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두 나라를 들라면 유럽의 독일과 아시아의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세 나라라면 베트남이 포함된다). 유럽의 독일은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때까지 존속됐던 나치주의의 악령이 1960년 이후 신나치주의의 이름으로 환생하면서 여전히 타민족들에 대한 우월감을 과시하고 있다.
독일인들에게 신나치들의 무분별한 폭력과 이에 대응하는 소수민족, 대표적으로 터키인들의 보복 폭력은 결코 낯설지 않다. 어제까지 필요해서 불러들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적으로 증가하자 이제는 도리어 나가라는 게 사건의 초점이다. 독일의 뒷골목마다 붙어있는 외국인 차별 금지에 관한 빛바랜 포스터는 이들의 ‘외국인 차별’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지 단적으로 알려준다. ‘당신이 먹는 오렌지는 스페인에서 왔습니다. 당신이 마시는 물은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당신이 먹는 국수는 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 당신이 입는 청바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당신은 외국인을 혐오하십니까?’
특히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르완다, 나미비아, 토고 등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을 식민지화한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침묵하며, 결코 타민족을 식민지화한 적이 없다는 듯이 인종적인 우월성과 순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즉, 자기네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적 개방성 수준 낮아
외국인이 살기에 불편하기는 유럽의 독일을 뺨치는게 아시아의 한국이다. 외국의 여러 기관이 조사한 한국인들의 문화적 호환성 혹은 문화적 수용성은 과히 창피한 수준이다. 매년 발표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간 경쟁력 보고서에는 한국인들의 문화간 폐쇄성을 세계 49개국 중 44위권에 올려놓고, 싱가포르의 정치경제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외국인들이 느끼는 아시아 각국의 삶의 질 비교’에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개방성 수준이 베트남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이고, 일전 호주 시드니의 국제정책 두뇌 집단인 로위연구소가 발표한 국별 호감도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전체 15개국 중에 말레이시아, 동티모르에 이어 10위 수준에 머물러 호감 정도가 다소 미온적이라고 평가됐다.
이런 수치에 걸맞게 한국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가공할만하다. 언젠가 한국의 유엔대표부 단장에 흑인이 새로 취임해 왔다. 한국 정부 대표들과 유엔대표부단장을 비롯한 외국 직원들과의 공식모임에서다. 한국의 정부 대표들이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하는 대상은 흑인 단장이 아니라 정식직원도 아닌 백인 인턴사원이었다. 그 이후로 유엔대표부에는 원칙이 하나 생겼다. ‘한국에 대표를 파견할 때는 반드시 백인으로 하라.’
한국과 독일이 ‘다름’에 대한 인식, ‘차이’에 대한 인내가 부족한 데는 ‘단일민족 신화’가 단단히 한몫 한다. 인종적 순수성을 내세워 타민족과의 차별화·우수화를 기하는 단일민족 신화는 더불어 사는 21세기에 인종적 고립과 편견과 오해를 양산한다. 국수주의와 전체주의를 부채질해 결국 세상의 외톨이로 남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단일민족이 아닌 것을 다 아는 데 본인만 모르는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된다.
얼마 전 유엔 인종차별위원회에서 권고했듯이 이제 한국은 구세대의 환상인 단일민족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 사실도 아니고 근거도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유사 이래 끊임없는 침략과 침탈의 과정에서 인종적으로 섞이고 섞여왔다. 시쳇말로 잡종인 셈이다.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면면이 쳐다봐라. 같은 얼굴이 있는가? 혹자의 눈에는 모두가 같다고 비춰질지 몰라도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몰골들이다. 국내 얼굴학 연구의 대가인 한남대 조용진 교수의 전문적인 관점을 빌지 않더라도 간단한 비교는 가능하다. 비록 얼굴색이 비슷할지라도 눈썹과 귀 그리고 귀볼 등이 얇으면 그들은 시베리아 출신의 북방인들이고(추운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키가 작달막하고 대머리 기질이 있고 배가 톡 튀어나올라치면 그들은 몽골의 후예고(제주도를 가보라), 눈과 입이 크고 눈썹과 입술들이 두꺼워 전반적으로 부리부리하게 생겼으면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부터 거슬러온 남방인들이다(일본사람들을 보라). 위의 세 가지 분류 중 딱히 어느 타입이라 말할 수 없으면 완전히 잡종인 셈이다.
단일민족의 신화 걷어내야
타인종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채 기원전부터 자기네끼리 공동체를이루며 살아온 우크라이나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 그 숫자는 매년 급감해 현재는 701명만 남아있고, 그 인원의 80%가 출생 결함(birth Defect)으로 장애를 겪고 있다. 이외의 많은 순수혈통주의자들이나 부족들은 이미 지구에서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단일 민족 신화를 부둥켜안으면서, 이런 전철 밟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꿋꿋이 지난 5000년의 맥을 이어온 한국은 앞으로 더욱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
또 그런 한국적 문화가 한국만이 아닌 세상의 것이 되려면,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더욱 섞여야 한다. 단일민족의 신화를 걷어내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섞이고, 한국과 외국이 섞여야 한다. 이런 퓨전의 과정을 통해 길거리에서 외국인 남자와 팔짱끼고 걸어가는 여성을 편안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소위 ‘튀기’ 혹은 ‘아이노쿠’라는 천한 인종차별적인 칭호들이 우리들의 입 언저리에서 사라지게 되고,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도 않고 반대로 특별히 과공(過恭)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이 대우 하게 된다.
이때쯤 되면 대한민국이 정신문화적으로 21세기에 진입할 자격을 얻게 된다. 21세기가 혈통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시대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획일보다는 다양함이 존중되는 사회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다름’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간주하는 역발상을 품게 된다. 여러 가지로 한 가지를 만드는 세상뿐만 아니라 한 가지로 여러 가지를 만드는 세상임도 알게 된다. 사회의 면면에 다양성이 살아 숨쉬게 되고, 조그만 반도에서조차 전라도 깽깽이나 경상도 문둥이니 강원도 감자바위이니하는 지역별 분권주의(parochialism)도 사라지게 된다. 드디어 인류가 한가족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