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부자는 더 이상 빌 게이츠가 아니다. 지금 이 타이틀을 차지한 사람은 멕시코의 억만장자 카를로스 슬림이다. 슬림의 재산은 총 590억달러에 이르며 지금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슬림이 성공한 이야기는 단순히 한 남자가 어떻게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중국, 인도,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급증하고 있는,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모두 갖춘 재벌들 중 하나다. 이들 신흥 억만장자 중 많은 사람은 노련한 기업가다. 그러나 급속도로 성장하는 나라에서 부자가 되는 데에 중요한 것은 기업가로서의 자질보다 정치적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작년 매월 1조원씩 벌어…

총재산 59조원대

빌 게이츠여, 돌아오라. 초기에 세상은 빌 게이츠에대해 약간의 불만을 가졌지만, 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시자가 <포브스>의 세계 최고 부자 리스트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포브스> 리스트 1위는 자본주의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자리다.

빌 게이츠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을 좋아할 만한 여러 이유가 있었다. 빌 게이츠는 스스로 하버드대학 졸업장을 포기했다. 또 컴퓨터를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했다. 컴퓨터만 하는 얼간이가 갑자기 멋진 사람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대부분 빌 게이츠 덕분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최근 몇 년 동안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하나는 빌 게이츠가 보여준 엄청난 자선사업이며, 다른 하나는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안이 되고 있는 애플사다. 빌 게이츠가 <포브스> 리스트의 1위를 차지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사는가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해 주었다. 즉 우리는 지금 아이디어가 핵심이 되는 ‘새로운 경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세상에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데 필요한 핵심은 기술력, 혁신적 아이디어, 지적 자본 등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2007년 여름, 빌 게이츠를 밀어내고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만들어낸 것은 대체 뭐란말인가.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슬림 헬루(Carlos Slim Helu)다. 이 멕시코 재벌의 재산은 590억달러에 이르며,

지난해에는 재산이 한 달에 10억달러씩 불어났다. 슬림의 등장이 상징하는 새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슬림은 독점적 기업 관행으로 오래 전부터 욕을 먹어왔다. 슬림이 오늘과 같은 자리에 오르는 기반이 된 멕시코의 전화 회사 텔멕스(Telmex)는 멕시코 유선전화망의 92%를 장악하고 있다. 슬림의 기업 왕국은 현대 경제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문어발 경영을 하고 있다. 담배 회사에서 항공사에 이르는 다양한 업종에 진출한 그의 기업들은 전깃줄에서부터 바닥 장식재용 타일까지 손대지 않는 것이 없다. 슬림의 재산을 다 합치면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6.6%에 이른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미국 GDP의 0.4%에 지나지 않으며, 최전성기인 1937년의 존D. 록펠러도 2%를 넘지 못했다. 부의 불균형이 흔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 같은 일이 놀라운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라틴아메리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경제의 미래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중국, 인도, 러시아에서 새로운 억만장자들이 등장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악덕 자본가 시대가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인가.

투자와 생산이 신흥 시장으로 옮겨가는 것은 정실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가 세계에 등장하고 있다는 예고인가. 아니면, 슬림과 같은 자본가의 급속한 재산 축적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산되는 긍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일 뿐인가.

그 동안 슬림은 자기가 별로 인기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양, 되도록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행동해 왔다. 그를 만난 사람은 그가 친화력이 있다거나 금욕적이고 심지어 겸손하다고까지 평가한다. 슬림과 같은 독점 자본가에게 세계 최고 부자라는 월계관을 씌워준 데 대해 세상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슬림은 잘 아는듯하다. 그 동안 슬림은 자선사업을 경멸해 왔다. 빌 게이츠 같은 자선사업가에 대해 돈 보따리를 싸들고 다니며 돈을 뿌리는 산타클로스라고 비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그는 스스로를 세계 제일의 자선사업가 반열에 올려둘 만한 계획들을 발표했다.

그러는 한편, 슬림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과소평가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차는 라틴아메리카의 대기업가들이 흔히 선호하는 짙게 선팅이 된 창문에 온갖 보안장치를 갖춘 SUV다. 이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이런 차를 찾는다. 그러나 최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슬림이 로널드 레이건공항에서 렌트한 차는 수수한 포드 세단이었다. 그는 이 차를 혼자 운전하고 다니면서, 사전 통지 없이 경제관계자와 관료들을 불쑥 찾아가 만나고 다녔다. 슬림의 이러한 행동은 몸에 밴 검소함 때문이기도 하다. 빌 게이츠는 수중 음향 장치가 갖추어진 풀이 딸린 6만6000평방피트(약6132m²)의 대저택에 살지만, 슬림은 지난 30년 동안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소박한 집에서 살아 왔다. 더 나아가 그는 외국에 집 한 채 마련해둔 것 없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해 왔다. 지나친 피해의식처럼 보이는 이 같은 언행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자기 재산의 액면가가 시간당 200만달러씩 늘어난다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슬림은 올해부터 익명의 그늘 속으로 숨는 습관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언론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자리도 마련했다. 그는 <포브스> 부자 리스트 1위에 오른이상 대중의 관심을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혹은 은퇴시기가 다가오고 기업들을 자식에게 물려줄 시기가 다 되었으므로 프라이버시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혹은 슬림의 행동에서 자주 나타나는 괴짜다운 변덕의 또 다른 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의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면서 슬림은 자신이 직접 만든 야구 기록표 디자인을 인터뷰 기자에게 내밀었다. 현재 스포츠 면에 실리는 기록표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고 주장한 슬림은, 이 기록표 디자인을 편집 책임자에게 전달하겠다는 기자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슬림이 올 여름에 언론과 만난 방식은 마치 할리우드 스타들의 태도와 비슷했다. 야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미술 수집품을 자랑하며, 아버지로부터 어떤 사업가적 재능을 물려 받았는지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는 뉴욕 양키즈의 팬이며, 로댕의 조각과 르느아르의 그림을 각각 몇 점씩 갖고있다. 그의 아버지 유세프 살림(Yusef Salim)은 레바논 출신 이민자로, 멕시코로 이민 온 뒤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으며, 멕시코 혁명이 한창일 때 상점을 열어 돈을 모았다. 이런 개인적인 일들과 더불어 슬림이 스스로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나는 숫자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어가 언어로 쓰인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숫자가 곧 언어다.”

은둔을 좋아하는 숫자의 천재

그는 금융업자로 성공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업을 싼 값에 사들여, 효과적인 경영을 통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시킨다. 그의 경영철학은 빌 게이츠보다는 워렌 버핏(슬림,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부자로 꼽힌다)에 가깝다. 아닌 게 아니라, 슬림이 지금까지 이룬 성취를 보면 그의 재산은 탐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숫자놀음을 자유자재로 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 슬림은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경쟁자의 목을 조르며 독점을 유지해 왔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0년에 멕시코 정부로부터 텔멕스를 따낼 때에도 전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와의 친분을 활용했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물론 슬림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펄쩍 뛴다.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그 스스로 제일 잘 안다고 자랑하는 숫자다. 슬림은 자신에게 덧씌운 독점 혐의를 부정하면서, 자신과 빌게이츠를 비교한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텔멕스의 시장 지분은 92%로써, 마이크로소프트의 95%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개발도상국 출신이기 때문다른 잣대로 평가되고 있다고 불평한다.텔멕스와 관련한 의혹은 슬림이 이 회사를 지나치게 싸게 불하받았는가 하는 점은 아니다. 슬림과 그의 파트너인 사우스웨스턴 벨, 프랑스 텔레콤은 지배주주가 되는 데 필요한 20% 이상의 지분을 매입하는 데 17억6000만달러를 지불했다. 당시 이것은 정당한 가격으로 평가되었다. 문제는 멕시코 정부가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텔멕스에게 6년 동안 멕시코의 유선전화 사업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당시는 다른 회사들도 유선전화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조처는 지나친 특혜였기 때문에 텔멕스의 민영화가 결정된 뒤 야당인 민주혁명당이 살리나스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할 정도였다. 의회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살리나스의 당이 장악한 위원회는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슬림은 이 모든 논란을 이없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한다. 그는 “텔멕스를 따낸 것은 다른 회사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 주당 8센트 더 높은 값으로 입찰했다는 것이다. 슬림은 기자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통계 숫자를 제시했으며, 이 자료들은 슬림의 세련된 웹사이트인 CarlosSlim.com에도 올라있다.

논란이야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현재 세계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멕시코 경제에서 슬림의재산이 차지하는 몫이 실로 엄청나다는 점이다. 멕시코는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이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 중 하나이고, 미국과 유럽은 물론, 다른 17개 나라와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강력한 제조업 국가다. 이 나라의 기업 중 슬림이 지배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는 222개 이상이다. 이 기업 집단의 최정점에 존재하는 것이 텔멕스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슬림이 단순한 부자에서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있는 거부로 거듭난 것은 텔멕스 인수 덕분이었다. 이 점도 숫자를 통해 들여다보면 잘 알 수 있다. 슬림이 멕시코의 전화 사업을 지배하는 것과 비슷한 규모로 빌 게이츠가 미국의 전화 사업을 지배하려면, 그는 AT&T, MCI, 퀘스트, 스프린트, 버라이존 같은 유수한 미국 전화 회사를 모조리 소유해야 한다. 그래도 미국 전화 시장의 80%정도를 장악하는 데 그친다. 이것은 슬림의 지분 92%에 훨씬 뒤처진다. 또 슬림이 멕시코에서 소유한 그룹과 비슷한 규모로 빌 게이츠가 미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려면, 그는 알코아, 필립모리스, 시어스, 베스트바이, TGI프라이데이, 던킨도너츠, 매리엇, 시티뱅크, 젯블루 같은 회사를 모두 소유해야 한다. 슬림이 멕시코에서 갖는 재산과 비슷한 규모의 재산을 빌 게이츠가 소유하기 위해서는 9090억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숫자 천재인 슬림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천문학적 숫자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릴 때 기대한 것은 이러한 거부의 등장이 아니었다. 동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1990년대에 고통스러운 개혁 과정을 겪은 것은 몇몇의 자본가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면 수많은 부작용이 나타남을 여러 연구가 입증하고 있다. 기술 개발이 늦어지며 대출이 불공정해지고 시장경제가 왜곡되며, ‘빌 게이츠 시대’에 필수적인 기업 관행 대신 부패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예컨대, 슬림이 장악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 대한 멕시코

의 투자는 GDP의 3.1%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일본(7.4%), 미국(8.8%) 같은 선진국에 크게 뒤처지는 것이며, 텔레콤 분야에서 건전한 경쟁체제를 유지하는 칠레(6.7%), 브라질(6.9%) 같은 이웃 나라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다.

기업인 슬림의 성공 비결은 정치

경제 권력자들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게 마련이다. 경쟁을 최대한 억제하거나, 자기네 영역에 새 경쟁자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아예 봉쇄해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한 전화 회사인 본에이지와 스카이프는 2005년에, 멕시코 국민이 이 회사들의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텔멕스가 의도적으로 사이트 접속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텔멕스의 장거리 전화 서비스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텔멕스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반경쟁 관행이 경제 전 영역으로 확대되면, 부자는 극단적으로 더 부유해질 수밖에 없고, 가난한 이들은 기껏해야 상황이 조금 나아질 뿐이다. 세상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것이라는 점은 슬림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이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부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라면 슬림이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단지 기존 제도를 활용하는 데서 남보다 뛰어났을 뿐이다.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사는 최전성기인 1890년대에 미국 시장의 88%를 차지했는데, 이는 오늘날 슬림의 지분과 비슷한 규모다. 또 유에스스틸은 1901년 창업 직후 미국 철강 생산의 67%를 담당했다. 미국경제는 이러한 독점 단계를 지나며 근대적인 경쟁체제를 확립했다. 여기에는 경제를 시장체제에만 맡겨 놓았을때 벌어지는 단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공황도 한몫했지만, 독점을 금지하는 강력한 조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이론에 따르면, 국가가 후원하는 거대 기업군은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이 성장할 기반을 놓게 되며, 이렇게 성장한 중소기업은 결국 거대 기업을 무너뜨린다고 한다. 중소기업과의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은 대기업은 성공을 계속하며 세계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 에어버스, 텔레포니카 드 에스파냐, 대우는 모두 국가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국제적 기업들이다. 심지어 슬림의 텔멕스도 몇 가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멕시코의 전화 사업이 민영화되기 전에는 전화를 새로 놓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소비자들은 전화번호를 판다는 신문 광고를 이 잡듯 뒤져야 했다. 지금 멕시코에서 전화 신청을 하면 며칠이면 가설이 끝난다.

그러나 독점 상황이 비정상적인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과정이 과도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고통스러운 것임은 분명하며, 이러한 고통은 전 산업 분야에 미친다. 텔멕스의 전화요금은 설치비, 매달 사용료, 분당 통화료를 모두 고려하면 아르헨티나의 전화 회사보다 세 배나 비싸고 브라질보다는 네 배나 비싸다. 멕시코 중앙은행 총재인 귈레르모 오르티즈(Guillermo Ortiz)는 만일 멕시코의 모든 분야가 정상적인 경쟁구조 안에 있다면 멕시코의 경제성장률은 지금보다 1%포인트 더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독점구조는 열악한 교육, 저열한 사회기반시설, 탈세 등과 더불어 멕시코 경제가 중국, 인도, 칠레 같은 나라보다 일 년 이상 뒤처진 상황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일자리는 형편없이 부족하며, 수백만 멕시코인은 국경 너머 미국을 기회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좋든 싫든, 슬림의 기업과 같은 개발도상국 대기업들이 존재할 뿐 아니라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에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중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국가에 기반을 둔 세계적 기업은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2006년에는 52개로 늘어났다.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난다. 이들의 힘은 자기네 나라 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브스> 순위 5위인 인도의 재벌 락시미 미탈(Lakshmi Mittal)은 현재 북미 최대의 철강 생산업자로, 철강 공급의 20%를 담당한다. 멕시코의 억만장자 카를로스 잠브라노(Carlos Zambrano)가 소유한 시멕스는 몇 번의 합병을 거치며 세계 최대의 시멘트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1980년대 중반이 회사의 연수익은 3억달러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180억달러에 이른다. 이 회사들과 그 경영자들의 영향력은 그들이 외국으로 내보내는 달러를 따라 세계로 확산된다. 신흥 경제대국에서 나오는 외국인 직접 투자는 2005년에 1330억달러로, 전체 외국인 투자의 17%를 차지했다. 신흥 시장에서 등장하는 억만장자들의 재산도 눈 덩이처럼 불어났다. <포브스>의 2007년 억만장자 리스트에 오른 멕시코 부자 10명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741억달러로, 7년전인 2000년 249억달러의 세 배에 가깝다. 멕시코뿐만 아니다. 억만장자들 재산 총합을 해당국 GDP와 대비해보면, 칠레,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는 멕시코보다 더 심각하다. <포브스>에 오른 인도와 중국의 억만장자 수가 지난 1년 동안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상위 20명의 억만장자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며, 바로 그 다음이 인도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가. 역시 멕시코와 슬림의 경우가 그 시사점을 준다. 작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의 억만장자 중 절반이 1980~1990년대의 민영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덕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아닌 게 아니라, 슬림을 비롯한 이들 억만장자는 사업가로서의 역량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능력 때문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경우 이들의 진정한 능력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놓치지 않는 날렵함과, 경제구조가 급속히 재편되는 상황에서 이익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될 관료나 정치인을 잘 챙기는 인맥 관리 능력이었다. 인도의 미탈은 1990년대 중반부터 옛 공산주의 국가의 철강 회사를 사들이면서, 보잘것없는 철강업자에서 세계적 거부로 탈바꿈했다. 경제 자유화 과정에서 벌어진 혼란과 잡음이 러시아에서만큼 극심했던 곳도 없다. 신흥 경제대국에서 나온 <포브스> 선정 20위 억만장자 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와 미하일 프리드만(Mikhail Fridman)을 비롯한 그들 대부분이,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를 휩쓴 혼란의 와중에 그들 손에 떨어진 석유나 천연가스 회사들을 기반으로 하여 부를 형성했다.

물론 신흥 거대 기업 중에는 오라스콤이나 미탈(지금은 아르셀로미탈로 바뀜), 인포시스처럼 혁신과 경쟁이라는 전통적 방식을 통해 성장한 곳도 적지 않다. 또 세계 모든 곳에서 민영화가 바람직하지 않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급속히 거인으로 자란 많은 기업의 태동과 성장을 보면, 출발점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나라에서 개혁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완결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들은 국가의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혁의 첫 번째 파도, 즉 관세를 삭감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주요 사업을 민영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이다.

지금 상황을 가장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은 1990년대에 저지른 실수의 부산물들을 목격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좀 더 심각하게 현실을 진단하자면, 법치주의가 미약한데다가 재산을 형성하는 데 기업가로서의 능력보다는 정부와의 연줄이 더 중요한 나라들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커버린 거인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오늘날 슬림의 것과 같은 기업 왕국들을 해체하거나, 적어도 좀 더 경쟁체제를 갖추도록 유도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모두가 너무 무력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장경제 시스템에 맡겨두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이 시스템은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도 그 자체로 파행적이 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대상으로 하여 반독점 규정을 적용하는 데에는 10여 년의 법정 다툼이 필요했다. 미국이나 서유럽같이 명색이 '성숙한' 경제체제에서도 그렇다. 비슷한 시도가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슬림 같은 이를 상대로 하여 효과를 낼 것인지는 매우 불명확하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마치 AT&T가 쪼개진 것처럼, 멕시코는 텔멕스를 수많은 작은 텔멕스사로 쪼갤 수 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나라 전체를 간단히 불황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사나이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기사를 위해 특별 인터뷰한 페르난도 엔리케 카르도조 전 브라질 대통령(1995~2003 재임)은 “기적이란 없다”고 단언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여러 조처가 사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규제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제나 반독점 장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정치적 의지와 강력하고 독립적인 사법부가 있어야 한다. 멕시코에서 대기업들은 종종 ‘보호 조처(amparos)’를 얻는데, 규제 기관의 처분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이를 통해 그결정을 무한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멕시코 통신운송부 장관을 지낸 사람은 텔멕스의 임원 출신이다. 2004년에 세계무역기구(WTO)는 텔멕스가 국제전화요금을 고정시키고 전화 공급을 제한하며 멕시코로 전화를 연결하는 미국 회사들을 우려먹는 데 대해 조사하라고 멕시코 연방통신위원회에 명령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공공의 선을 위해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민주 제도는 종종 규제를 방해하는 가장 나쁜 조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멕시코 의회는 슬림의 이익에 해가 될수 있는 법안이 올라오면 부결시켜 버린다. 신생 억만장자를 만들어 내었던 바로 그 정부들은 이제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문제가 시작된 맨 처음, 즉 담배연기 가득찬 회의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멕시코 정부 고위 관료는 슬림을 비공식적으로 불러다 놓고, 당신을 목표로 하지는 않겠지만 당신의 고삐 풀린 확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멕시코 관측통들은 멕시코 정부와 슬림 사이에 이미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멕시코 고위 관료들을 자주 만나는 한 소식통은 “누구도 슬림에게 과테말라나 다른 곳의 부동산을 사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는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조용한 통지를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문제점은, 애초 문제 상황을 만들었던 때와 똑같이 불공정하고 자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허약한 정부가 다른 일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다면 실제로 조처가 일관되게 집행되지 못하거나 아예 유명무실할 수도 있다.

만일 ‘슬림의 시대’가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면 사회는 언제쯤 이런 상황에 염증을 낼 것인가. 멕시코나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변화 역시 충분히 극적일 수 있다. 우고 차베스가 이를 생생하게 입증한다. 멕시코의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은 2006년 선거에서 불과 24만3934표(유권자 수의 0.58%) 차이로 가까스로 승리했다. 만일 상대 후보인 좌파 성향의 전 멕시코시티 시장이 당선되었더라면 멕시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베스의 노선과 비슷한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카를로스 슬림의 파워가 갈수록 강해진다면 멕시코의 다음 선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른 미성숙한 국가의 경우는 어떤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래, 선진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경제 불평등이 확대되고 있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책결정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는 데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지금의 추세다. 이런 추세가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경제 대국인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업 간의 공식, 비공식 ‘파트너십’을 통해야만 더 큰 돈벌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편, 무한히 확대되는 빈부 격차를 사회가 계속 용인할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부의 집중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보호무역주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장벽, 주요 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 강화로 연결될 수 있고, 나아가 더 극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벌어지든, 카를로스 슬림이 21세기 최초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올해 67세인 슬림은 이 같은 투쟁의 결과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 사과도 하지 않은 채, 황혼 너머로 사라져 버리기로 작정한 듯하다. 지난 3월, 슬림은 앞으로 4년 동안 60억달러를 자신의 자선사업 재단에 출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에 이미 1억달러를 기부한 바 있다. 이것은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각각 300억달러를 게이츠재단에 기부한 것에 비하면 빛이 바래지만, 어쨌든 시작이기는 하다. 한편, 슬림은 유료 도로나 병원처럼 라틴아메리카에 시급한 사회기반시설을 전문으로 건설하는 영리법인인 IDEAL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고귀한 목표를 향한 노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감춰진 동기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도 사고 있다. 현재 슬림의 아들과 사위가 실제 운영을 담당하는 텔멕스와 아메리카 모바일은 라틴아메리카 진출을 노리고 있다. 슬림은 IDEAL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국가 원수와 고위 관료를 접촉할 기회를 만든 셈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슬림의 사업 방식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멕시코 자체를 관찰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멕시코 국민은 중산층이 서서히 늘어나는 데 대해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으로 넘어가는 이민자 문제에 시달리는 많은 경제학자들은 멕시코 국내에 충분한 일자리가 창출됨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멕시코인은 슬림이라는 멕시코식 자본주의 모델에 별로 열광하지 않는다. 이 나라 국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혁신적 기업가들과 이들이 만드는 역동성이 언제 현실화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멕시코인 그 누구도 자녀에게 “너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카를로스 슬림처럼 될 수 있단다”하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기사는 미국 카네기국제평화단이 발행하는 한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는 포린폴리시코리아와의 협약에 의거, 게재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