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받고 동시에 두려움도 받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얻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굳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사랑을 받은 것보다는 두려움을 받은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의 이 말은 인간의 속성을 정확하게 갈파한 명언으로 회자된다. 마키아벨리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 안전하다” 면서 인간적 통념을 전복시킨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특히 ‘사랑’보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사랑으로 신하를 대하면 정작 군주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신하들은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자인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협을 피하고 이득에 눈이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문한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만들되 미움을 받지는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군주란 미움을 받지 않고 두려움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피렌체의 신생 군주인 메디치가에 올린 신생 군주의 처세술이다. 신생 군주가 어떻게 신하를 통솔하고 국가를 정비하여 5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왕국의 기초를 쌓을 수 있는가를 설파한 책이다. 여기서 먼저 강조하는 게 군주의 덕목으로 사랑보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신생 군주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이 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고의 거부이자 최고 악당으로 꼽히면서도 최고 자선가로 꼽히는 록펠러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영국의 버틀런트 러셀은 “현대를 만든 사람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두 사람으로 경제에서는 록펠러, 정치에서는 비스마르크를 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록펠러는 악동과 자선가의 야누스와 같은 존재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수성가했지만,근검절약 정신으로 일관
록펠러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한 이래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세계 최고의 부자로 통한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의 가치로 따져서 빌 게이츠의 3배에 달한다고 한다. 빌 게이츠가 570억달러이므로 1500억달러라는 계산이 나온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는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독점하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로 군림했다. 1870년 설립한 스탠더드석유회사는 석유 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립해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독점의 주도적인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는 석유 왕, 세계 최고 부자, 자선가 등으로 현대사를 장식했다. 검은 돈으로 무자비하게 기업사냥에 나서기도 하면서 독점체제를 구축한 록펠러는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반(反) 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회사의 해산명령을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이때부터 록펠러의 진면목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5000만달러를 기부하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록펠러재단을 비롯해 록펠러의학 연구소 등을 설립하였다.
록펠러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억만 장자가 되었지만,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근검절약 정신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생 철저하게 회계장부를 썼으며, 수입을 온전히 계산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뒤에는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 부서에 직원을 40명이나 둘 정도였다.
무자비한 기업사냥과 함께 석유의 독점체제를 구축해 냉혹한 자본가의 전형인 록펠러. 아울러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최고의 자선가로도 꼽히는 록펠러의 야누스적 얼굴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아들에게도 악당 같았던 아버지였다. 잔인하고 냉혹한 자본가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이 된 것은 바로 아버지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1810~1906)의 영향이 컸다.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존 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록펠러는 미국이 무서운 속도로 자본주의의 모험적 드라마를 펼치며 초강대국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던 무렵 리치포드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록펠러는 격동의 시기인 골드러시(gold rush)와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성장했다. 엄격한 청교도적 정신으로 신앙심이 깊었던 록펠러의 어머니는 “무절제한 낭비야말로 비참한 가난을 부른다”며 그에게 검약과 신용의 중요성을 심어주었다. 화가 났을 때도 행동에 절도가 있었고,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었다. 반면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는 현실의 냉혹한 원리를 가르쳐주었다. 어머니가 선한 인간의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면 아버지는 어쩌면 악당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게 록펠러에게 탐욕스런 자본가이자 최고의 자선사업가라는 야누스적 인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즉, 록펠러는 무례하고 비도적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지만 원칙적이고 청교도적인 어머니의 생활방식을 흡수해, 사업가로서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기질을 발휘했고 자선가로서는 어머니의 절제되고 도덕적인 기질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리치포드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방랑벽이 있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소금이나 목재, 모치, 말 등을 팔기도 한 ‘만물 장사꾼’이었다. 윌리엄은 동네 사람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사거나 돈을 빌렸고 그것으로 몇 달씩 집을 비웠다. 윌리엄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약장수를 하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이들에게 치료도 해주는 등 돌팔이 의사로 통했다. 한마디로 속임수와 위조에 능했고 넉살 좋은 인물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뺨에 키스를 하며 손에 금화를 쥐어주곤 했다. 어린 아들에게 돈의 감각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26살 때에 윌리엄은 장사를 나서 리치포드 인근의 부유한 농장주인 존 데이비슨의 집에 들렀다 그 집 딸에게 반해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이때 존 데이비슨의 막내딸은 아버지의 결혼 허락도 없이 결혼식을 강행했다. 한마디로 넉살좋은 청년에 홀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작은 사발 큰 접시로 바꾸는 법’ 가르쳐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정적인 세상의 이치부터 먼저 가르쳤다. 존이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손을 뻗어 아들을 잡아주는 척하다가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어린 아들은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일으켜 세우며 “아무도 믿지 마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도 믿어서는 안 될때가 있다. 알겠니?”라고 말해주었다. 어린 존이 물론 이 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을 테지만 아버지는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세상의 냉혹한 법칙을 일깨워주려고했다.
아버지는 존이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자 존을 데리고 도회지의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록펠러는 시골마을과 같은 미국이 현대적인 국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은 현실 원리에 능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또 장터에서 직접 흥정하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작은 사발을 큰 접시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면서 무슨 거래를 하든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들을 곧잘 속이곤 하지. 난 아

이들이 영악해졌으면 좋겠어.”
윌리엄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그는 늘 아이들에게 사회가 냉혹한 정글이라는 것을 일깨우려 했다. 물론 윌리엄이 늘 아이들에게 현실적인 세속의 법칙을 가르친 것만은 아니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장남인 존을 비롯한 세 아들에게 승마를 비롯해 사격, 수영을 가르쳤다. 호수에 나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과 담배를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존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3남3녀를 둔 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기금을 모아 학교를 짓는데도 앞장섰다. 교실이 하나뿐인 학교였지만 어린 존은 매일 학교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윌리엄은 저녁에는 갈대로 만든 작은 오르간인 멜로디언이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아이들과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현장학습’ 덕분에 아주 현실적인 소년으로 자랐다. 7살 때에는 칠면조를 키워 이웃집 농부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돈을 모아 그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도 했다. 14살 때 항구도시인 클리블랜드에 살게 되자 교역으로 북적이는 항구에 자주 들르곤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고 도시로 나가 세상 물정을 익히게 했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의 미래를 그리곤 했다. 한번은 친구가 장래 계획을 묻자 대뜸 “나는 10만달러의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난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존은 10만달러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늘 가슴속에 되새겼다.
록펠러는 고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대학을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돼 이곳저곳을 이사 다녀야 하는 등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대신 그는 오랫동안 꿈꾸던 사업가의 길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존은 철도 회사, 은행, 도매상 등 전망 있고 규모가 큰 직장을 찾아다녔지만 사무직이나 관리직은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곡물 위탁판매 회사인 휴이트 앤드 터틀사에 취직해 경리일을 보게 됐다. 그는 첫 직장을 잡은 날인 9월26일을 평생 기념하며 성조기를 내걸 정도였다. 매일 아침 6시30분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할 정도로 직장에 열심이었지만 돌아오는 임금은 터무니 없었다.
“지금 세상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히 내가 해야만 할 큰일이 다가올 것이다.”
특이한 점은 록펠러가 아버지 집에 살면서 집세를 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새 집을 짓자 그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 대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세를 받았다. 악당다운 아버지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업자금을 빌려준 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회사가 연봉을 600달러에서 더 올려주지 않자 록펠러는 회사를 그만두려다 내친김에 사업을 시작하려고 결심했다. 그때가 20살을 앞둔 무렵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동업자가 각각 2000달러씩 투자해서 회사(클라크 앤드 록펠러사)를 차리자고 제의했는데, 그에게는 고작 800달러가 있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돈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물론 그저 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조건을 달았다. 21살이 되는 1년6개월 후에 원금과 함께 이자 10%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의 이자라면 높은 것이어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고리대금과 같았다. 하지만 록펠러는 군말 없이 아버지의 제의에 동의했다.
아버지 윌리엄은 아들에게 악당과 같았지만 그것은 아들을 큰 사업가로 길들이기 위한 계획적인 ‘훈련’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자신의 아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해야만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들놈들을 골탕 먹이곤 했지. 힘들게 만들면 녀석들은 그걸 기회로 훌쩍 더 성장한단 말씀이야.”
그런데 아버지는 좀 변덕스럽게 아들을 시험했다. 아들이 돈이 아쉬울 때를 골라 뜬금없이 원금을 변제하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아들은 갑자기 돈을 만들기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즉시 돈을 갚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상인은 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근본정신에 투철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이자는 항상 10%였다. 회사를 키워서 자립할 때까지 아버지가 몇 변이나 그런 식으로 괴롭혔지만 아들은 군말 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록펠러는 후에 자서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정도의 가벼운 훈련은 내게 재정 능력을 키우는 좋은 약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시험할 때마다 솔직히 기분은 그렇게 좋지 않았죠.”
록펠러는 자신의 치밀한 성격을 최대한 발휘해서 상품의 구매와 판매 등 영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업 첫해에 4400달러, 다음해에 1만7000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이는 후에 록펠러가 석유 왕이 되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출발이었다. 물론 록펠러의 성공이 그 자신의 노력에 힘입은 바 컸지만 아버지의 ‘현장교육’은 록펠러를 냉혹한 자본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사랑보다 신생 군주의 덕목처럼 두려움을 주는 존재, 그렇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당’과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탐욕스런 자본가의 상징이자 아울러 자비로운 자선사업가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무능했지만 현실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