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말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발표한 ‘2007년 1분기 동향’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등록된 벤처 투자사는 99개로 집계되었다. 이는 2000년 147개, 2001년 145개, 2002년 128개, 2003년 117개보다 대폭 줄어든 수치다.
“지난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의 벤처 투자사의 폭증은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제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죠. 전체적인 숫자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각 회사의 자산 건전성도 좋아지고 전체적으로 대형화하는 추세임엔 분명합니다.”
김형수 벤처캐피탈협회 이사는 국내에 등록된 벤처캐피탈의 수가 감소세를 보이는 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투자사들의 수가 대폭 줄었음에도 신규 투자 금액은 2002년 6177억원에서 2006년 7333억원으로 완만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 동안 메디슨, 로커스, 새롬기술 등 1세대 스타 벤처기업들이 줄줄이 실패, 벤처 업계가 위기에 빠지면서 벤처캐피탈 업계도 동반 침체의 늪에 빠졌다. 하지만 국내 벤처 업계는 1세대 벤처기업들의 몰락으로 시장 여건의 악화에도 지난해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벤처기업이 80여 개에 달하고 벤처 업계 총 수출액도 100억달러를 넘어서는 등 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는 벤처 업계의 침체 속에서도 ‘물주’인 벤처캐피탙 업계의 지속적인 혁신과 변화가 이뤄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벤처캐피탈들은 그동안 투자 분야였던 IT 분야에서 벗어나 투자 대상 다각화를 이루면서 투자 활성화에 불을 댕기고 있다.
일례로 LG벤처투자는 지난해부터 조선 기자재, 대체 에너지 등 비 IT 산업군에 대한 투자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선박 크레인 구조물 제조업체인 디엠씨나 태양발전모듈제조업체인 에스에너지 등에 잇달아 투자한 것이 이 같은 맥락에서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이후 줄곧 50%를 넘나들던 벤처캐피탈들의 IT 업종에 대한 투자 비율이 29.4%로 30%를 밑돌며 사상 처음으로 일반제조업(34.1%)과 역전되었다.
김형수 이사는 “휴대전화, LCD 위주의 IT 산업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새 성장 동력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분위기가 있다”며 “향후 수년간 안정적인 수익과 성장이 기대되는 조선, 석유화학, 플랜트, 제조업 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단지 기술력 하나만 보고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는 건 엔젤 투자자들이 할 일”이라며 “자금 회수의 가능성과 적절한 수익률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벤처 투자의 건전성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더불어 정부나 은행, 연기금 등의 출자도 벤처캐피탈 업계의 자산 건전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정부가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활성화를 위해 1조원 규모로 2009년까지 출연하기로 한 ‘모태펀드’를 시작으로, 올해부터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벤처캐피탈에 대한 출자를 재개했다. 지난 2005년에 이어 벤처캐피탈에 출자를 재개한 국민연금은 올해 초 한국투자파트너스에 400억원, 한미창투, 네오플럭스, KB창투, LG벤처투자, MVP창투에 각각 200억원을 내줬다. 또 산업은행은 한국투자파트너스에 60억원, 한미창투에 30억원을 출자하기도 했다.
해외 투자, CRC 겸업으로 수익률 상승
한 차례 혼란을 겪으면서 투자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고 전문성을 갖춘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늘면서 ‘옥석을 가리는 눈’이 높아진 것도 업계의 큰 변화 중 하나다. 악덕 기업들이 투자 자금만 챙기고 마는 이른바 ‘먹튀’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또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10%가량으로 소수를 차지하던 이공계 출신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이제 절반가량으로 크게 늘었다.
이들 능력 있는 전문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은 앞으로 더 힘을 얻을 전망이다. 중소기업청은 ‘벤처캐피탈 선진화 방안’을 통해 300억원 이상의 창투조합을 결성하는 경우 업무 집행 조합원인 LLC(유한책임회사)를 창업투자회사(창투사)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주주들로 구성된 창투사 중심이 아닌, 전문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의 펀드 중심으로 벤처 투자가 이뤄지게 된다. 심사역들에 대한 차별적인 보상으로 전문성이 높아지는 한편, 투자 범위에 있어서도 자율성이 대폭 확대된다. 그야말로 선진적인 형태의 벤처캐피탈이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국채 첫 유한회사형 벤처캐피탈로 5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프리미어벤처파트너스 관계자는 “LLC형 벤처캐피탈이 창투사로 등록되면 세제 및 부수적인 부문에서 다양한 수혜를 입을 수 있다”며 “기존 창투사의 전문심사역들이 독립하거나 역량을 지닌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LLC 형태로 활발하게 업계에 뛰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벤처캐피탈들의 CRC(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 겸업도 최근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벤처캐피탈들이 M&A나 기업의 가치를 높여 되파는 바이아웃 등 새로운 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동양창투와 LG벤처투자가 지난해 새롭게 CRC 시장에 뛰어든데 이어 스틱IT투자, 한미열린기술투자, 한화기술금융 등도 올 들어 CRC 등록을 마친 상태다. 업계에 따르면 CRC 겸업 벤처캐피탈의 수가 지난 2000년 말 8개에서 현재는 31개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김형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이사는 “벤처캐피탈의 성공 여부는 결국 자금의 회수 여부와 수익률”이라며 “이제껏 코스닥 시장이라는 극히 제한적인 방법으로 자금 회수가 이뤄졌기 때문에 업계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M&A 시장을 통해 70%의 벤처 투자 자금이 회수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벤처캐피탈 업계의 중국 등 외국 벤처 투자가 증가하면서 벤처 업계 활성화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KTB네트워크를 비롯해 엠벤처투자, 스틱IT투자, 한화기술금융 등 국내 업계를 대표하는 주요 벤처캐피탈들이 중국 상하이 등지에 현지 법인과 사무소를 개설하며 중국 벤처 투자에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