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통신 시장과 A/V가전 시장에서 한국 삼성전자가 날이 갈수록 위력을 떨치고 있다.
2004년부터 3년 동안 판매 1위를 고수해 온 휴대전화와 TV에 이어, 2007년 상반기에는 MP3 마저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전 세계 MP3 플레이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한 애플사의 ‘아이팟(i-Pod)’을 누르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이어서 의미는 더욱 크다.
시장 관계자들도 이런 사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8월 초 모스크바에서 만난 외국계 유력 컨설팅 회사 ‘존스 랭 라살레(Jones Lang LaSalle)’의 마이클 랑게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 총본부장. 그는 “러시아 통신과 A/V가전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바람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또 내로라하는 일본 전자회사의 한 임원은 “사고방식이나 소비 행태가 유럽을 지향하는 러시아 소비자들의 취향을 감안할 때 동양권 회사의 시장 진출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삼성이 인기를 끄는 것은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아직 벤치마킹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경쟁사들조차도 삼성의 성장세를 놀라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외국 기업도 “삼성만큼만 하자”
주목되는 점은 올 상반기 전 세계 휴대전화와 A/V가전 시장에서 매출액이 감소하면서 삼성전자가 국내 시장을 제외하고 해외 시장 진출이 전반적으로 부진하지만, 러시아 시장만큼은 예외라는 점이다. 그것도 소니, 파나소닉, 애플, 노키아, 모토롤라 등 전 세계 강자들이 모두 사활을 걸 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레드오션(red ocean)’으로 떠오른 러시아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부수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다. 삼성의 휴대전화, TV, MP3플레이어 모두 러시아의 국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우선 휴대전화는 올 상반기 2위 노키아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지만, 박빙의 우위를 지키고 있다. 러시아의 휴대전화 연간 시장 규모는 소매 기준 60억~70억달러로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4위다. 시장 조사기관인 MRG와 GfK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현재 러시아 시장에서 삼성의 점유율은 27%로 노키아의 25%를 누르고 있다.
각 가정 안방에 설치된 TV도 러시아 소비자들의 사랑을 놓치지 않고 있다. 시장 규모 50억달러를 넘는 러시아 시장에서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판매점유율은 LCD와 PDP를 합쳐 평균 21%를 기록, 20% 미만의 점유율로 2위권 업체들인 필립스, 파나소닉, LG전자를 근소하게 앞섰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MP3플레이어다. 러시아 MP3플레이어 시장 규모는 2005년 80만 대 수준에서 2006년 170만 대, 올해는 250만 대로, 2년 만에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2007년 1월을 분기점으로 애플의 아이팟을 제치더니 판매액 면에서 6월 말 현재 17.4%로 2위 애플의 11.2%를 따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레드오션 속에서도 삼성이 살아남은 것을 넘어 최강자로 부상한 비결은 무엇일까.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사업자가 아닌 실구매자 위주의 독특한 오픈마켓(open market: 휴대전화의 경우 011 같은 사업자에 따라 전화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유통매장에서 전화를 구입한 뒤 011이나 010을 선택하는 방식) 구조다. 현재 러시아의 전자 유통매장인 이브로세트나 스뱌지노이, 엘도라도 등은 삼성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장악력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 소비자층을 파고든 삼성 측의 노력 때문이
라고 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요인이 시너지 효과를 냈고, 특히 후자의 역할이 더 컸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크렘린궁 코앞에 올려진 삼성 쇼케이스, 위력 실감
서울 명동이나 종로에 비견되곤 하는 모스크바의 한복판 트베르스카야 거리. 러시아 최고 권부(權府)인 크렘린궁 바로 ‘코앞’이다. 여기엔 일종의 브랜드 쇼케이스인 4층짜리 삼성갤러리가 2003년부터 들어서 있다. 당시만 해도 경쟁사들이 아직 생각지 못했던 최초의 시도였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곳에는 수백 명의 전자제품 현지 딜러와 언론인들이 모여든다. 러시아를 겨냥한 삼성의 제품 시연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이 갤러리에는 삼성이 생산하는 휴대전화, TV, MP3플레이어, 컴퓨터 등 200여 종이 전시돼 있다. 딜러와 언론인들, 심지어 개인 방문객들도 전시된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구입할 수 있다. 철저히 교육한 50여 명의 직원들이 제품의 사용법, 판매, 상담, 애프터서비스를 맡는다.
500만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리모델링을 한 이후 작년 9월 다시 개관했는데 호평을 받고 있다. IBM 관계자는 “우리도 러시아 시장에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삼성갤러리와 같은 브랜드 쇼케이스를 열어야 할 판”이라며 “이미 삼성 측에 관련 문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권력 지향적인 러시아인 ‘감성’ 파고든 현지화
삼성의 독특한 현지화 전략도 눈에 띈다. ‘이그나토프 앤 컴퍼니(Ignatov & Company)’의 애널리스트 니콜라이 포포프는 “외국 회사들 성공 승부처는 철저한 현지화인데, 반드시 투자와 생산 공장 건설만이 현지화의 척도는 아니다”며 “삼성하면 ‘붓지 리제롬!(Be the leader: 리더가 되라)’ 광고 카피 하나가 생각날 정도”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9월5일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 지역에 TV 생산 전용 공장을 착공한다. 필립스 등 다른 회사가 2000년대 초반부터 공장을 건립했던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 하지만 포포프씨의 말대로, 삼성은 ‘붓지 리제롬’이라는 카피로 이미 지명도를 높였다. 러시아인들은 소련 공산주의 시절에도 그랬듯, 대체로 권력지향적인 성향을 보인다. 2005년부터 2년간 러시아 지식층들에 어필한 이 광고 카피는 지금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삼성 제품을 소유하면 ‘리제르(리더)’가 되는 것처럼 각인돼 있다.
여기에다 세계 정상의 공연장인 볼쇼이극장도 16년째 후원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러시아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위해 자선모금을 하면서 러시아인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아울러 새로운 마케팅 전략도 삼성의 인기가도에 불을 붙였다. 제품 교체 주기가 짧고 구매력이 높은 여성을 겨냥, 여성 전용 휴대전화인 ‘라-플로(La-Fleur: 꽃)’를 지난해 10월부터 출시했다.
이 제품에는 생리 주기나 향수 고르는 법, 칼로리 체크 기능 등을 추가, 출시 이후 60만여 대를 팔았다. 경쟁사인 노키아가 ‘라모르(L’Amor: 사랑)’를 1개월 후 출시해 35만여 대를 판 것과 대조적이다. 선점 효과 덕까지 톡톡히 본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레드오션에서 보여준 삼성전자의 도약은 러시아에 진출하려는 다른 업체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삼성전자 측은 신중한 편이다. 러시아·CIS 총괄본부의 임선홍 상무는 “경쟁사들이 뒤쫓아 오는 상황에서 현재의 성과에 안주할 수 없다”며 “러시아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더 많은 전략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