체와 계약을 맺고 회계사나 엔지니어를 구해주면 인건비의 5%만큼을 수수료로 주고 있다. 또 현지 신문에 구인광고까지 낸다. 신승희 상무는 “요즘은 이력서에 토목공학(civil engineering)만 적으면 무조건 팔려 나간다”고 말했다. 쌍용 측이 예측한 인건비가 벌써 2배나 올랐다. 올 들어 삼성엔지니어링 등 외국계 엔지니어링 기업 5~6곳에서 한꺼번에 2000여 명의 기술자를 뽑아 공학 관련 엔지니어들의 몸값은 더욱 뛰고 있다.
뭄바이 증시에 상장된 기업 1900개를 대상으로 한 임금 조사에선, 지난해 상반기(2006.4~9) 임금상승률이 22%였다. 특히 산매 분야는 무려 100%가 올랐고, 소프트웨어 서비스 산업은 54%, 민간은행 48% 등이었다.
생산직도 마찬가지다. 서부 도시 푸네의 경우 LG전자가 1400여 명, 월풀과 하이얼이 400여 명, 내쇼날 마쓰시다(최근 비데오콘에 인수)가 2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폴크스바겐이 2009년까지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몸값을 최소 20%는 올려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남부의 IT도시 벵갈룰루 역시 인사고과 시즌을 맞아 술렁인다. 삼성전자 인도연구소 김규출 상무는 “평균 15% 인상이지만 우수 인재는 30% 이상 올려줘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쓸만한 인재가 귀하다 보니 업체간 빼앗기 경쟁까지 불붙은 양상이다.
올 초 문을 연 휴대폰 세계 1위 생산업체인 노키아의 인도 첸나이(남부 도시) 공장. 삼성전자, LG전자, 모토롤라 등 경쟁사를 따돌리려는 노키아의 야심이 담긴 곳이다. 바로 이 공장의 공장장은 사친 석세나. 그는 불과 8개월 전만 해도 LG전자의 푸네(서부 도시) 공장장이었다.
LG전자 인도법인 신문범 부사장은 “직원들 복지 차원에서 가족 동반 나들이에다 생일 챙겨주기 등을 해보지만 결국 인도인들은 돈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인도 진출 기업들 사이엔 비상이 걸릴 정도다. 지난해 10월 인도 최대 명절인 ‘디 왈리’를 앞두고 현대자동차 첸나이 공장은 3500여 명의 생산직 직원 모두에게 4만500루피(90여만원)의 보너스를 일괄 지급했다. 인도 중견 기업의 1년 치 급여다. 현지에선 첸나이 일대로 몰려드는 노키아, 모토롤라, 삼성전자 등을 의식한 ‘투자’라고 해석했다.
인구 대국에서도 이제 사람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재 쟁탈전도 점점 가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