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eye)만큼 우리의 의사(意思)를 확실하고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의사소통 수단은 없다. 눈을 회피하고, 눈을 아래로 깔고, 눈을 치켜뜨고, 눈동자를 굴리고, 눈을 곁눈질하고,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추파를 던지고, 눈을 깜박거리고,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 등, 눈은 말 이상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눈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만큼이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선 접촉(eye contact)’은 문화마다 나라마다 그 빈도와 길이 그리고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눈을 ‘영혼의 창(The window of soul)’이라고 생각하는 중동과 남미 그리고 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과 같은 나라에서는 매우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존 그라함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아시아의 일본인이 10분의 대화시간 중 1분 3초, 북미의 미국인이 3분 3초 동안 상대방의 눈을 응시한 반면 브라질인(이탈리아, 프랑스도 같은 수준)은 가장 긴 5분 2초 동안 상대방의 눈을 쳐다봤다. 10분의 대화 시간 중 5분 이상을 상대방을 쳐다보는 데 할애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상대방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응시했다는 이야기이다. 시선 접촉에 익숙한 미국 여성조차 이들 나라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 접촉을 기분 나빠하거나 불편해 하곤 한다. 

시선 접촉에 관한 한 남녀간에도 차이가 있다. 마크 힉슨과 단 스탁스(Mark Hickson & Dan Stacks)의 연구에 의하면 여성들은 남자보다 시선 접촉을 더 많이 한다고 한다. 또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같은 여성들을 더 많이 보며(남자는 반대) 여자들끼리의 시선 접촉 시간이 남자들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남미에서와 같이 시선 접촉이 집요한 문화권과는 달리 미국이나 캐나다 그리고 북유럽의 나라들은 쳐다보는 횟수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긴 하나 여전히 ‘시선 접촉은 곧 신뢰나 관심의 표시’라는 등식이 일반화 되어 있다. 시선 접촉이 이들 나라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런 서구나 북미주에 비해 동양의 유교적인 관점에서 눈을 마주보는 것은 동등함을 수반한 ‘무례(無禮)’나 ‘도전’의 의미로 간주된다. 유교권에서 전 사회적으로 보편화 되어 있는 시선 처리의 위계는 조폭의 세계에서 절정에 이른다. 위계와 복종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조폭의 세계에서 보스와 졸개의 차이는 눈을 누가 똑바로 쳐다보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이들 사이에선 눈 한번 마주본다고 칼부림이 나서 사람이 죽곤 한다. 이런 유교권에서 제 명에 죽으려면 사람을 볼 때 때로는 흘긋흘긋 쳐다보는 눈치를 생활화해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어려서부터 눈을 쳐다봐선 안 되고 단지 상대방의 목젖만 보라고 가르친다. ‘듣는 입장이 됐을 때는 시선을 딴 데 두거나 아니면 눈을 감아 듣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상대방의 말에 동의함을 나타내라.’ 말하는 화자 역시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쳐다봐선 안 된다. 단, 상사가 부하직원을 나무랄 때는 예외다. 이런 시선 접촉의 문화는 ‘누가 누구를 쳐다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오래 쳐다볼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런 규율을 위반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 등 상대방을 쳐다보는 데에도 엄격한 규율을 따졌던 사무라이 시절에서부터 유래됐다.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이 유교권에 있는 아시아 외에 중미 및 아프리카 사람들도 존경의 표시로 시선 접촉을 회피한다. 흑인들 특히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러한 관습을 따르고 있다. 미국 센츄럴 미주리주 대학의 대학원생인 사무엘 에보이언은 그의 석사논문에서 시선 접촉의 차이가 백인 미식축구 코치가 팀에 새로 합류한 흑인 선수들을 지도할 때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밝혔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백인은 대개 말할 때 상대방을 간간이 쳐다보기만 할 뿐 뚫어져라 응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듣는 입장으로 바뀌면 상대방의 눈만을 주시한다. 그들은 상대방이 말할 때 눈길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을 무례하다고 평가한다. 반면 흑인들은 말을 할 때 상대방의 눈을 계속 쳐다보며 들을 때는 반대로 눈길을 회피한다.

호피족(Hopi)을 포함한 북 아메리카 인디안들 역시 시선 접촉을 공격적인 행동으로 간주한다. 대표적으로 나바조 인디안(Navajos)들은 시선 접촉을 그들의 창조신화와 연결시킨다. 눈으로 사람을 죽이는 괴물(A terrible monster called He-Who-Kills-With-His Eyes)에 대한 이야기인 그 신화는 ‘뚫어져라 보는 것(stare)’은 곧 사악한 눈짓(evil eye)이며 상대방을 성적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런 시선 회피의 위대함을 자신의 비즈니스에 가장 잘 적용시킨 인물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고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의장이다. 날씨에 상관없이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 그는 상대방과의 시선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상대방의 ‘눈빛 회피 문화’를 존중하기 위한 단순한 매너로써가 아니라 자신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눈동자를 노출시키지 않음으로 자신의 심중을 못 읽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의 출중한 교섭력은 상대방은 볼 수 없는 선글라스 뒤의 눈(eyes) 속에서 시작됐다.

‘뭘 봐?=죽음!’으로 비화되는 극단적인 시선 충돌의 사건은 이제 한국을 비롯한 지구촌 몇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Eye contact’의 정형인 미국에서조차 그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미친개가 집요하게 쫓는 것처럼 시선을 한군데 집중한다’고 해서 ‘매드 도깅(mad dogging)’이란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로 시선 접촉으로 인한 학내 폭력사건이 들끓는다. 미국 L. A.에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 입구의 포스터에는 스튜디오 안에서의 행동 요령에 대해 적혀 있는데, 그 중 두 번째 원칙에 ‘불필요한 시선으로 상대방의 분노를 사지 말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시선 접촉은 이제 문화의 벽을 넘어 마찰과 폭력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문화가 변하듯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는 눈을 보고 이야기하라’고만 주장하기에 지금의 세계는 너무 다원화 되어 가고 유동적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안전을 우선시해서 ‘무조건 눈을 회피하라’고 방어적으로 말하기에 지금의 세계는 시초를 다룰 정도로 급박하고 경쟁적이다. 이런 문화의 가속화·복합화 시대에는 한 가지만 고집할 게 아니라 때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시시각각 자신의 처세를 조절하는 유연성과 적응력만이 유일한 문화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