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낯선 알파벳의 간판, 낯선 사람들이 쏟아내는 낯선 울림의 말, 낯선 냄새가 가득한 공기, 낯선 것들로 가득한 풍경, 일상과 다른 것들과의 맞닥뜨림에 반하고, 이상을 발견하는 매력에 빠져들고, 발이 부르텄던 기억도, 길을 잃고 눈물 그렁하던 기억도 온통 황금빛 추억이 되어버리는 마법 같은 것이다. 또한 여행은 언제나 겸손을 가르친다. 지식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어린아이 같이 용감해져서 무엇이든지 물어야 한다. 길을 묻고, 잠자리를 묻고 열차의 시간표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를 비워놓고 나면, 다음에는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찬다. 거칠 것 없이 넓은 이 세상에서 어쩌면 나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겸손함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사람들이 변하는 모양이다.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힘을 썼는데도 얻는 것은 그런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닌 듯하다. 떠남만으로도, 버림만으로도 사람은 참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내가 여행을 큰 스승으로 모신 수제자여서 일까. 만약 언젠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이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선물은 세계를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적극적이고 밝은 성품, 문법 따지지 않고 자신 있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뻔뻔함일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사실 한국에서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고민거리다. 이리 오라 손짓하는 화려하고 멋진 곳들이 너무나 많다. 사진에, 가격에, 포함 사항에 ‘속지 않기’ 위해서 전쟁 아닌 전쟁도 치러야 한다.
그런 유혹에 속지 않는 비결은? 많이 다녀보면 된다. 그리고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근거리 여행지는 한번쯤 들러보았다면,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번 여름엔, 적어도 올해 안에는 남태평양 피지를 두고 고민해 보라 권하고 싶다. 아니면, 나를 믿고 한번 속아 준다면 감사하겠다. 남자보다 피지가 더 좋아 24시간 피지 생각만 하고, 그러다 보니 혼기를 놓칠 위험에 처해있는 나를 본다면 속아 줘도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닐 것이다
피지는 휴양지다. 일곱 가지 푸른색을 띠는 바다, 그 위에 점점이 박힌 33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남태평양의 보석이다. 경비행기에 올라 공중에서 아래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온갖 상념과 고민이 일순간에 텅 비워지고,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지극한 여유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태어나서 이런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싶어 집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는 곳이다. 허가를 받지 않으면 개인이 소유한 섬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멜 깁슨과 잉글랜드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섬 하나를 통째로 구입했고, 최고급 하얀 요트들이 경주를 벌이는 그야말로 ‘부자들의 휴양지’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도 피지의 모든 것을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피지의 독특한 문화와 사람에 대한 겸손한 마음과 발품을 파는 사람들에게만 슬며시 보여주는 숨겨진 비밀들이 많다. 물론 나 역시 꽤 많이 발견했다고 자만할 수 없다. 피지의 숨겨진 비밀들, 피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 그 중 일부만 공개해 볼까 한다.
피지를 즐기는 BEST 10
1 아주 특별한 피지 전통 문화 체험 피지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지만, 간단한 피지 인사말이라도 할 줄 안다면 어디서나 사랑받게 된다.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은 불라(Bula, 안녕하세요)와 비나카(Vinaka, 감사합니다)!
피지에서 ‘정장’은 양복에 넥타이가 아니다. 치마(술루)에 불라셔츠라 불리는 꽃무늬 남방이다. 코리언타임만 있는 줄 알았더니 ‘피지타임’도 있다. 피지에서는 느리다고 화내면 자기만 손해다.
피지언이 막걸리색 같은 뿌연 액체를 건네면 단숨에 ‘원샷’을 해야 한다. ‘당신을 환영한다, 친구로 맞겠다’는 성스럽고 의미 있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단, 한두 잔을 마시고 나면 혀가 얼얼해서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카바는 양고나(Yaqona)라는 나무뿌리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피지 전통 음료다. 몸에는 해롭지 않은 약간의 마취 성분이 들어 있다.
2 어제와 오늘을 나누는 ‘날짜 변경선’ 보러 가기 피지는 남위 12~21°에 위치하며, 경도 상으로 볼 때 176°E~178°W에 위치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타베우니(Taveuni)섬 끝자락에 세워진 단출한 경계선이 시간의 경계를 나눈다. 왼쪽으로 한 발짝 가면 어제, 오른쪽으로 가면 오늘이다.
3 영화의 주인공이 되다 1980년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영화배우 브룩실즈. 그녀의 청초함을 더욱 빛나게 했던 영화 <블루라군> 촬영지가 바로 피지의 ‘야사와(Yasawa)군도’에 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촬영한 몬두리끼섬에서 나무로 불을 피워 보는 것도 흥미롭다. 피지에 ‘캐스트어웨이’라는 섬이 있지만, 실제 촬영지는 몬두리끼(Moduriki)섬이었다. 데이크루즈로 이 섬을 방문하면 톰 행크스가 그렇게 처절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지 않다. 바다빛깔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또 대한항공 광고 ‘피지 편’에 등장한 아찔한 하트섬과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던 모래섬. 이런 광경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10시간을 날아올 가치가 있다.
4 500년 된 암반에서 퍼 올린 피지워터 실컷 마시기
‘당신이 물병을 따는 순간이 처음으로 공기와 만나는 순간’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화산섬인 피지의 500년 된 암반에서 퍼 올린 물을 공기와 접촉시키지 않고 병에 담는다. 보기만 해도 피지를 느끼게 하는 그림과 독특한 사각 물병이 인상적이다. 이 물은 ‘연예인의 물’이라 불릴 만큼, 명품 생수로 자리 잡았다. 실제 유명세를 탄 이유도 파파라치에게 찍힌 스타들의 손에 들려있었던 물이라는 사실!
5 세계에서 유일하게 얼지 않은 피지 참치 맛보기 피지하면 푸른 바다, 원양어선, 그리고 참치가 바로 연상된다. 대단한 비용을 들여 공수하지 않는 이상 참치를 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곳은 피지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참치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바로 녹아 버린다. 참치가 아이스크림으로 둔갑한 것인가?
시장에서 랍스터 한 무더기 사서 배 터지
게 먹어보는 것도 피지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꿈에도 그리던 랍스터. 몇 마리만 맛있게 먹어도 비행기 값은 뽑는다. 그러나 시중에서 파는 요리 가격은 남태평양이라도 그리 만만치 않다. 이럴 때는 다리품을 좀 팔아 피지언들이 잘 가는 어시장에 간다. 이것이 랍스터 가격인지 영덕게 가격인지, 정말 저렴하게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 랍스터가 별루라면 손낚시로 광어, 우럭을 잡아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와 곁들여 먹는 것으로 대신해도 그만이다.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어느 횟집에 가도 이 맛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배를 타고 나가 손낚시로 광어, 우럭을 잡아 그 자리에서 바로 두툼하게 썰고, 준비해 간 초고추장에 푹 찍어 소주(현지에서는 C1소주를 판다) 한잔! 셋이 먹다 셋이 다 죽는다.
6 일곱 가지 푸른 바다 빛깔 세어보기 피지의 바다는 일곱 가지 푸른빛깔이 난다고 한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조량에 따라 그 색이 오묘하게 층을 이룬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30가지 색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만큼은 더 설명할 필요 없다. 남태평양이 달리 남태평양이 아니다.
7 늦은 밤바다에서 나체로 수영해보기 전체 관광객 중 한국인이 5%도 안 되고, 상주하는 한국인도 난디, 수바에 주로 거주하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영락없이 ‘당신과 나, 둘만의 파라다이스’가 펼쳐진다. 해가 지고 나면 해변에서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원한다면 무인도 투어도 강추! 333개의 섬 중 200여 개가 무인도인 피지. 평생 어디에 가서 이런 경험을 해볼 것인가! 미안하지만 자료사진은 보여줄 수 없다.
8 ‘크루즈 여행’ 즐기기- 랍스터 선셋 디너크루즈
‘선셋 디너크루즈’에 몸을 싣고 지는 해를 바라본다. 정말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아름답다. 세상이 온통 주황색, 노란색으로 물들어 버린다. 저녁식사로는 맛깔스런 랍스터 구이! 피지 전통의상 쇼도 감상할 수 있다.
피지에 왔으면 크루즈와 경비행기 한 번은 꼭 타봐야 한다. 하늘에서 보는 피지와 육지에서 보는 피지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상공을 날아 남태평양 한가운데를 날면 숨이 턱 막힌다. 큰맘 먹고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색과 기이한 모양의 산호초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깜짝 놀랐다. 별무리가 금세라도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처럼 가까이 와있다. 이곳에서는 남십자성, 저 멀리 북두칠성도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오히려 별이 너무 가까워서 윤곽이 잘 안 잡히기도 한다. 그물침대에 누워 별빛으로 온통 환해진 하늘을 보면 노래를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너무나 멋져 눈물이 찔끔 난다. 하품해서 그런 건가?
9 피지 비터(Fiji Bitter), 피지 골드(Fiji Gold) 맛 비교해 보기
피지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이다. 화산섬이라 지하수도 맑고 깨끗하다. 역시 술맛은 물맛! 그 중에서도 피지 비터의 알싸하고 쌉소롬한 맛을 잊지 못해 출국장 면세점에서 한 보따리 구매하게 된다. 피지 골드는 비터보다 약간 부드러운 맛이 난다.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았다.
술이 있다면 당연히 안주가 있어야 한다. 피지의 수도 수바(Suva)의 밤거리. 도시는 온통 깜깜한데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인다. 본능적으로 포장마차 같단 생각이 든다.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는 이곳에서는 양갈비, 소시지, 계란프라이, 야채볶음을 즉석에서 만들어 위생 도시락에 담아 준다. 얼마냐고? 단돈 3.5달러(약 2000원)! 지금도 군침 돈다.
10 연산호 구경하고 상어 밥 주기 피지의 별명은 ‘연산호의 천국’이다. 섬 가까이에서도 건강한 연산호와 아름다운 물고기 떼를 볼 수 있다. 감이 잘 오지 않겠지만 연산호가 남아있는 지역은 그리 흔치 않다. 스노크링을 하다 보면 머리를 수족관에 넣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아니 물론 그 이상이다.
또 피지는 세계 3대 다이빙 지역 중 하나다. 그 중 상어 먹이 주기 프로그램은 상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물론 규칙을 잘 따르면 잡아먹힐 염려는 절대 없다. 그래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유는 뭘까?
지면관계 상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지만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다. 피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아직도 피지를 ‘휴양지’로 소개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피지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책을 읽다가 자장가 같은 조곤조곤한 파도 소리에 잠들어도 좋고, 멍하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상념을 털어버려도 좋다. 그러나 혹시라도 피지가 할 일 없고 심심한 곳이라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봤다.
“몸과 정말이지 즐겁게 놀면서 영혼에 이르는 길,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숙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무엇이든 해야 하고, 무엇이든 하고 싶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인생은 두 가지 자유를 찾아 헤매는 과정입니다.” 홍신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피지에서 무엇을 하건, 하지 않건 그것은 자유에 맡긴다. 그러나 여전히 피지를 ‘휴양지’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결코 이곳에서 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만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엄마 뱃속에서 느꼈던 원초적인 평온함을 갈구하듯 찾아 든 곳이기 때문이다. 2007년 남태평양 피지로의 여행, 수고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온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치를 선물할 기회다.
FIJI ME, BLESS ME (‘피지’하다, 나를 축복하다)
문의 : 피지 관광청 02-363-7955 cafe.naver.com/bulafi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