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히메현은 그 이름처럼 따뜻하고 풍요롭다.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던 전국시대에도 별다른 전란 없이 조용하게 지냈던 곳이다. 또 바다를 끼고 있어 각종 해산물이나 먹거리도 풍부하다. 약간의 물 부족이 있을 만큼 연중 쨍하게 갠 날이 대부분이다. 꽤 높은 산들이 넓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다. 이 때문일까. 일본인 특유의 깍듯함은 그대로지만 지역 사람들의 얼굴에는 넉넉하고 따뜻함이 흐른다. 말투도 일본의 타 지역에 비해 느리고 여유롭다. 한국으로 따지면 충청도쯤 되는 고장이 바로 에히메현이다.
에히메현은 그 온화한 아름다움으로 많은 영화의 촬영지나 소설의 배경으로도 이름이 높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에히메현 출신 작가 가타야마 고이치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에히메현에서 주로 촬영했다. 극중 주인공 아키가 백혈병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 장면 등을 에히메현청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현청 앞 전차역은 여권용 사진을 찍기 위해 남자 주인공 사쿠가 아키를 데리고 나서는 장면이 연출된 곳. 1929년 건축된 에히메현청은 구 서울역이나 지금은 없어진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처럼 당시 지어진 일본 건축물의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에히메현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마도 에히메현의 주도 마츠야마시에 있는 도고온천마을 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충청도에 있는 도고온천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물론 한자는 다르다. 마츠야마시는 주도 임에도 인구 50만 명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시의 북동쪽에 자리 잡은 구시가에는 도고온천 본관을 중심으로 온천 관광지가 형성되어 있다.
도고온천은 무려 3000년 전에 터져 나온 일본 최고(最古)의 온천이다. 또 피부병 치료에 탁월해 <만엽집>에도 소개되었을 정도로 그 명성이 높다. 한 해에만 5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데 일본인들에게는 ‘살아생전 꼭 한번 찾아야할 온천’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이 온천마을에서도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영업을 해온 도고온천 본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명물이다. 1894년 건축된 목조 3층 누각의 공중목욕탕으로 일본 황실 전용 목욕탕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공중목욕탕으로는 유일하게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 2001년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던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주무대가 되는 ‘유바바의 여관’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이 온천여관의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하루 약 4000명 정도가 방문한다. 층마다 차별화된 서비스를 보여주고 가격도 400엔에서 1500엔까지 다양하다. 이를 테면 1500엔을 내면 온쳔여관에서 내주는 유카타(일본식 잠옷 평상복?)를 입고 다다미가 깔린 휴게실에서 다과를 서비스 받을 수 있지만 보다 저렴한 경우 그냥 욕탕만 이용하는 식이다. 목욕을 마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다미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도고온천 본관을 둘러보다 보면 건물 꼭대기에 백로 모양을 한 장식이 달려 있다. 이 백로는 3000년 전 이곳 온천수로 다리를 치료하고 다시 날아오른 백로 이야기에서 비롯된 상징물이다.
도고온천 본관 주변 아케이드에는 특산품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들어서 있고, 아케이드와 도고온천 본관을 중심으로 현대식 호텔이나 온천들이 즐비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언덕배기에 하나둘씩 들어선 탓에 방향감각을 잃기 쉬울 만큼 복잡하지만, 오래된 동네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정겹다.
또 일본 온천마을 특유의 분위기가 넘쳐나 저절로 긴장이 풀린다. 저녁 시간이면 유카타 차림의 온천 방문객들이 오가며 상점을 기웃거리고, 맥주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정 일본을 즐기고 싶다면 그들처럼 유카타 차림으로 밤바람을 맞으며 동네를 한 바퀴 휘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뿌우’하고 고동소리를 내며 여객선이 멈추자 거룻배 한 척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얼핏 보기에는 오모리만한 어촌이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분수가 있지, 나보고 이런 데서 버티라구?’ 기차역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타고 보니 완전히 성냥갑 기차였다. 이리저리 밀리며 5분 정도를 갔나보다. 그랬더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차표가 3전으로 어쩐지 싸다 싶었다. 역을 빠져나와서 인력거를 잡아타고 마침내 중학교에 도착했다.” 나츠메 소세키 金之助, <도련님> 중에서
도고온천마을은 나츠메 소세키의 대표작인 <도련님(봇짱)>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근대문학의 거장 나츠메 소세키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문학가다. 나츠메 소세키는 영국 유학 후 이곳 마츠야마중학교에서 1년간 영어교사를 했는데, 당시의 체험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마츠야마 시내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도련님>과 관련된 이야깃거리들을 만날 수 있다. ‘나츠메 소세키의 표현대로’ 시내를 지나는 성냥갑 모양을 한 기관차 ‘봇짱 열차’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마츠야마에서는 전차가 시민들의 주된 교통수단이다. 1888년부터 1954년까지 시내를 달렸던 증기기관차 한 대를 지난 2001년 복원한 것이 바로 봇짱열차다. 실내에 들어서면 제복을 입은 차장이 손님을 맞고, 차 내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는 복고풍으로 꾸며져 아늑하다.
또 도고온천 전차역 인근에 있는 봇짱요술시계도 <도련님>과 관련되어 있다. 매시간 정각이 되면 시계탑 속에서 <도련님>에 등장하는 인물 인형들이 나와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관광객을 즐겁게 한다. 나츠메 소세키가 자주 찾았다는 도고온천 본관에도 ‘봇짱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시내 곳곳의 선물가게에 관련된 캐릭터 상품들이 즐비한 것은 물론이다.
마츠야마 시내에서 벗어나 한 시간. 같은 에히메현 내에 우치코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바로 현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오에 겐자부로가 태어난 곳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대표적인 친한파 문학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간간히 찾아볼 수 있었다.

우치코는 19세기경 옻나무 열매를 원료로 한 양초 ‘모쿠로’로 매우 번성했던 마을이다. 지금도 당시의 번영을 보여주는 상가 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우치코에는 70칸에 이르는 상가가 600m나 계속된다. 또 당시 지역 유지인 ‘홍화가가(家)’의 웅장한 저택과 1790년 건축된 우치코 최고의 주택 ‘오무라가(家)’가 처마를 나란히 하고 그래도 남아있다. 일본의 중요전통건출조형물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완만한 고개로 된 거리의 양측에 흰색과 노란색을 두른 석회벽이 그래도 남아있다.
또 모쿠로 자료관과 상가를 수리 복원한 상가자료관, 당시의 생활민속도구를 전하는 소코 관 등 전시품은 물론이고 건축 내부도 주목할 만하다. 마치 한국의 민속촌이 아닌 북촌한옥마을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거리에 서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돌아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지방을 대표하는 목조 대 건축물로 마을의 상징인 ‘우치코 좌’는 꼭 둘러볼만하다. 본격적인 가부키 공연장으로 1916년 건축되어 1950년 한때 영화관으로 개조되기도 했으나, 1985년 주민 모금으로 무대 극장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바다가 전해주는 선물
에히메현은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물가가 한국에 비해 높은 일본이지만 ‘체감물가’는 오히려 낮다. 음식값이 싸기 때문이다. 밀밭과 보리밭이 많아 ‘우동’ 맛도 일본에서 손가락 안에 든다. 또 일본 내 최고의 귤 산지가 바로 에히메다.
마쓰야마의 향토요리는 ‘다이메시(도미밥)’, ‘다이소멘(도미소면)’, ‘다코메시(문어밥)’ 등 대부분 해산물과 관련 있다. 특히 다섯 가지 색깔의 면인 오색소면은 약 360년 전부터 전해지는 마쓰야마의 향토 요리다. 또 잔가시가 씹히는 자코텐(어묵)도 꼭 맛볼 음식이다.
에히메현에서는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자전거를 통해서다. 에히메현이 끼고 있는 세토내해의 항구도시인 이마바리시의 ‘선라이즈 이토야마’에서는 구루시마해협대교를 건널 수 있는 자전거를 대여해준다. 이마바리시와 시마나미 사이에는 80km에 달하는 자전거 길이 있는데 에히메 측 출발점이 바로 이 곳이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세계 최초의 삼연식 현수교인 구루시마해협대교를 건너는 맛은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잘 모를 것이다. 또 사이클링 터미널이 길의 곳곳에 있어 도중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남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