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천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천재가 됐다”
“나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정말이 지 내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것을 보았지요. 오래 가지 않을 게다 하고 지켜보았더니 계속 그렇게 매달립디다.
그이는 한번 작심하면 어떤 일도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너는 천재다’ 라고 했지요. 내가 천재라는 말을 자꾸 했기 때문에 그이가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그이가 줄기차게 공부하는 걸 보고‘너는 천재다’라고 했을 뿐이지요.”
(권도홍 엮음,<손정의 이야기>에서)
재일교포인 손정의(50) 소프트뱅크 사장의 부친인 손삼헌은 아들 손정의를‘그이’라고 부른다. 흔히‘그이’라고 하면 아내가 남편을, 여성이 사랑하는 남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데 아들을 두고 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손삼헌이 그렇게 부른 것은 아들 손정의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고 한다. 할머니 일로 부자간에 사소한 언쟁이 벌어졌는데 손정의가 아버지 옷을 거머쥐더니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놓아주지 않아 급기야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울면서 말하자 겨우 놓아주었다. 아버지는 그때 아들의 얼굴이 5미터 정도 되는 큰 바위 덩어리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에 아들 손정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늘 밝고 긍정적이었으며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손삼헌은 아들이 늘 정의롭게 살아가라는 희망을 담아 그에게 ‘정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보통 사람과는 뭔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데 가치를 심어 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의도는 아들 손정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독특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아버지의 창조적인 면도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특히 손삼헌이 손정의에게 한 ‘너는 천재다’라는 말이 오늘날 손정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 자녀에게 “우리 아들 천재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교육심리학적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검증됐다. 그게 바로 ‘로젠탈 효과’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이다. 심리학에서는 타인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하려고 노력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심리학에서는 교사의 관심이 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충족적 예언을 교육심리학적으로 검증한 게 바로 로젠탈 효과다.
자기 충족적 예언은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부모의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 보다 자신감과 리더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손삼헌이 로젠탈 효과를 알고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말 한마디가 아들에게는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마법의 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폭적으로 믿고 칭찬 아끼지 않아
손정의는 4형제 중 둘째로 일본 사가현 도스시의 한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으로 번지조차 없는 동네였다. 손정의의 할아버지 손종경은 고향 대구에서 18살때 규수로 건너가 탄광 일을 거쳐 소작농으로 살았다. 손정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한 판자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손정의는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 찌꺼기를 모았는데 이것을 가축의 사료로 사용했다.
손삼헌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생선 장사부터 술장사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중에는 빠친고 사업에 이어 요식업과 부동산에 손을 대 경제적인 기반을 다졌다. 맨손으로 시작해 집안을 일으킨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가 평생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소년 손정의는 언젠가 반드시 출세해서 식구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손정의는 기타큐수시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때부터 공부에 열을 올렸다. 정의는 공부뿐만 아니라 조립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한때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기도 했다. 창의력이 풍부한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너는 천재야’라고 말해주었다.
“너를 보고 있자니 네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넌 일본에서 최고야. 반드시 위대한 인물이 될 거야.”
세상에 자식 자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지만 손삼헌은 팔불출의 극치였다. 손삼헌은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과장된 몸짓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새 손정의는 아버지의 마법에 걸린 듯 자신은 천재 이고 대단한 인물이 될 것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난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일을 할 수 있어. 난 정말로 천재일거야.’
일단 뭔가 한 가지를 믿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던 손정의는 일단 입에 담은 말은 어떻게든 밀어붙였고 한번 마음속에 결정하면 끝을 볼 때까지 추구하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한 적이 없지만 정의의 성적은 늘 좋았다. 보통 아이와는 뭔가가 달랐던 것이다. 손삼헌은 “아들이 갈수록 달리 보였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아버지에게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
일본인들의 멸시 속에서 무지렁이로 살아왔던 손삼헌의 한 맺힌 바람은 무엇보다 아들 4형제가 출세하는 일이었다. 특히 남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외곬이었던 정의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었다. “이 아이는 나만의 자식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키워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늘 생각했다.
정의가 야하다시에 있는 중학교 1학년1학기를 마치자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대뜸 이사를 가겠다고 말했다. “정의가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야하다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규슈에서는 후쿠오카라야 한다”며 이사를 가자고 선언했던 것이다.
일본판 맹모삼천지교 실천
그때가 집을 새로 지은 지 3년밖에 안되었다. 손정의를 비롯한 온가족이 반대했다. 그러나 손삼헌 역시 한번 작정하면 실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결국 가족은 모두 후쿠오카로 이사를 했고 손정의는 하카다의 조난(城南)중학교로 전학했다. 그 중학교는 후쿠오카시 사와라구에 있는 명문 슈유칸고교에 많은 학생을 진학 시키는 곳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버지가‘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한 셈이다. 이것만 봐도 당시 손삼헌이 손정의에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정의는 전학온 지 1년 만에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그와 맞서 출마한 상대후 보는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는데 주머니 속에 마르크스의 저서를 넣고 다니는 과격한 이론가였다. 이념적인 리더가 되고자 했던 상대후보에 비해 손정의는 실용적인 리더를 내세웠다. 손정의는 학교에 문화제를 개최하고 타교와 교류를 기획하는 등 학교생활을 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이념보다 실용 노선을 택한 그가 선거에서 이겼는데 이때 손정의는 결국 실용이 이념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게 그가 벤처 업계의 풍운아가 된 작은 계기였다. 전학 온 지 1년밖에 안되는 데다 인맥도 없는 그가 학생회장에 당선된 것은 어쩌면 앞으로 전개될 손정의의 삶의 ‘복선’이 아닐까.
손정의는 16살 때 고교를 중퇴하고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교 1학년 때 영어 연수를 위해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 갔는데 그게 그의 인생을 뒤흔들어놓았다. 그곳에서 그는 터질 듯한 자유분방함을 느꼈다. 일본처럼 폐쇄적이지 않고 외부 사람에게도 개방적이었다. 나이든 사람들도 젊은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더욱이 버클리대의 도서관은 문을 닫을때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아! 그래서 버클리대의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이로구나’ 하고 손정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버클리대는 미국에서 자유분방함이 두드러진 ‘천재들의 소굴’로 통한다. 미국인들은 버클리대의 위대함을 괴짜들의 폭발하는 천재성에서 찾는다. 아버지로부터 천재소리를 듣고 자란 손정의는 미국의 천재들과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을 게다. 손정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한다.
“도쿄대에 들어가 정치가가 되라는게 아버지의 기대였지만 재일 한국인으로는 어렵다.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서 1등이 될 수 있는 분야는 사업의 세계뿐이다. 일본보다 앞선 미국에서 열심히 배워서 미국 정상급의 실력을 기르자. 그렇게 하면 일본에서도 정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역사에 남는 일을 하고 싶었다.”
4주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중대 결심’을 한 채 귀국한 손정의는 부모님에게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그러나 버클리대로 유학을 가려는 손정의의 계획은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더욱이 당시 아버지가 건강이 아주 나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입원중인데 어쩌자고 너 혼자 집을 떠나려 하느냐며 아들의 미국행을 울면서 말렸다.
“병 때문에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두고 어째서 네 생각만 하는 거니.”
“네가 떠나면 어머니가 외로워할 거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가족이 이토록 고생하고 있는데 너만 혼자 미국으로 떠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어머니와 형제들의 만류와 비난이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손정의였지만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마음속으로는 크게 갈등을 하고 있었다. 손삼헌은 건강이 더욱 악화된 상태였다. 이때 그에게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가 문득 떠올랐다. 이 소설은 그가 존경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같은 삶을 그리고 있다. 료마는 일본의 봉건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의 초석을 놓은 정치가이자 협상의 귀재로서 근대화의 횃불로 일본인들은 평가한다. 보수적인 일본의‘번주(藩主)’제도에 환멸을 느낀 료마는 스스로 탈번(脫蕃)을 택한다. 당시에 탈번은 엄청난 중죄였으며 친척에게까지 처벌이 미쳤다. 결국 료마는 막부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32살에 삶이 끝난 료마는 지사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맨으로도 탁월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성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한 발상과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설득력과 인간적인 매력, 적극적으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추구하는 벤처정신은 현대의 일본 경영자들이 입을 모아 찬탄하는 료마의 장점이다. 예컨대 료마는 일본인 최초로 허니문을 다녀왔고 웨스턴부츠를 신을 만큼 개방적이었다.
손정의는 료마를 역할 모델로 삼고 그를 본받으려고 애썼다. 한 번뿐인 인생을 료마처럼 멋지게 살고 싶었다. 만약 지금 미국행을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의 앞날은 암담해보였다. 커다란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주위 사람들을 울리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그는 료마를 다시 떠올렸다. ‘가족들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오리라. 지금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돌진해야 할 때다.’ 그는 이렇게 다짐하고 재차 결심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가족들이 반대하는 와중에 제일 먼저 그의 미국 유학을 허락한 것은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손삼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그이가 병원에 찾아와서 미국에 가겠다고 했어요. 그이는 한번 작정하면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일
년에 한 번은 꼭 돌아오라, 미국 여자하고는 결혼하지말라, 결혼은 동양계 여자하고 하라’는 조건만 달아 허락했지요.”
끝없는 도전으로 일본 최고부자 등극
미국 유학은 손정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그는 이미 19살 때 인생 설계를 마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나 데이트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손정의는 나이의 의미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생각했다. 미국 유학 때 결심대로 버클리대에 들어간 그는 3학년 때 보통 학생들이 상상도 못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게 바로 유명한 손정의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업을 일으키고 이름을 떨친다. 30대에는 적어도 1000억엔의 자금을 모은다. 40대에는 인생 최고의 도박, 즉 커다란 사업을 일으킨다. 그리고 50대에는 사업에서 큰 성공을 이루고, 60대에는 다음 경영자에게 사업을 물려준다는 원대한계획이다.
현재 손정의는 이 계획대로 나아가고 있다. 25살인 1981년에 PC용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한 뒤 포털 사이트 ‘야후 제팬’ 운영으로 사업 기반을 마련해 큰돈을 벌었다. 현재 50대에 진입한 그는 일본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다. 월간 <포브스> 일본판이 발표한‘일본의 30대 부자’ 명단에 의하면 손정의는 2007년에 1위(2006년 9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2000년 1위에 오른 뒤 정보기술(IT) 거품 붕괴로 순위가 급락했다가 7년만에 정상을 되찾았다. 재산은 6960억엔(약 5조5000억원). 손정의는 2006년에 영국 휴대전화 업체인 보다폰 일본 법인 인수를 계기로 휴대전화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손정의는 자신의 역할 모델이 된 료마처럼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벤처정신으로 무장한 비즈니스맨으로 통한다. 결국 ‘너는 천재다’라는 손삼헌의 예언은 적중했다. 손정의는 비록 재능이 탁월한 천재가 아니었을지라도 아버지의 그 믿음이 그를 천재로 만들었다. 아이디어로 무장한 벤처 기업가 손정의는 아버지의 믿음과 자신의 당찬 의지가 일군 현대판 영웅 신화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