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당신이 애매모호한 제스처로 당황스럽게 된다면 ‘최후의 제스처’로 위기를 모면하라!

 첫째, ‘최후의 제스처’는 어디에서나 통용된다. 둘째, ‘최후의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원시부족조차 이것을 사용하고 이해한다. 셋째, 과학자들은 ‘최후의 제스처’가 행복감을 일으키는 화학적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넷째, 당신이 세계 일주를 한다면 ‘최후의 제스처’가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게 도와줄 것이다.

 웃음을 사랑하는 이 세상의 어느 낙천주의자가 위와 같은 원칙을 퍼뜨려 ‘웃음’이라는 언어의 글로벌화에 일조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문화적으로 웃음이라고 나라마다 다 같은 의미가 아니다. 즉, 웃음이라고 다 호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곳에서는 관계 형성의 촉매가 될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관계 파괴의 독소가 될 수도 있다. 

민족마다 다른 웃음의 의미

 미국의 한 즉석사진관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회사원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들어왔다. 사진사가 모든 장비 확인을 마친 후에 “Smile!”이라고 말하자 의자에 앉아 있는 일본인의 얼굴이 굳어져 버린다. “왜 증명사진을 웃으면서 찍으라고 그러지?”

 인도 푼잡의 시크교도들을 만날 때 서구식으로 눈 웃음을 치면서 “안녕하세요?”를 해보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안됐다는 표정을 하면서 위로의 말을 하리라.

 독일 음악의 고장 본(Bonn)의 한 콘서트홀, 어느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바흐의 ‘할렐루야’가 끝나자 한두 사람씩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은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건조한 박수를 쳐대고 있다. 마치 독일 병정들의 모습 같다.

 아프리카 부시족의 웃음은 더위를 먹는다. 이들의 웃음은 길지 않고 소리도 크지 않다. 피식피식(남자), 혹은 키득키득(여자).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다니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필경 귀신 탄 자이거나 그 지방을 처음 방문한 외국 방문객이거나 둘중의 하나다.

 에스키모인들의 웃음은 추위를 탄다. 이들의 웃음 역시 호탕하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추운 날씨에 입가가 찢어지거나 웃다가 입이 얼어붙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구유럽인들 역시 인종 차로 웃음의 사이즈나 볼륨은 다르나 표정은 역시 심각하다.

 동양적인 관점에서 웃음의 의미는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다. 다시 말해 웃음이 많으면 곧 표정이 다양한 것으로 인식되고, 나아가 표정이 다양한 것은 ‘진실함’의 결핍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웃음을 비롯해 되도록 입을 덜 벌리고 얼굴 표정을 자제하는 것이 대인관계의 안전장치가 됐다. 아직까지 웃음이 많은 사람을 보면 ‘실없다’, ‘속없다’ 또는 ‘가볍다’, ‘천박하다’라는 편견의 꼬리표를 붙여 버리곤 한다. 전통적인 일본 교육에서 ‘증명사진’의 의미는 ‘본래의 얼굴’이어야만 한다. 즉, 웃지 않는 엄숙한 얼굴이 진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웃는 얼굴은 천연이 아닌 가공의 얼굴이란 말인가? 그렇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유럽 후손들로, 그나마 미국인들에 비해서는 순진하다고 평가 받는 캐나다 인들조차 증명사진 찍을 때 ‘웃으면 안 된다’는 법적 조항이 붙는다. 혹 잘못 찍으면 사진을 찍은 사진관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사진 뒷면에 사진관 주소를 적게 되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웃음도 출신과 성분을 가렸다. 민속탈춤에서 표현되는 각양각색의 표정들은 격식과 규율에 얽매여 웃음 한번, 표정 한번 마음 편히 짓지못하는 양반들에 대한 서민들의 조롱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본분’과 ‘체면’의 한국 유교는 자연스런 표정과 표현조차 함부로 노출해서는 안 되는 ‘구속’과 ‘절제’의 문화를 양산했다. 외국에서 주재하고 갓 돌아온 한 회사원이 아파트 이웃에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했다가 바보 취급당했다는 해프닝은 여전히 바로 옆 집 이야기다. 한국인들의 이런 무표정을 외국에서는 스틸타입(Steel Type)이라 부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도 한다.

 반면 북미나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자연스럽다. 2000년 초 미국 유학시절 마지막 수업시간이었다. 담당교수가 자신이 경험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갑자기 자기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펑펑 울어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선생이 제자들 앞에서 수업시간에 우는 나라다. 예전 필자가 소속돼 있던 캐나다 밴쿠버 시 자문회의 중 정년퇴임한 노(老) 교수가 자기 의견이 무시됐다고 화를 내며 중간에 퇴장해 버려 동석한 의원들을 당혹하게 하고서는 2분 뒤 다시 웃으며 들어와 사과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 앉는다. 표정만으로는 정말 판단이 불가한 족속들이다.

언어가 녹아 있는 표정

 같은 백인이라지만 유럽의 독일인들은 표정에 변화가 없는 사람들로 통한다. 원칙에 목숨 거는 독일 사람들에게 감정의 높낮이를 표현하는 융통성이나 유연함이 자리 잡을 틈이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적인 표현들도 반드시 준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어야 할 정도로 건조하다. ‘감사합니다(Danke)’를 ‘괜찮습니다(Bitte)’로, ‘대단히 감사합니다(Danke Schoen)’를 ‘대단히 괜찮습니다(Bitte Schoen)’로 응대한다. 이때 감사하는 독일인들의 얼굴표정은 전혀 감사하지 않다. 만약 실례했음에도 언어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면 바로 대중적인 눈총의 대상이 된다. 이들에게는 감사도 계약이고 표정도 계약이다. 정말 살벌한 족속이다.

 이런 무뚝뚝함의 독일과 정반대 성향을 가진 다혈질 족속들이 지중해권의 사람들이고 이들과 한 통속인 라틴아메리카인들이다. 이들은 표정에 죽고 표정에 산다. 그들과는 언제 어디서건 금방 친구도 형제 아니 적도 될 수 있다. 진실로 그런 것인지 표면적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표정은 변화무쌍하다. 이들은 대수롭지도 않은 농담에 배를 잡고 웃기도 하며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일련의 대화중에 시리즈로 등장한다. 이들의 표정에 언어가 한몫 한다. 분간하기 힘든 높낮이와 정신없이 빠른 언어 속도가 한층 그들의 표정을 상승시킨다. ‘띠라따따 띠따 따따----’. 휴우, 정말 정신 속 빼놓는 족속들이다.

 21세기가 분명 ‘표정의 세상’이라는데 이의를 달 수는 없다. 세상 어느 곳에 가도 최후의 제스처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 듯하다. 웃어야 이득이 된다면 굳이 안 웃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고래로 웃음 아끼고 살아온 족속들 보고, 환경 때문에 날씨 때문에 웃지 못하고 살아온 족속들 보고 웃어야 글로벌 시티즌이라고, 이 세상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베버리힐스에서 만난 미국 할머니처럼 입가를 위로 찢어 올리며, 목을 세우며, 천연덕스럽게 웃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국제화가 아니다. 지역화 없는 국제화가 의미 없듯이 지역 사람들의 웃음 하나, 표정 하나라도 그대로 봐주고, 타 문화권의 표정에 기죽지 않고 살도록 권장하는 것이 크게는 인류를 보존하는 작은 첫 걸음이지 않을까? 일본 영화 <철도원>을 보면서 국적에 불문한 시청자들이 감동 받은 이유는 철도원인 주인공 오토마츠의 시종 변함없는 일본식 무표정에 있었다면 억측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