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CEO들은 화려함보다

       구김없는 실용적 정장 즐겨”

옷 잘 입는 CEO는 문애란 웰콤 사장, 정춘보 신영 회장, 조돈영 르노삼성 부사장

왠지 부담스럽다. 길게 키를 늘어뜨린 드레스가 저마다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손길을 내미는 유혹은 쉽게 뿌리치기도,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할리우드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옷들을 한국에서, 그것도 일반인들이 누가 입는다는 말인가.

케이 킴(Key Kim)을 만나기 전까지 유명 의상 디자이너들을 향한 기자의 선입견은 단호했다. 각종 컬렉션이라는 이름의 패션쇼가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 모델들이 걸친 옷을 입고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나타났을 때 지나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래서 패션쇼를 바라보는 눈은 사람이 입기 위한 옷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쇼라는 데에 맞춰져 있었다.

더구나 케이 킴은 일반적인 패션쇼가 보여주는 의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파티복 디자이너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실용성과는 도저히 연결지을 수 없는, 먼나라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 청담동의 케이 킴 숍에 들어섰을 때까지도 그랬다.

레스토랑에서 개최한 파티복 패션쇼

지난 3월말 케이 킴은 서울 삼성동에서 2007-2008 S/S 컬렉션을 선보였다. 물론 파티복 패션쇼였다. 지난해 11월 파티복 전문 라인 ‘케이 킴 애프터 5’ 브랜드를 런칭한 이래 두 번째였다. 그러나 이날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우선 패션쇼 장소부터가 레스토랑이었다.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를 모델들이 걸어 다녔다. 발표한 의상도 기존 파티복의 이미지와는 달리 부담스럽지 않은 편안한 디자인 일색이었다.

“파티복이지만 멀리 느껴지는 게 아니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죠. 젊은 사람들의 호응도가 높았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어려운 컨셉트 위주로 새롭고 앞서가는 패션쇼를 보여주려 하는 데 반해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패션쇼를 추구하고 있다. 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다.

“파티복은 생소하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반짝이는 투피스 같이 이미 우리 생활에서 실용화돼 있거든요.”

그녀가 파티복 전문 라인 ‘케이 킴 애프터 5’를 브랜드화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화려한 이브닝드레스 또는 멋있는 수트를 입고 싶어도 어색해서 ‘멋’을 포기해버리는 이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녀는 브랜드 네임에서 알 수 있듯이 ‘케이 킴 애프터 5’를 오후 5시 이후, 즉 일과 후에 입는 의상이라고 덧붙였다. 업무가 끝나고 모임에 참석할 때 일반인들도 쉽게 소화할 수 있는 화려한 파티용 정장, 이브닝드레스 등이다. 과연 내가 이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입어보니 ‘아, 정말 예쁘게 어울린다. 내가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옷을 추구한다는 그녀의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녀에게 옷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저는 옷 마니아에요. 그러다보니 엄청난 쇼핑광이죠.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잖아요. 저는 옷을 입는다는 것을 매력을 발산하는 행위라고 봐요. 다시 말하면 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디자이너는 사람들이 문화를 창조하고 매력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란다. 기업체 CEO와 예술인이 케이 킴의 단골 고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흔히 케이 킴을 파티복 전문 디자이너로 부르지만 그녀의 강점은 일과 여가생활 모두를 열정적으로 즐기는 섹시하고 페미닌한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여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고 세련된 감각을 가진 남성을 위한 다양한 남성복을 선보이고 있다.
흔히 케이 킴을 파티복 전문 디자이너로 부르지만 그녀의 강점은 일과 여가생활 모두를 열정적으로 즐기는 섹시하고 페미닌한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여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고 세련된 감각을 가진 남성을 위한 다양한 남성복을 선보이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옷은 단지 유행이나 멋이 아닌 ‘옷을 입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옷을 직접 입는 사람이 옷을 통해 자신감과 즐거움 그리고 당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옷은 때와 장소, 즉 경우에 맞게 입는 게 중요해요. 옷은 사회적이잖아요.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함으로써 내가 즐거워지는 특징을 갖거든요. 과거엔 내면이 외면을 좌우했지만 지금은 외면이 내면까지 좌우하고 있어요. 그래서 옷을 통해 자신을 가꾸고 꾸미게 되는 거예요.”

비즈니스맨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스타일에 대해 그녀는 당연히 때와 장소에 맞지 않은 옷차림을 꼽았다. 여기에 옷소매와 바지 길이가 길면 사람이 모자라게 보인단다. 또 넥타이핀으로 치장하려는 것도 경계한다. 외국 출장이 잦은 비즈니스맨이라면 정장 상의가 손등을 덮는 스타일도 피하라고 덧붙인다. 외국에서는 피하고 있는 이런 정장을 유독 한국 남성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다림질이 되어 있지 않은 옷을 입거나 구두 뒷굽이 닳아 있는 사람을 보면 자신을 추스를 시간조차 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내 일을 맡길 신뢰감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녀는 기본에 충실한 옷차림을 강조한다. 친근감과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색상은 직업에 따라 이미 정해져 버려 커다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남성의 경우 검정색·회색 계통의 정장과 연한 색상의 셔츠가 마치 유니폼처럼 돼버렸다. 넥타이도 비슷한 추세로 흐르고 있단다. 결국 얼마나 단정하게 입었느냐 하는 것이 옷을 얼마나 잘 입었느냐 하는 판단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객의 몸이 옷을 만든다”

“요즘 CEO들의 옷차림을 보면 화려함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어요. 잘 구겨지지 않고 구겨져도 금방 펴지는, 정장이면서도 개성 있는, 진부함보다는 생기 있고 활동적인 옷을 즐겨 찾거든요. 정장 같은 캐주얼, 캐주얼 같은 정장 스타일이죠.”

CEO들이 많이 찾는다며 그녀는 몇 벌의 옷을 꺼내들었다. 회의가 많고, 이동 거리가 길어 장시간 앉아 있다가 일어서도 스타일이 구겨지지 않는, 신축성 있는 옷들이다. 또 여행지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 여성 CEO의 경우 니트 같으면서도 정장 스타일의 옷들이다.

“웰콤의 문애란 사장의 패션은 감각이 돋보이죠. 작은 키에도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관리 능력이 뛰어납니다. 광고업을 하는 분이라 감각이 남다른 것 같아요. 신영의 정춘보 회장 형제분도 멋지게 옷을 입는 스타일이고 르노삼성의 조돈영 부사장도 그렇습니다.”

케이 킴은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녀는 트렌드에 따라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몸이 옷을 만든다는 디자인 철학을 갖고 있다. 옷을 입는 이의 직업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체형, 심지어는 얼굴색과 머리색까지 고려해 숨겨진 매력을 끌어냄으로써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디자이너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과 놀이가 결합된 옷. 디자이너 케이 킴이 추구하는 의상 디자인의 컨셉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