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제주지방법원에서 제사와 벌초의 약속을 안 지키면 상속받은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이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부모가 자식에게 제사·벌초 등의 조건으로 대지와 주택, 부동산을 증여한 것은‘부담부 증여’에 해당한다며‘조건부 증여’인 만큼 그 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상속 재산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최근 부자들 사이에서 이 같은 ‘조건부 증여’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생전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증여하자니 증여세 부담도 걱정이지만 자녀의 사치와 무능력, 불효 등에 대한 불안감이 부자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 또 사후 상속 시에는 상속세 부담과 더불어 상속인간 재산 분쟁이나 배우자의 여생에 대한 우려도 크다.
이 같은 불안 요소를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조건부 증여’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재산 증여 계약 시 효도와 성실 등 자녀의 이행 의무를 부여해 위반 시 계약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증여 받은 자손이 불효한다면?
‘조건부 증여’는 ‘부담부 증여’의 일종이다. 증여는 무상 계약이므로 수증자가 어떤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증여 계약에서 수증자가 일정한 부담을 지는 것으로 약정할 수 있고, 이것이 ‘부담부 증여’인데, 민법은 이를 ‘상대 부담 있는 증여’라고도 부른다. 부담 있는 증여이기에 수증자는 약정되어 있는 조건을 지켜야만 원하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90세인 김기동(가명)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없이 딸만 두고 있어 자신과 할머니의 부양과 선조의 제사 봉행을 해 줄 것을 조건으로 14년 전 자신의 조카의 아들에게 그 소유 토지를 증여하고 소유권이전등기를 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그 후 수증자가 할아버지 내외를 부양하지 않자 위 증여 계약을 해제하고 소유권이 전등기의 말소를 청구했다. 김기동 할아버지는 수증자의 부양 의무의 불이행을 이유로 증여 계약을 해제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부담부 증여에 있어서는 쌍무 계약에 관한 규정이 준용되어 부담 의무 있는 상대방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때에는 비록 증여 계약이 이행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하여 할아버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 증여 행위는 상대 부담 있는 증여로서 부담부 증여에 해당한다 할 것이고, 부담부 증여에는 민법 제561조에 의하여 쌍무 계약에 관한 규정이 준용되므로, 상대방이 부담의 내용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부담부 증여를 해제할 수 있다.”(대판 1996.1.26, 95 다43358)
세금뿐 아니라 재산 상속 전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부담을 주는 조건부 증여보다는 생전 신탁이 보다 철저하고 계획적이다. 조건부 증여는 조건이라는 구속이 있기는 하지만, 소유권의 완전 이전과 취·등록세 등 증여로 인한 각종 세금이 발생하고, 상속 문제는 별도의 유언서 등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나 생전 신탁은 이 모두를 포함하여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하여 준비해 둘 수 있는 것이다.
‘생전 신탁’은 재산 소유자 본인이 원하는 내용으로 생전에 신탁을 설정하는 것이다. 생전 신탁의 중요한 장점은 자신의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자기 대신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게 안전하게 재산의 관리를 맡길 수 있고, 특히 유언서를 대신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사후에 자기 재산의 분배에 대하여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57세인 이영수씨(가명)는 어머니와 4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본인 및 형제자매는 주택과 직장생활로 인한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다. 문제는 80세의 어머니가 현재 지가가 계속 상승 중에 있는 약 50억원 상당의 경기도 신도시 주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서로 욕심을 내고 있어서 어머니가 언제 누구에게 증여할지, 어떤 내용의 유언서를 작성할지 서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데 있다.
형제들이 호시탐탐 부모의 재산을 노린다면?
이영수씨가 바라는 것은 형제자매의 협의에 의하여 어머니 생존시까지는 어머니의 명의로 보존하고, 형제자매의 어느 누구도 어머니로부터 일방적으로 유리한 생전 증여를 받거나 유증을 받지 않는데 있다.
이러한 이영수씨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단 유언서 작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유언서의 작성은 언제든지 변경 또는 철회할 수 있으므로 유언서 작성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또한 생전 증여하는 것은 어머니의 지위 면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 경우 어머니를 위탁자, 자녀를 공동 수익자로 하고, 수탁자는 자녀 중 두명으로 하는 생전 신탁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생전 신탁을 설정하게 되면 모든 수익자의 동의가 없을 경우, 한 자녀가 어머니를 설득하여 부당히 많은 재산을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박영준씨(65·가명)는 얼마 전 하나밖에 없는 아들 박기수씨(35·가명) 내외가 이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결혼 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더니 결국 헤어지기로 했다. 둘 사이에 현재 7세, 4세인 아들과 딸이 있다. 박영준씨의 고민은 몇 년 전 아들에게 이미 증여한 아파트와 토지가 있는데, 아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손자녀에게 상속되고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모든 재산 관리를 며느리가 할 것이라는 데 있다. 또한 아들 이혼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재산 낭비가 심해서 본인의 힘으로 재산 관리가 어렵다는 판단이다.
박영준씨는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아들의 재산을 아들인 박기수씨가 위탁자, 아버지인 박영준씨가 수탁자, 그리고 박기수씨가 수익자로 하는 생전 신탁을 설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만약 불행하게도 박기수씨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는 경우에는 손자녀에게 상속하되 그들이 각각 30세가 되어야 완전히 소유권을 취득하고 그 전에는 학비, 생활비 등 기본적인 금액만 지급되도록 설정하였다. 물론 그 때에도 수탁자는 아버지인 박영준씨가 되며, 이혼한 처는 자녀의 재산 관리권을 갖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