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화폐 시장을 선점하라”
일본 유통업계와 철도 업계, 전자화폐 전문 회사들 사이에 전자화폐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그동안 소니와 전일본공수(ANA) 등이 만든 에디(Edy)와 일본의 대표적 철도회사인 JR히가시니혼(東日本)의 스이카(SUICA)로 대표되던 일본 전자화폐 시장에 올 들어 버스. 사철(私鐵) 계열의 파스모(PASMO), 편의점 세븐아이 계열의 나나코(nanaco), 대형 슈퍼마켓 이온의 와온(Waon) 등 3개 전자화폐가 뛰어들며 사활을 건 시장 확보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전자화폐 업계가 사상 유례 없는 전면전에 돌입한 올해를 ‘전자화폐 원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전자화폐 업계가 느닷없이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일본 전자화폐 시장의 규모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대표적 경제연구소인 노무라(野村)종합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전자화폐 시장 동향 보고서를 보자.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전자화폐 시장 규모는 1800억엔이었다. 이 가운데 에디가 1000억엔을 스이카가 500억엔을 차지했다. 두 회사가 양분한 셈이다. 그런데 올해 시장 규모는 6900억엔으로 급팽창할 것으로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전망했다.
더 나아가 연구소 측은 2011년에는 시장 규모가 무려 2조8000억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일각에서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금융 정책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현금과 예금으로 구성되는 통화량에 이들 사용액이 집계되지 않아 실제 시장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화폐는 통화량 자료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한국에서는 신용카드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전자화폐 시장이 왜 일본에서는 이렇게 급팽창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결제 문화의 차이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몇 개의 신용카드를 소유하고 있는 데다, 신용카드를 이용한 결제가 일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현금 결제를 선호한다. 소형 슈퍼마켓에서까지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이 구축된 한국과 달리 일본의 경우 대형 슈퍼마켓이나 음식점 가운데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후불 결제나 외상 거래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신용카드 사용 비율이 한국인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대신 일본인들의 선불카드 사용은 확산되는 추세다. 앞서 예를 든 대표적인 전자화폐들은 모두 선불카드 방식이다. 지하철과 버스는 물론 편의점, 쇼핑센터에서도 이들 전자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본인이 가진 한도 내에서 소비를 하려는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에 들어맞는 결제 방식이란 게 시장 관계자들의 얘기다.
전자화폐 발행 회사 입장에서도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가 절실하다. 대형 유통업체에서 전자화폐 시장에 앞 다퉈 뛰어든 것은 고객 확보 차원에서다. 경쟁 회사가 발행한 전자화폐에 고객을 빼앗기게 될 경우 이는 자사의 매출 감소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형 슈퍼마켓인 이온과 편의점 체인인 로손이 4월 출범한 이온의 전자화폐 '와온'을 양측 점포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들 두 회사가 와온을 공동
사용하기로 합의한 것은 소매 업계 최대 경쟁 업체인 세븐아이가 같은 달 ‘나나코’를 출범시킨 데 대한 대응 차원이다. 편의점 이용 고객들이 나나코를 구입하게 되면 이들은 계속해서 나나코 사용이 가능한 세븐아이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나코는 100엔을 사용하면 1포인트를 부여하고 있다. 1포인트는 세븐아이에서 1엔에 해당하는 만큼 이들 포인트를 갖게 된 고객은 포인트를 쌓아서 다른 물건을 사기 위해 다시 세븐아이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제 각 전자화폐 회사의 현황과 전략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지난 4월23일 서비스를 개시한 나나코 측은 철도계 회사들에 비해서는 후발 주자이면서도 ‘소매 업계 최강 카드’라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 첫날 카드 신규 등록 수가 10만 건이 넘었다는 것이 세븐아이 측 설명이다. 회사 측은 우선 도쿄도 내 세븐아이 편의점 1500여 점포를 시작으로 5월중에는 전국 1만1700여 점포에 결제 시스템 구축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또 올 가을께는 이토요카드 가맹점(1800개)과 데니스 점포(800개)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의 대표적 신용카드 업체인 JCB의 가맹점도 적극 유치해 2009년 2월까지 전국 6만2000개 이상의 가맹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나나코의 출범에 서둘러 발족한 와온카드도 이온의 점포인 자스코 등 100개의 점포에서 시작, 2008년 4월까지 2만3000개 점포를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와온은 100엔당 1포인트를 제공하는 나나코에 비해 포인트 면에서는 열세를 인정하고 있다. 대신 와온은 매월 10일을 와온데이로 정해 할인 행사 등을 펼치기로 했다. 7월까지는 매월 10일 와온을 사용해 결제할 경우 5%씩 할인해 주기로 했다. 슈퍼마켓을 주로 이용하는 주부층을 잡기 위한 전략이다.
이들 유통계 전자화폐 회사들은 카드 고객 정보도 편의점, 슈퍼마켓 운영 전략에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나나코는 입회 신청 시에 이름과 연령, 성별, 직업 등의 개인정보를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연령과 성별, 직업별, 지역별 전자화폐 사용 경향을 분석해 상품 기획 등 매장 운영 전략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와온은 개인정보 등록은 하지 않고 있지만 카드 관리번호를 통해 구매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유통계 전자화폐에 앞서 출범한 원조격인 JR의 스이카와 사철 버스의 파스모는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 카드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점으로 활용하며 역이나 주변 점포와의 제휴를 가속화해 이용자 수를 확충한다는 전략이다. 이들은 지난 3월 시작된 스이카, 파스모 공동 이용, 즉 한 장의 카드로 운영 회사가 다른 여러 지하철 노선은 물론 버스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가입자가 급증한 데 고무되어 있다. 그동안 일본은 한국과 달리 같은 지역, 예를 들어 도쿄 시내라도 운영 주체가 다른 지하철이나 전철 노선, 버스를 갈아탈 경우 따로 승차권을 끊어야 해서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어 왔다.
현금 결제 선호하는 일본인이라 시장 ‘폭발’
특히 스이카 측은 JR 계열의 편의점과 전자 양판점 빅쿠카메라 등 역 주변에 점포가 많은 업체들과의 제휴를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6월부터는 가맹점에서의 쇼핑 금액에 대한 포인트도 제공하면서 유통계 카드의 추격에 정면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발행 카드 수는 2000만 장이고 가맹점 수는 1만1400개에 달한다.
파스모를 발행하고 있는 사철과 버스 회사들도 신용카드 회사들과의 전자화폐 제휴카드 발급, 대형 백화점과의 포인트 상호 이용 등을 통한 역 주변 상권을 파고드는데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파스모는 당초 전망보다 가입자가 많아지면서 전자화폐 탑재 카드 제조 회사에 카드를 추가 발주하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즐거워하고 있다. 발행 한 달 만인 3월말 현재 1000만 장이 팔려나갔다. 가맹 점포는 3800개지만 스이카 가맹점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각 회사가 이처럼 공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하자 2001년 11월 일본 내 전자화폐 시대를 연 에디카드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선행 주자인 관계로 편의점이나 전문점 등 각 업종에 걸쳐 5만여 가맹점을 갖고 있고 전자화폐 발행 매수도 2900만 장으로 스이카를 능가한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 다만 후발 주자들의 공격이 워낙 거센 만큼 현재 시행중인 ANA 마일리지 제공과 자동판매기 구매액 할인 등에 더해 포인트제 확대 등의 대응 전략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 급팽창하고 있는 전자화폐의 문제점은 없을까. 현재까지 전자화폐와 관련된 피해가 문제가 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금융계 등에서는 경쟁 격화에 따른 업계 파산시의 소비자 보호 대책과 전자화폐가 송금 및 환금 업무까지 가능한 현실적인 점을 감안해 이들 업체에게도 이들 업무를 허용하는 등의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정부 측의 대응이 주목된다.
용어 해설
전자화폐 : 집적회로(IC)칩을 탑재한 카드나 휴대전화로서 인식기에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결제가 이뤄진다. 사전에 입금(충전)이 필요한 선불 방식과 후불 방식으로 나뉜다. 일본에서는 선불 방식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