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새벽에 가슴에서 나는 덜그럭 하는 소리로 인하여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 부정맥 약을 먹었다.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로부터 보내온 약이다.

내 심장은 문득 징검다리를 건너듯 두 발을 한 데 모으고 쉬는 경우가 있다. 그때 덜그럭 소리를 내곤 한다. 만일 한 데 모은 두 발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멈추고 있으면 나의 삶은 그 순간에 끝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겁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늘 준비하고 있으므로. 연금술사처럼 꾸준히 준비하는 자는 당황해 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늘 시(詩)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 시처럼 사는 것은 억지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고 꽃으로 아름답게 소리 없이 피어나는 것이다. 

산 단풍의 색깔은 조금씩 진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하룻밤의 찬 서리와 함께 갑자기 새빨개지고 샛노랗게 된다고,

산에 사는 비구니 스님이 그랬습니다.

/ 낙엽은 한 잎 두 잎씩 지는 게 아니고

어느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 담벼락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산에 사는 늙은 스님이 그랬습니다.

/ 나는 날마다 준비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가노라는 말도 못하고 어느 하룻밤 사이에 단풍처럼

진해졌다가 담벼락 무너지듯 떨어져갈 그 준비.

오래 전에 쓴 나의 시를 암송하며 황달이 들기 시작하는 잔디를 밟는다. 폭신폭신한 탄력을 즐기며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는 늘 나의 시가 떠다닌다.

“나무는 찰랑찰랑하고/ 꽃은 가만히 있고/ 탑은 높고/ 산은 더 높고…” 하고, 놀랍게도 스스로 창작하여 노래하던 다섯 살 손자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요즘 자꾸 손자 놈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르곤 하는 것은 가을 때문이다. 가을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겨울 다음에 돌아올 봄 같은 미래.

늙은 감나무의 낙엽을 밟는다.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시자들도 밟힌다. 허무가 허공에 쳐진 거미줄처럼 내 얼굴을 할퀸다. 서글퍼진다. 이 나이에는 서글퍼지는 그것을 즐겨야 한다.

건강하게 백 살 가까이 살겠다고 열심히 집을 가꾸던 한 친구가 폐암으로 멀리 떠나갔다. 폐암은 통증을 모르고, 종양이 머리로 쉽게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집 마당은 잡초가 우거졌다. 거미줄이 얽히어 있다. 적막하다. 그 적막을 즐길 주인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의 인자를 몸에 담고 산다. 어느 날 문득 그 인자가 꿈틀거리면 저 낙엽이나 시자처럼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떨어지되 영글어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나의 씨가 싹틀 것이므로.

연못으로 간다. 진한 자색의 수련들이 성기게 피어 있다. 저것들도 겨울을 준비한다. 나도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꽃 같은 비단잉어들이 순항한다. 연못 앞에 서면 나는 늘 물속에 녹아든다.

발 닿는 데로 간다. 들판 한복판에 섰다. 나락이 익어간다. 추석 안에 거두어 햅쌀 맛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세월은 잘 간다. 현기증 날만큼.

가을은 떠나갈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탐욕도 접어두고, 인연도 접어두고, 마음을 말갛게 비우고,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질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아니 이별을 연습하는 계절이다. 허무를 체득하는 계절이다. 기도하는 계절이다. 나를 위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합장을 하고.

지금의 오탁악세는 탐욕의 범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탐욕 버리기는 허무의 체득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나 묻힐 무덤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 것 필요 없다고, 한 줌의 공기방울이 되어 날아가게 해달라고 아들딸에게 말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한 점 바람이 되어 우주 안을 훨훨 떠돌고 싶다고. 그러다가 들풀과 한 마리 박새와 잔디와 들꽃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별이 되기도 하고 싶다고.

나는 걸림 없이 자유하고 싶은 것이다.

바닷가에 이른다. 먼 바다에서 달려온 파도가 모래톱과 갯바위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저렇게 어떤 꿈인가를 가슴에 안고 줄기차게 달리다가 하얗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살아간다고 말할 뿐, 죽어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환영에 속아 살고, 스스로를 속이며 산다.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간다. 모래는 암석과 조개껍질들이 부서져 된 우주 시간 그 자체이다. 그 위에 새겨진 내 발자국들은 밀물이 지면 사라질 내 시간의 자국이고 결이고 무늬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는 모래밭의 발자국은 없다. 내 할아버지의 자국, 내 아버지의 자국도 사라져갔다.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물새들이 날아온다. 물새들이 날아간다. 검은 구름장들이 흘러온다. 그 구름장들이 흘러간다. 바람이 분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하늘거린다. 먼 바다를 보며 심호흡을 한다. 들이쉴 숨과 내쉴 숨, 어떤 숨결이 이승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돌아와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며 거울 속의 한 풋 늙은이를 마주본다. 주름살과 흰머리와 저승꽃이 확연히 보인다. 앓고 있는 친구에게 위로의 편지를 써야겠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싸움이지 않느냐고. 우리는 많은 아픔의 관문을 통과하여 오늘에 이르렀지 않느냐고. 지금 그대가 앓고 있는 아픔 툭툭 떨쳐버리고 쾌유하라고.

편지봉투를 붙여놓고 차를 마신다. 가을에 마시는 차는 남은 삶의 길을 가르쳐주고, 깨달음의 길목을 가르쳐준다. 나는 아직 더 살아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재로 가서 내 글을 써야 한다. 사실은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준비라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