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에서 북 200리쯤 되는 곳에 태백산이 있고, 산 밑에 내성, 춘양, 소천, 재산의 네 마을이 있다. 모두 깊은 두메인데, 두메 백성들이 모여 산다. 병란과 세상을 피해 살 만한 곳이다’고 하였던 고장이 봉화다.

태백산, 청옥산, 문수산, 비룡산, 삼동산 등으로 둘러싸인 봉화는 전체 면적 중 82%가 산이라니 택리지에 오른말이 맞는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병자호란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서울을 떠난 다섯 명의 선비가 함께 터를 잡고 교류한 곳이기도 하며,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의분을 삼키며 벼슬을 사직하고 국운을 기원하던 선비가 있는 고장이며.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의 무기고를 불태우려는 의병이 끊임없이 봉기하던 곳이 봉화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3대 오지로 불리던 봉화는 서울에서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이제는 가까운 곳이 되었고, 오지라는 이름을 차츰 벗어나고 있다. 관직을 버리고 야로 찾아든 양반이 많았던 고장인 만큼 정자가 많고 수백 년을 이어온 종택과 고택이 많아 경북 내륙의 유교문화권을 대표하는 곳으로서, 전통과 유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고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봉화의 대표적인 양반가에서 세월을 잠시 멈춰 보는 가을의 하루도 한번쯤 계획해볼만하다.
집안 유물 400점이 보물인 충재 권벌가의 종택과 청암정
우리나라에서 양반 고을이라고 하면 안동이고, 안동에 서는 안동 권씨가 유명하다. 그 안동의 권씨를 대표하는 집안이 바로 충재 권벌 집안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숱한 사화 속에서도 꿋꿋한 절개를 지켰던 충재 권벌은 중종 때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닭실마을은 영남의 4대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4대 명당은 풍산 류씨가 사는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가 사는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함께 사는 경주 양동마을, 안동 권씨가 사는 봉화 닭실마을을 일컫는다. 이 네 곳 중 닭실마을만이 사적 및 명승 제3호(내성유곡 권충재 관계유적)로 지정되어 있다. 닭실마을이란 암수 닭 두 마리가 날개를 펴 알을 감싸안은 금계포란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 되어 내려와 이룬 마을이며, 마을 전체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지나는 소리만 들려도 아무나 보고 할매 할매라고 부르면 되고, 비가 올 땐 집 추녀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는 양반 마을이었다고 한다. 한마을이 친척이다 보니 지금껏 마을의 모든 일들이 한집안 일처럼 치러지고 그래서 유명하게 된 것이 닭실마을 한과이다.
임금으로부터 불천위 제사를 허락받은 명문가로서 그 많은 종가의 제사를 위해 준비하던 음식이다. 한과라는 것이 일주일을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인데 낮에는 살림하고 밤에는 잠 못 자고 고아내는 젊은 새댁의 고단함이 있는 전통 유과이다.
마을 서쪽 산자락에 안동 권씨 종택과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충재의 종손이 아직도 생활 하며 종택을 지키고 있다.
종택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바로 앞에는 기단이 낮은 사랑채가 보이고, 그 뒤로 ‘ㅁ’자로 배치된 안채가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2000평에 이를 것이라는 종택은 99칸 양반 집의 위세가 어떠한지를 실감하게 한다.
봉화에 오면 꼭 들러야 한다는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생긴 그대로 이용하여 기둥을 세워 지었는데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어 고 기둥 길이를 조정해서 지었기 때문에 보는 위치에 따라 건물 높이가 다르게 보인다.
올해에는 충재유물박물관이 새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집안의 유물이 480여 점 전시되어 있는데 충재일기(보물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연산일기, 500년 된 과거시험 답안지, 집안 재산 분재기 교서 등 보물 5점외 고문서 4901점 등 집안의 유물이라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6·25전쟁 때는 땅속에 항아리를 묻고 그 책과 유품을 숨겨 보관했을 정도로 500년 역사를 가진 후손의 노력도 눈에 선하다.

1878년(고종 15년)에 지어진 만산고택(晩山古宅)은 아직도 사람이 생활하는 ‘살아 있는’ 집으로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백기 씨가 5대째 살고 있다.
만산(晩山) 강용 선생이 지은 집으로, 춘양목으로 지어진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당당한 한옥집이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국운회복을 기원하며 말년을 보내던 집이라고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입구(口)자 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당 왼쪽으로 2칸짜리 서실이 보인다.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글씨는 영친왕이 썼다고 한다. 이렇듯 유서 깊은 유물이 많다 보니 고택에는 유물을 지키려는 종손들과 그것들을 탐내는 불청객이 함께 신경을 곤두서고 있다.
어느 해 노모만 있는 집에 그것도 대낮에 낯선 불청객들이 들어 집안의 유물들을 들어냈다고 한다. 그것을 힘이 없어 눈뜨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던 노모는 그 충격으로 크게 앓으셨다고 한다. 그후 유물을 잃지 않고 사람도 다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많은 집안 유물을 박물관 등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가옥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우리 고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한다.
정면 11칸의 긴 행랑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 서쪽에 사랑채와 안채가 접하여 입구자 형을 이루고, 좌측에 서실을, 우측에 별도의 담을 돌리고 별당을 지어 사대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간은 정면을 피하고 측면에서 꺾여 들어가는 구조다. 큰 대문을 들어서 마주 보는 바깥사랑과 그 뒤 안 의안채로 들어가는 곳에는 안주인

이 좋아한다는 야생화가 곱게 피어 있다.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칠류헌과 서실
마당 오른쪽에 자리한 별당 ‘칠류헌’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집으로 왼쪽에는 광이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과 대청이 연결되어 있다. 곱게 길들여진 마루와 칠류헌을 떠받치고 있는 춘양목의 은은한 붉은빛 아름드리 대들보가 고풍스러움과 품격을 느끼게 해준다. 칠류헌 마당에는 나무도 많았는데 담정리를 하면서 정리를 하여 지금은 나이 든 호두나무 한 그루만 해마다 한 가마씩의 호두를 내놓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절로 떨어진 호두를 몇 개씩 주울 수도 있다.
옛날에는 글 읽던 서당도 체험객들이 묵어 갈 수 있도록 새로 꾸몄는데, 아궁이에 불을 넣으면 방바닥이 뜨끈한 것이 아버지 밥 묻어두던 아랫목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불 넣는 아궁이에 놓인 가마솥과 그 옆에 놓인 토란대, 그 앞에 자리잡은 대추나무가 가을을 말하는 듯하다. 주인장이 사학을 전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문중을 비롯해 봉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도 있다.
밤이면 마당에 불을 피워 고구마와 밤 등을 구워 먹을 수도 있다. 옛것을 지키되 찾아오는 요즘 사람을 위해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실을 불편하지 않게 새로 지어 두었다.
서벽리금강송 춘양목
시월의 금강소나무숲은 소들의 웃음소리가 난다.
1.5km를 걸어 천천히 숨을 아껴가며 걷는 동안 소들의 울음이 들리는데 그 소리가 울음소리라 하기엔 즐거운 합창처럼 맑고 경쾌하다. 대체 이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왜 이리 소들이 소리를 내는 거지? 라고 궁금해하던 중 소나무에 북어를 하얀 줄로 묶어놓은 것이 보인다. 간벌을 위해 산에 제를 올린 흔적이다. 소나무를 베어내는 톱질 소리가 그렇게 살아 있는 소 웃음소리 같다.
금강송은 춘양면에서 많이 나고 거래가 된다고 하여 춘양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고, 껍질이 붉어서 적송이라고도 한다. 안동의 세도가나 서울의 반듯한 양반가와 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건축에도 널리 쓰인 나무가 봉화 춘양목이다. 유달리 곧게 쭉쭉 자라고 껍질

이 얇고 나뭇결이 곱고 부드러우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고 속살이 붉은빛이나 노란빛이 나고, 대패질을 해놓으면 윤기가 돈다고 한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잘생긴 소나무숲
목재로 쓰이려면 적어도 50년은 된 것이라야 한다. 옛날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고 고갯길이 험해 옮기기가 쉽지 아 해마다 베어내도 충분히 나무를 댈 수 있을 만큼 잘 보존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부터 아예 제재소가 들어서 베어내기 시작하고, 6·25전쟁 앞뒤로 군용차가 마구 실어냈다고 한다. 지금의 서벽리 금강송숲은 마구 베어내던 시기에 어려서 살아 남은 소나무라고 한다.
서벽리 금강소나무숲은 1974년 채종림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에서 키운 종자로 금강송 묘목을 키워 전국 산에 심었다. 전국 금강소나무의 산실인 셈이다.
2001년부터 궁궐이나 사찰 등 문화재 보수복원을 위한‘문화재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되면서 나라로부터 특별 관리를 받으며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오다가 일반에 개방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았다.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 ‘서벽리 금강소나무숲’은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나만의 비밀정원이 기꺼이 되어주는 곳이라고나 할까. 국유림관리소에서는 ‘숲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화로 예약하면 ‘숲 해설가’가 오전 10시~정오, 오후 2시~4시 두 차례 금강소나무숲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설명해준다. 길이 1.5㎞산책로를 천천히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린다.
소나무 밑에는 그곳에서 자라는 산수국, 동자꽃 등 야생화가 있는데 이름표를 달아두어 누구나 쉽게 야생화를익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