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주제 변조로 독자적 해학미 창조
한국적 정서를 잘 반영한 작가, 최영림(崔榮林·1916~1985)은 고향인 북한에 가족을 남긴 채 남하했다. 6·25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최영림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해방과 함께 영원히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검은색이 주조를 이룬 ‘흑색시대’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곧 이러한 아픔은 이후 캔버스 위에 모래와 흙을 뿌려 표현한 ‘황색시대’에서 보다 승화된다. 대지의 색인 황색 바탕에 그려진 여체는 풍만한 몸과 온화한 얼굴로 에로틱한 여인상에서부터 온화한 어머니상, 때로는 수인(手印)을 취한 부처 등의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난다.
최영림은 서양화가인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판화가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 아오모리 출신의 작가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1903~1975)와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영림은 1938년경 평양박물관의 학예원으로 근무하던 오노 타다아키라(小野忠明)의 소개로 무나카타의 화실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무나카타는 판화를 주로 작업한 작가였는데, ‘판화(版畵)’를 ‘판화(板畵)’로 명명함으로써 기존 판화의 개념을 깨는 대형 작품들을 제작한 일본의 대표적 작가다.
초기에는 어두운 색조의 추상화 작업을 시도했던 최영림은 그의 스승인 무나카타가 일본의 전통적인 소재인 목판화(木版畵) 작업으로 상파울로 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일등상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한국의 풍경, 한가로운 소, 평화로운 가족 등의 모습에서 한국의 전통성, 민속성 그리고 해학미 등을 끄집어 낸 최영림은 목판화가 갖는 동일한 재료의 한계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독창성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3월30일까지 덕수궁 미술관

최영림 l <여인>
1950년대, 종이에 유채, 64.5x51.5cm, 삼성미술관 리움
제작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화풍의 특성상 1950년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인물을 흑백의 강한 콘트라스트를 통해 입체파적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두터운 마티에르를 통해 드러나는 굵고 진한 검은 선과 면들은 화면에 날카로운 긴장감을 주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여인의 우울한 표정에는 북에 두고 내려온 어머니와 처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는 듯하다. 눈물 고인 커다란 눈, 할 말을 잃은 듯 굳게 다문 작은 입술은 아픔을 애써 인내하려는 듯한 여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분단된 조국을 연상시키는 상하 이단으로 나뉜 거친 마티에르의 배경은 금방이라도 여인의 목을 부러뜨릴 듯하며, 화면 속의 여인이 인내해야 할 고통의 크기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최영림 l <경삿날>
1975, 캔버스에 유채, 75x170cm, 개인소장
1960년대 이후 인물 중심의 최영림 작품들은 모두 의도적인 주제 변조와 과장된 회화적 표현을 통해 작가 특유의 독자적 해학미를 창조하고 있다. 말을 타고 새색시를 힐끗힐끗 훔쳐보며 가는 새신랑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꽃가마에 앉아있는 각시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장난기 어린 선량한 얼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짓게 한다. 더 나아가 이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각양각색의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화면 하단에 배치함으로써 관람객 또한 자연스럽게 구경꾼의 일원이 되어 이들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하하게 되는 것이다. 선을 위주로 한 인물 표현, 민족적 색감, 독특한 채색 기법을 통해 최영림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화려하고 동시에 구수한 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최영림 l <심청전에서>
1965,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국립현대미술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꽃과 연밥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 안에 심청이인 듯 보이는 젊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 공간은 어떠한 것으로도 뚫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막이 형성되어 있는 공간으로 아늑한 요람 같으면서도 최고의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전형적인 최영림 화풍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무나카타 시코 l <화수송(華狩頌)>
1954, 종이에 목판인쇄, 무나카타 시코 기념관
한 화면에 여러 가지 모양이 새겨져 있어서, 흑백의 판화임에도 화려함을 지닌 작품이다. 무나카타는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활이나 총 등을 사용하지만, 꽃을 취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사냥하기 때문에 칼이나 권총을 쥐어주지 않고 마음으로 꽃을 사냥하는 구도로 제작하였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