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초 미국에서는 첨단 기술과 디자인 경연이 펼쳐진다. 1월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2008CE쇼(Consumer Electronics Show)’와 둘째 주 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되는 ‘맥월드 컨퍼런스와 엑스포(MacWorld Conference and EXPO)’는 바로 ‘총성 없는 전쟁터’다. 전 세계 IT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신제품을 선보이며 사활을 건 싸움이 전개된다. 지난 1월7일에 개막한 CE쇼에서는 2700여 글로벌 기업들이 초고화질 TV, DVD플레이어, 모바일 멀티미디어 분야의 첨단 신제품들을 내보였는데, 14만여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한편, 1월14일에 개막된 맥월드는 이름 그대로 애플의 신제품 발표장인데, 최근 몇년 동안 스티브 잡스가 기조 연설을 통해 깜짝 놀랄만한 신제품을 발표하며 CE쇼에 맞불을 지르고 있다. 금년에는 ‘에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There’ssomething in the air)’라는 슬로건을 앞세워맥북 에어(MacBook Air), 아이폰, 아이팟 터치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타임캡슐(유무선 네트워크 하드 디스크), 애플TV 등이 소개됐다. 맥북 에어는 가장 두꺼운 부분의 두께가 1.93cm인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으로 올해의 슬로건이 바로 이 제품을 겨냥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박람회장은 디자인 경연장

하지만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이 전자 전람회들은 ‘디자인 경연장’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최첨단 제품에는 가전 및 통신 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반영되지만, 정작 소비자들이 그런 제품들과 만나는 접점은 바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제품의 성능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쉽게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디자인은 눈으로 쉽게 식별되는 형태와 색채는 물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용성과 인터페이스 등 가시적인 특성을 만들어준다. 따라서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소비자들을 감동시키는 디자인이 없다면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누가 먼저 고객의 눈길을 사로잡느냐가 승부의 열쇠다.

특히 요즘처럼 기술 수준이 평준화되는 세상에서는 예술적가치가 넘치는 디자인으로 개성이 톡톡 튀는 제품을 만들어야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신제품의 개발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넘치는 디자인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제품은 물론 생활환경에서 조차 예술성을 선호하는 이른바 ‘아티젠(Arti Generation)’ 열풍이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8 CE쇼에서 기조연설을 한 빌 게이츠는 세계 IT 업계가 사용자를 중심에 놓는 두 번째 10년(Second decade)을 맞고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정작아티젠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강조한 것은 다양한 방송 컨텐츠와의 결합으로, ABC와 디즈니(Disney) 컨텐츠가 X박스(Xbox)와 이어질 것이며 NBC와의 제휴를 통해 MS의 다양한 플랫폼에서 비선형적(nonlinear)으로 베이징올림픽을 즐길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MS Live 캘린더, Live 포토갤러리, Live 스페이스, Live 비디오서치 등을 소개했지만, 막상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에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쩌면 가격과 성능 등 합리적인 판단에 치중하는 ‘그저 그런 디자인(mediocre design)’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서류봉투에 넣을 수있을 만큼 얇은 노트북이라는 개념으로 아티젠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맥북 에어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라는 개념이 실감날 만큼 너무 얇아서 부러지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지경이다. 애플 특유의 매끄러운 백색 표면 처리,날렵하고 가벼운 몸체, 외부의 슬롯을 최소화한 간결하고 우아한 외관 등 예술적인 디자인에 힘입어 아티젠을 중심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아티젠들은 단지 세련된 디자인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형태나 색채 등에서 예술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매력이다. 필립 스탁(Philip Stark)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넘치는 디자이너들이 다시 각광을 받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동안 디자이너들 중에는 예술성에 심취돼 상업성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예술가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그랬다.

상업성 없는 디자인 쓸모 없어

하지만 요즘은 크게 변하고 있다. 상업성이 없는 디자인은 쓸모없다는 주장들이 공공연히 펼쳐지는가 하면, 사업가 못지않게 디자인 비즈니스를 잘 이끌어가는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다. 세계적인 조명예술 디자이너인 잉고 마우러(Ingo Maurer)는 “나는 더 이상 상업성을 추구하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와 같은 아티젠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데카르트(Tecart)마케팅이다. 기술(technology)과 예술(art)을 조합한 ‘Techart’의 원래 발음은 ‘테카르트’지만, 프랑스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로 불린다. 데카르트마케팅은 소비자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면 기술은 물론 디자인이 예술적인 경지에 이를 만큼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능이 뛰어난 제품에 유명한 예술가나 디자이너의 감성이 스며들게 하여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동안 우리 기업들은 기술지상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제는 예술성이 넘치는 디자인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먼저 LG전자는 휘센 냉장고에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그림 등을 적용했고, 삼성전자는 앙드레김이 만든 문양을 냉장고 등에 활용하기도 했다. 또 세계적인 명품 업체들과 전략적으로 제휴해 함께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그 결과 작년 CE쇼에서 화제가 됐던 LG프라다폰에 이어 금년에는 삼성 아르마니TV가 크게 각광을 받았다. 크게 번지는 아티젠 열풍에 부응하기 위해 데카르트마케팅이라 불리는 유명 예술가나 명품 업체들과 제조업체들 간의 디자인 제휴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