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기업 주변에서 가장 쉽게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카니발’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의 카니발리제이션(Carnivalization)이라는 단어를 우리 식으로 간단하게 줄여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브라질의 카니발(사육제)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은데 우리말로는 제살 파먹기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영학적인 의미는 이미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확보한 기업이 이를 대체하는 상품을 내놓는 바람에 오히려 기존 시장의 점유율이 하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최근에 우리나라 기업에서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기업이 성취해 놓은 것이 있고, 산업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들어갔음을 뜻합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 과감하게 진출을 하자니 시장에서의 성공을 확신하기 힘들고, 게다가 기존 제품의 급속한 시장 점유율 상실까지 예상이 되기 때문에 주춤주춤하는 것입니다. 결국 과감한 투자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지요.

카니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업들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기업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국내의 이동통신 업체의 사례도 이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통신 업계와 관련이 있는 한 전문가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이동통신 업체의 싸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지국을 설치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 SKT는 전파의 도달이 잘되는 주파수 대역을 받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약 1000개의 기지국만 설치하면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KTF의 경우는 할당 받은 주파수 자체의 특성 때문에 5000개 정도의 기지국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세대 이동통신(HSDPA가 중심이 된)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3세대의 경우 2세대 통신과는 주파수 대역이 다른 관계로 상황이 역전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3세대 서비스를 하면서 KTF의 경우 기지국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 반면 SKT의 경우 신규 투자 등에 따른 비용 등으로 인해 내심 좀 더 2세대 통신에 머물러 있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최근 3세대 서비스에서는 KTF가 ‘쇼(Show)’라는 브랜드를 들고 나와 공세를 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세대에서 2위였기 때문에 3세대에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카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런 카니발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케이스도 있습니다. 신세계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세계는 과거 롯데백화점과 치열하게 백화점 시장에서 경쟁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들의 백화점 시장의 매출을 갉아먹을지도 모를 이마트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지내놓고 보면 신세계 백화점의 매출을 크게 갉아먹지 않았다고도 판단할 수 있었겠지만 이마트 진출을 위한 결정을 내리고 그 부문에 자본을 집중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에는 카니발에 대한 공포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혁신가의 함정> 등 경영학의 명저를 쓴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슨 교수는 기존 기업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고객에게만 집중을 하고, 이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결국은 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핀란드의 세계적인 통신기기 기업인 노키아를 예로 들었습니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분야에서 사진기 기능을 부가하고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 고가의 휴대전화를 만들어 나갈 때 노키아는 그간의 고가 휴대전화 외에 저가 휴대전화 공급에 주력을 했다고 합니다. 저가 휴대전화 시장의 진입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인 노키아는 휴대전화 시장에서의 트렌드를 고성능에서 디자인 중심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대열에는 모토롤라도 함께 했지요. 이러는 와중에 삼성 휴대전화의 시장 점유율은 노키아 등에 비해 약세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중앙연산장치) 업체인 인텔도 이와 같은 카니발에 대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286을 386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레드 엑스(Red X)’ 캠페인입니다.

1980년대 말 286은 획기적인 제품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크게 히트를 합니다. 인텔로서는 286이 주력 수익원인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386이 나와도 사람들이 별로 사용을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386 기능이 필요한 컴퓨터는 전문가들이나 사용하지, 일반인들은 286으로도 문서 작성이나 간단한 계산은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인텔은 286이라는 글씨 위에 빨간색으로 엑스(X) 표를 한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합니다. 286을 스스로 부정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주 수익원인 제품을 공격함으로써 전문가용으로 여겨지던 386을 대중화하는 데 인텔은 성공합니다.

또 다른 사례는 셀러론 CPU를 만든 것입니다. 셀러론 CPU는 인텔의 펜티엄칩이 점점 고급 사양화하면서 AMD 등 비교적 저렴한 CPU를 만드는 회사들이 펜티엄칩이 고가라는 약점을 공략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내 놓은 제품입니다. 셀러론은 나름대로 선전을 해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지배력이 무너지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와는 달리 인텔은 공세적으로 카니발을 두려워하지 않고 셀러론이라는 제품을 내놓음으로써 나름대로 시장을 지키는 데 성공을 한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의 주 수익원을 부정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어려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변신에 실패하면 항상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나 기업이 차지하게 됩니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이유도 바로 카니발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카니발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의 시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의 단호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카니발은 조직 내부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EO의 용단과 자기 확신, 그리고 한번 결정하면 되돌아보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 기업도 한국 경제도 카니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