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완벽한 백지 상태에서 기초 자료조차 없는 막연한 목표만으로 개발 성공
“모두가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현실로 이뤄냈습니다.”
100년 이상 제철 역사를 지배해온 용광로 공법이 후진 기술로 전락했다. 포스코가 환경 친화성, 원료 사용의 효율성, 경제성 등에서 높은 우위를 가진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지난 1992년부터 지금까지 파이넥스 공법 개발 및 상용화를 위해 포스코가 투입한 연구개발(R&D) 비용은 5541억원. 관련 기술 특허만도 국내 224건, 해외 20여 개국에서 58건에 달한다.
파이넥스 공장이 준공된 지 20여 일. 포항제철소 파이넥스추진반 사무실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인터뷰를 약속한 5명의 개발 주역들이 한 곳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는 말에 회의 후 모두 한 자리에서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착각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근 추진반장은 “보통 신기술이 개발되면 50~70% 조업도 힘들만큼 1~2년 정도는 고전을 한다”며 오히려 아무런 문제없이 현재 92% 가동률까지 보이고 있는 것을 불안해했다.
엔지니어링그룹을 이끌었던 주상훈 리더도 “개발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점을 개선했다 하더라도 아직 완벽하다고 장담하기에는 이르다”며 “향후 3개월 정도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개발 성공과 공장 준공 및 조업은 안정적인 상용화의 시작일 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멀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말이었다.
“짧게 잡아도 10년 이내에 경쟁 기술 없다”
근대 제철 기술의 발전은 14세기경 용광로가 발명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현재의 용광로-전로로 대별되는 용광로 공법은 대형화와 에너지 최적화를 통한 효율, 고생산성, 장(長)수명 등의 장점으로 세계 철강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용광로는 유연탄을 연소시키고 철광석을 환원시키기 위해 하단부에 강한 열풍을 불어넣는다. 이때 가루 형태의 원료를 사용하게 되면 열풍에 의해 날아가 버리거나 통풍이 안 돼 연소율이 떨어진다. 때문에 사전에 일정한 덩어리 형태로 구운 소결광과 코크스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덩어리 형태의 괴철광석과 덩어리 형태로 잘 뭉쳐지는 성질을 지닌 고점결성 유연탄(Cocking Coal)은 전체 매장량의 15~20%에 불과해 가격이 비싸다. 또 이제까지 100여 년간 용광로 공법에 의해 집중 사용돼 왔기 때문에 점차 고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일본의 DIOS법, 호주의 HISMELT법, 유렵의 CCF법, 브라질의 TECNORED법 등이 거의 동시에 개발을 추진해 왔지만 아직 상용화해 양산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외국의 철강 회사들도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상용화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겨우 10만 톤급 정도에 불과합니다.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일본철강연맹의 DIOS법은 이미 포기했고, 호주의 HISMELT법은 심각한 결함이 발견돼 5년 이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이내에 파이넥스 공법을 견제할 만한 기술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후근 추진반장은 당분간 세계 철강 업계에서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한 포스코의 독주를 장담했다.
“프로세스 개발은 돈과 시간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성공한다면 다행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 자칫 회사가 망할 수 있는 소모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최고경영진의 의지와 결심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심지어 데모플랜트 절반을 뜯어낸 적도 있습니다. 보름 이상 가동한 적이 없었죠. 3~4일을 돌리면 멈추곤 했습니다.”
신성기 기술팀 리더는 이번에 준공된 연산 150만 톤 조강 생산 규모의 상용화 공장 준비는 오히려 쉬웠다고 말했다. 2003년 연산 60만 톤급 데모플랜트 준공을 통해 기술이 축적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설비가 안정될 때까지 1년 동안 테스트만으로 야간 조업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좀 더 편한 업무를 찾아 부서를 옮기고 회사를 옮겼다. 150만 톤급 공장이 준공된 지금까지 이렇게 파이넥스추진반을 떠난 인원은 60%에 달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들은 사실상 가정을 포기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자녀가 지금은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남들처럼 놀이공원은 고사하고 저녁 일찍 퇴근해 함께 해주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야 미안함으로 전해온단다.
배진찬 파이넥스2공장장은 “기술적으로 가치가 있겠다 싶어 지원했다”면서도 “개발 성공에 대한 가능성과 회의가 교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 대한 책임과 열정이 없으면 기술자가 아니다”는 말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를 대신했다.

파이넥스 공법 개발 5인방과의 연속 인터뷰에서 한 사람당 최소 10번 이상 반복된 단어가 있었다. ‘시행착오’가 그것이다. 지난 1992년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아무도 그 횟수를 헤아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이렇게까지 힘든 것인 줄 몰랐습니다. 흔히 신기술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유사한 연구라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료를 뒤져보면 원하는 최소한의 데이터라도 있거든요.”
그러나 파이넥스 공법은 달랐다. 이후근 추진반장은 문제점을 발견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길도 없었고, 방향도 잡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완벽한 백지 상태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코렉스 공법 개발 때부터 목표는 파이넥스였습니다. 그러나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죠. 자원은 고갈된다는 것, 그래서 저품질 저비용으로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이 손에 쥐고 있었던 유일한 설계 도면이었습니다.”
김득채 실장은 숱한 시행착오가 반복될 때마다 파이넥스추진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영일만을 바라다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반복되던 시행착오가 개선되면서 기술이 향상되고, 또 다른 시행착오 역시 개선책이 나오면서 비로소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HCI 설비가 성공했을 때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신했습니다. 막연한 목표가 희미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던 막연한 목표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1960년대 이전까지 일관제철소의 공정은 소결→코크스→용광로→전로→조괴→분괴→압연 등 7개로 구성됐다. 이후 1960년대 정련한 쇳물을 연속적으로 주형에 흘려 넣어 슬래브를 만드는 연주공정이 개발됨으로써 틀에 부어 일정한 모양을 만드는 조괴과정과 이 철강덩어리를 슬래브 모양으로 만드는 분괴공정이 대체돼 1개 공정을 단축, 일관제철소 공정에 대혁신을 이루었다. 그리고 40년 동안 일관제철소는 각 공정별 설비 개선 및 최적화가 진행됐지만 소결→코크스→용광로→전로→압연의 기본적인 6개 공정을 더 이상 단축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포스코의 파이넥스 상용 설비는 기존 일관제철소 공정에서 소결과 코크스 등 철광석과 유연탄을 사전 가공하는 공정을 생략함으로써 전체 4개 공정으로 대폭 단축시켰다. 당연히 투자비와 제조 원가도 줄어들어 ‘쇳물은 용광로에서 생산된다’는 철강 산업의 일반적 기술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파이넥스 공법의 핵심기술은 통기성을 높이기 위해 철광석을 단단한 덩어리로 만드는 소결

공정을 없애고, 가루 철광석을 로내에 띄워서 바로 환원하는 ‘유동 환원 조업기술’이다. 또 분말 형태의 환원철을 700℃ 이상에서 압력을 가해 덩어리 형태로 만드는 ‘HCI(Hot Compacted Iron) 제조기술’과 가루 형태의 유연탄에 첨가제 등을 균일하게 혼합한 후 압력을 가해 조개탄과 같은 덩어리 형태를 만드는 ‘성형탄 제조기술’, 그리고 HCI와 성형탄을 용융로에서 쇳물로 만드는 ‘용융로 조업기술’이 핵심 기술에 속한다.
“용광로 공법에서는 쇳물을 만들 때 용광로에 뜨거운 바람, 즉 열풍을 불어넣지만 파이넥스 공법에는 용광로가 없습니다. 대신 용융로가 있는데 열풍 대신 ‘순산소’를 집어넣어 쇳물을 만들어냅니다.”
지난해 9월 파이넥스추진반은 품질, 원가 측면에서 최고의 성과를 달성했다. 3~6개월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했던 이 같은 성과가 보름 만에 달성된 것이다. 이때까지도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임직원들의 얼굴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마 이날을 예상했다면 그동안 추진반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도 모두 남아있었을 겁니다.”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가 준공됨으로써 포스코는 2008년 조강 생산 능력이 3400만 톤으로 늘어나게 된다. 지난해 3000만 톤의 조강을 생산한 포스코는 이번에 150만 톤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준공하고 파이넥스 데모플랜트의 생산량을 더 늘리는 한편 올해 광양 3 용광로를 개수하는 등 생산 능력을 확충할 계획이다. 이에 현재 기준 세계 4위에서 2위의 철강회사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향후 10년 이내에 중국, 인도, 동남아 지역 등 가장 유망한 지역을 대상으로 파이넥스 공법을 적용한 생산기지를 확대하게 되면 조강 생산 5000만 톤 이상으로 성장하게 돼 생산 규모면에서도 세계 수위 기업과 경쟁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술자는 두 갈래 길을 걷습니다. 하나는 남들이 개발한 기술을 만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해보지 않은 기술을 만드는 길입니다. 파이넥스 공법 개발에 참여했던 우리는 편한 전자의 길보다 15년 동안 휴가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후자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만하면 기술자로서는 만족스러운 성과 아닙니까?”
그리고 김득채 건설실장은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양반 같으면 어떤 길을 택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