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술가 겸 철학자인 헨리 데이빗 쏘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인간의 모든 비극은 말로 인한 오해가 아니라 침묵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온다”고 했다.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말’에 비해 온몸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침묵(silence)’은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의사를 전달한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침묵이라는 무언의 언어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그의 우상인 유명한 영국 작가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과 나눈 침묵의 대화는 유명하다. 랄프가 유럽 여행 중에 영국을 방문해 카알라일과의 만남을 가졌는데 몇 시간의 만남 가운데 그들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심정을 이해하고 서로의 우정을 나누고 축복하며 헤어졌다는 일화다.
침묵의 심오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원전 500년대에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연꽃과 미소만으로 깨달음-이심전심(以心傳心) 또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을 주고받은 석가와 제자 가섭의 침묵의 대화는 침묵이 단순히 희로애락의 표현뿐만 아니라 진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위대한 의사소통 수단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침묵의 위대함도 나라와 문화에 따라서 180도로 달리 해석된다. 지구의 한편에선 진리까지 통할 수 있는 침묵의 고귀한 가치가 다른 한편에선 인간관계에서 ‘똥(銅)’만도 못한 가치로 평가절하 되는 것이다. 유럽 지중해권의 나라들을 포함해 한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중남미 사람들은 대화 시 3초 이상 침묵하면 정상이 아닌 것으로 취급 받는다.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지도 전에 치고 들어오는 것을 대화의 활력과 관심의 정도로 간주하는 이들은 상대방과의 대화 도중 끼어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뿐더러 도리어 끼어들어야 대화에 성실히 임하는 셈이 된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잠자코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의 억양이 마치 노래하는 것 같은 것은 이들 나라 말의 속도와 중첩 정도가 타 문화권에 비해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위 사례에서 로베르토는 한국의 유교적 관점에서는 무례했으나 말로 살고 말로 죽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대화자에 불과했다.
말하다 보면 정신 쏙 빠지는 중남미와 멕시코를 거쳐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로 올라오면 그 정도가 약화된다. 이 두 나라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유럽계 앵글로색슨족들은 중남미의 ‘반 침묵적인 정서’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들 역시 표현 중심의 문화를 갖고 있어 대화 시 화제가 끊기거나 침묵이 흐르면 불안해한다. 상대방의 침묵에 대해 직접적으로 면박을 주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침묵에 대해 이해심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이들에게 침묵은 결국 상호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가 되며, 심지어 침묵을 ‘대화에 기여하지(contribute) 않는 부정적인 태도’로까지 곡해한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학생들 본연의 ‘수줍음(shyness)’과 ‘창피(shame)’가 침묵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에 대한 학교 측의 평가는 굳이 학점으로 매기자면 ‘D’ 정도다. 표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배려를 이들 나라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문화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대화건 상대방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말을 이어 대화의 간격을 줄여주거나 혹은 어느 자리건 자신의 존재를 손을 들어 말로 표현하고 확인해 주어야 한다.
반면 한국, 일본, 중국을 위시한 동양인에게 ‘침묵’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권위의 상징으로까지 발전된다. 이들은 대화 시 ‘함께 있다(being)’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기에 할 말이 없으면 굳이 말을 하지 않으며 또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답답해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다.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배우자의 청혼(請婚)에 대한 응낙의 표현조차 말 없는 침묵으로 ‘Yes’를 대신하는 게 이들 나라다. 말로 다 하는 라틴과 말이 법 되는 북미에서는 어림도 없는 경우다.
동양에서는 도리어 말 많이 하는 사람을 불신하며 상대방의 말을 끊고 이야기하면 버릇이 없거나 상스럽다고까지 말한다. 특히 연장자와의 대화에서 연하자가 침묵의 간격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급함과 무례함의 상징이다. 반대로 연장자나 조직의 보스는 말을 아끼는 것이 권위의 상징으로 돼 있다. 이들은 직접적인 언어표현보다는 침묵의 언어로 의사전달을 한다.
침묵에 대한 이러한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인식은 비즈니스 상담 자리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침묵은 이들 협상의 주요한 전략으로까지 이어진다. 상대방이 강경하면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상대방을 교란시켜 부분적인 승낙을 얻어낸다는 ‘승낙쟁취(承諾爭取)’의 중국 고사(故事)가 그 단적인 예다.
이런 동양인들의 침묵의 경지에 버금가는 족속이 있다. ‘말 많은 새는 집을 짓지 못한다(A talkative bird will not build a nest)’고 믿는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다. 이들은 침묵을 위대한 사람(great man)의 표징으로 삼는다. 이들은 그 사람의 성격과 자기 조절 능력 그리고 용기와 인내 그리고 위엄이 침묵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침묵의 능력을 아는 사람만이 추장의 자격을 갖는다. 말없이 통솔하고 말없이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느긋한 모습은 단 1분도 말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리고 단 1분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초스피드의 21세기에는 상상도 못할 먼 옛날의 신화로 묻혀있다.
REMY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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