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쥘 사업 창출…
개인 자산만 600억달러

무케시 암바니는 인도 최대 민간 기업인 RIL(Reliance Industries Limited)이 속한 릴라이언스그룹(Reliance Group)의 회장이다. 그룹의 시장가치는 현재 인도 1위(5조루피, 인도 총 시장가치의 약 7%차지)이며, 무케시의 개인 자산도 2조4000억루피(600억달러)가 넘는다.
<포브스>에 따르면 2007년 인도인 억만장자(Billionaire; 10억달러 이상)는 36명으로 중국의 15명보다 두 배이상 많다. 이들 36명이 가진 재산 총액은 1700억달러로 인도 GDP(국내총생산)의 25%에 육박한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부를 이룬 철강왕 락시미 미탈이나 무케시 암바니는 정작 언론들의 요란스런 보도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부산물로 돈이 생기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개도국 부자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만, 인도의 부자들은 우연히 돈벼락을 맞은 것이 아니다. 일부 부동산 부자도 있고 IPO를 통해 자산가치가 급증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큰 꿈과 비전을 갖고 열심히 일한 성과를 거둔 이들이다. 또한 이들의 인성에는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것을 종교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인도 상인카스트의 기질(DNA)이 잠재해 있다. 미탈은 인도 서부 라자스탄주 마르와리(Marwari) 상인 가문 출신이며, 암바니는 서부 구자라트주 바니아(Bania) 상인 가문 출신이다.
그룹 창업자 디루바이 암바니의 신화
난세에 영웅이 나고 경제가 막 도약할 때 진정한 사업가(entrepreneur)가 나오는 법이다. 인도에서는 무케시 암바니의 아버지인 디루바이 암바니(Dhirubhai H. Ambani)가 이런 사업가에 속한다. 디루바이의 놀라운 자수성가 스토리는 2006년에 <구루(Guru)>라는 영화로 제작돼 인도에서 히트한 바 있다.
디루바이 암바니는 1932년 구자라트주 시골마을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 마을을 지나가는 힌두 순례자들을 상대로 주말마다 먹을 것을 팔면서 사업가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16세 때 중동 예멘으로 이주하여 대리점 점원으로 일을 했다. 2년 후 이 대리점이 쉘석유(Shell Oil)의 유통업체가 되었고, 회사는 디루바이에게 주유소 관리를 맡겼다. 디루바이는 여기서 결혼하고 무케시 암바니를 낳았다.

어쩌면 디루바이가 예멘으로 이주하면서 오늘날의 릴라이언스그룹이 태동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주유소 관리를 한 인연으로 후에 정유소, 석유가스 개발 분야로 다각화할 수 있었고, 지금은 예멘에서 석유가스 탐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루바이는 1958년 26세 때 인도로 돌아와 1만5000루피(375달러)의 자본금으로 릴라이언스상사(Reliance Commercia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폴리에스테르사(yarn)를 수입하고 인도 향신료를 수출했다. 1966년부터는 수입한 폴레에스테르사로 섬유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자체 원료 조달을 통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 하려고 석유화학, 정유, 석유가스 개발 등 후방산업으로 계속 진출했다.
디루바이의 근대적인 사고방식은 일개 기업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인도 재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도 제조기업도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인도에서 최초로 생산 규모와 품질 면에서 세계 최고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공장들을 설립했다. 즉, 디루바이는 ‘최저 가격으로 최상의 품질을 생산’한다는 경영원칙과 ‘크게 보고, 남보다 앞서 생각하며, 미래를 내다보는(Think big, Think fast, Think ahead)’ 사고방식을 몸소 실천하고 주변 사업가들에게 항상 조언하곤 했다.
특히 당시 인도 공장들은 대부분 규모가 매우 작았는데, 현재 수요 상황과 합리적인 수요 전망에 근거하여 ‘안전한’ 설비 능력을 보유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루바이는 원가와 품질 면에서 글로벌 기준에 맞는 ‘세계 규모의’ 설비 능력에 투자했다.
또한 1960~1970년대 규제 왕국(License Raj)을 운영했던 인도 정부를 상대로 규모의 경제 효과와 최소 경제 규모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디루바이는 “우리가 지배 권력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고 믿고 사업 추진이 정치적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굽히지 않고,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해 왔다. 이처럼 디루바이는 관계(relationship)와 신뢰(trust)를 성장의 토대로 삼았고, 이런 경영철학에서 회사 이름도 릴라이언스로 지었다.

시대 변화 흐름을 꿰뚫은 다각화 전략
릴라이언스그룹의 성공에 가장 큰 요인은 시대의 변화 흐름을 예견하고 끊임없이 도전과 변화를 도모한 것이 었다. 디루바이는 “릴라이언스 성장에 제한은 없다. 나는 비전을 계속 수정해 나간다. 꿈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4년마다 새로운 성장 플랫폼을 강구하면서 다각화를 통해 성장을 지속해 온 릴라이언스그룹의 슬로건이 ‘Growth is Life’인것은 당연해 보인다.
1977년에 수입 원사로 섬유를 생산하던 디루바이는 폴리에스테르사 생산공장을 직접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1982년에 드디어 완공했다. 당시 인도에서 가장 유망한 사업 분야는 의식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食) 분야는 규제 과다로 복잡했고, 주(住) 분야는 너무 규모가 작았다. 반면, 의(衣) 분야는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레이온,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등 인조섬유가 차세대 섬유가 될 것인지 반신반의할 때 릴라이언스는 폴리에스테르에 도박을 걸기로 결정했다.
릴라이언스는 1986년 PTA 공장을 가동한 데 이어 1991년과 1998년에는 석유화학단지 1기와 2기를 가동했다.
1993년에는 그룹 최초의 정유소를 가동했으며, 2002년에는 석유가스 등 에너지 확보에 뛰어 들었다. 릴라이언스가 구자라트주 하지라(Hazira)에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계획했을 때 주위로부터 석유화학제품은 섬유와 다르다는 충고도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여 누구보다 이 분야를 잘 알았던 무케시는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릴라이언스는 세계 최대의 폴리에스테르사와 섬유 생산업체가 되었다. 2007년에 완료된 확장 프로젝트 결과 폴리에스테르사 생산 능력은 연간 200만 톤(세계 능력의 4%, 생산의 6% 점유)이며, 폴리프로필렌 생산 능력도 170만 톤에 이른다. 석유화학제품들도 각각 세계 5위에서 10위 안에 든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어 승리한다
한편, 릴라이언스그룹은 비관련 다각화로 신규 사업을 개시했다. 1999년에 릴라이언스 인포컴을 설립해 통신 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때도 무케시는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확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지만, 파격적인 가격 인하로 인도에서 휴대전화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 2003년에는 전기 발전 및 송배전 업체를 인수했고, 경제발전과 각종 인프라 수요 증대 및 정부 규제 해제에 따라 유통, 금융, 인프라 개발 분야에 진출했다. 최근 무케시는 4년 후인 2012년에 릴라이언스가 새롭게 모색할 성장 플랫폼은 아마도 ‘변화하는 농촌’과관련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무케시가 신규 사업을 발굴하고 참여를 결정하는 프로세스를 보자. 암바니들은 단순히 “1000억달러 사업을 창출하자”고 말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아 기회를 발견하고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사업을 창출하자”고 한다. 가장 최근에 참여하고 있는 소매 유통업을 예로 들면, 인도와 같은 개도국 경제에서 유통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개인 소비는 GDP의 약 40%에 달한다. 현재 인도 GDP가 약 1조 달러(40조루피)이므로 유통업 규모는 4000억달러(16조루피)가 되고, 이 중 현대식 유통(현재는 5% 이하)의 비중은 33%, 금액으로는 1200억달러(4조8000억루피)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반적으로 1위 업체의 시장 점유율은 30%이므로 350억달러(1조4000억루피)가 선두 업체의 몫이 된다. 릴라이언스의 야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규모는 현재 RIL의 매출 규모보다 크기 때문이다.
릴라이언스는 현재 연간 75억달러의 현금(세후 이익 + 감가상각비)을 창출하고 있다. 이 금액은 2009년에 150억 달러, 2012년에 750억달러(포트폴리오 312억5000만달러 포함)가 될 것으로 예상되어, 향후 새로운 성장사업을 추진할 자금 여력은 충분해 보인다.
릴라이언스그룹의 두 번째 성공 배경은 ‘규모의 경제’ 확보를 통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었다. 릴라이언스는 경제발전 단계 및 정치구조 등 경영환경 트렌드를 포착하여 진출할 사업을 결정한 후에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대규모 공장을 수요 예상 곡선에 ‘앞서’ 건설했다. 이를 통해 비용과 판매가격을 대폭 낮추고, 경쟁자들을 쉽게 몰아내어 일거에 높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것이다.
이처럼 릴라이언스는 그동안 존재했던 비즈니스 게임의 규칙을 적극적으로 바꿈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런 전략은 통신 분야에 신규로 참여할 당시 가장 두드러졌다. 통신요금을 거리에 비례하여 산정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다. 그러나 릴라이언스는 요금으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분당 40파이사(0.4루피, 1센트)를 제시하여 인도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결국 당초 목표인 100만 가입자는 물론 4000만 가입자를 달성했다.
자본이 없으면 외부에서 빌린다
디루바이 암바니의 탁월한 면모 중 하나는 대규모 설비 투자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는 지혜와 능력이었다. 폐쇄정책을 폈던 인도에는 돈이 귀했고 이자율도 수십 퍼센트로 매우 높았다. 따라서 부채 시장보다는 자기자본을 확보할 수 있는 주식시장이 유리했다.
디루바이는 1977년 폴리에스테르사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이 충분치 않았다. 이에 중산층과 농촌의 촌부들에게까지 자신의 꿈과 투자 계획을 공유하도록 교육시켜 주식을 사도록 했다. 5만 명 이상이 디루바이를 믿고 투자했으며, 1986년 열린 주주총회에는 3만 명이나 참석하여 스타디움을 빌려야 했다.
릴라이언스는 주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승승장구했으며 더 많은 주주들을 끌어 들였다. 1980년대 RIL의 주주는 300만 명을 넘었는데, 인도 주식투자자 4명 중 1명이 RIL의 주주인 셈이었다. 2007년 말에 RIL의 주주는 206만 명을 넘었다. 최근 릴라이언스파워의 IPO에 엄청난 자금이 몰렸던 것도 향후 인도 전력 산업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함께 이와 같은 그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릴라이언스는 해외 자본시장에서 저리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여 대형 설비에 투자하는 전략을 인도 기업 최초로 활용했다. 이는 ‘인도 기업’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비전과 프로젝트, 실행력과 품질, 신용 면에서 손색이 없어 국제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좋은 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많은 인도 주주들과 대규모 국제 자금 사용에 대한 책임감에 놓인 릴라이언스는 자체적으로 황금률(golden rules)을 지켜왔다. 즉, 모든 사업은 자본수익률 20% 이상을 내야하며, 투자된 자본은 5년 내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경제 또는 정치 환경의 제약 때문에 의욕을 갖고 추진한 대규모 사업이 실패할 위험도 있다.
이런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 릴라이언스는 경제발전 수준과 환경 변화에 부응하며 사업 업종들을 선택했다. 나아가 인도 정치권력의 실타래 속에서 그들의 생태계를 잘 이해하여 현명하게 대처해 왔다.
사업 능력 검증은 이제부터
인도 경제계의 신화적 존재인 디루바 이 암 바니의 아 들인 무케시는 1957년에 태어나, 뭄바이대학교(Un iver sit y of Mu mba i) 산하 대학(Institute of Chemica lTechnology)에서 화학공학을 공부 했다. 졸업 후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시작했으나 폴리에스테르사 공장 건설이라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던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1년 만에 인도로 돌아왔다.
무케시는 20세인 1977년 릴라이언스에 이사로 입사했다. 이후 후방 수직통합 전략, 즉 섬유에서부터 폴레에스테르사, 섬유중간재, 플라스틱, 석유화학, 정유, 석유가스 개발 분야로의 다각화를 주도했다.
2002년 아버지가 69세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는 소유권과 경영권을 둘러싸고 동생인 아닐과 ‘왕자의 난’을 치렀다. 몇 년간의 분쟁 끝에 어머니의 중재로 2005년 9월 릴라이언스그룹은 공식 분리되었다. 무케시는 RIL을 비롯하여 정유, 석유화학, 석유가스 개발, 유통 부문을 갖고, 아닐은 통신, 금융, 발전,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갖게 되었다.
이제 무케시는 18개의 주요 자회사와 관련회사들을 포함해 총 매출액 규모가 270억달러인 릴라이언스그룹을 이끌고 있다. 특히 RIL은 2006년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에서 전년보다 73계단이나 상승한 269위를 기록했다. 매출액은 251억 6000만달러로 포스코(270억7000만 달러)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었다.
무케시는 아버지처럼 놀라운 비전과 실행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비전은 인도 경제의 높은 잠재력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서 나온다. 대다수 사업가들에게는 대형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가 되지만, 무케시는 대형 정유소 건설, 가스 탐사 프로젝트, 1500개 타운에 슈퍼마켓 신설, 대규모 경제특구(SEZ) 4개 단지 개발계획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들의 투자금액은 총 390억달러(1조5500억루피) 이상이다. 무케시를 진정한 부의 창출자로 만드는 것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추진(multi-task)할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세계 제일 갑부가 사는 법
인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외양에 치중하지 않는다. 집도 밖에서는 초라해 보이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면 놀란다고 한다.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특히 정치인들은 마하트마 간디나 초대수상 네루 이미지의 영향으로 보통 전통 복장에 샌들을 신고 다닌다. 무케시 회장은 회사에서 거의 항상 헐렁한 흰색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는다. 주말에는 청바지에 티나 편한 셔츠를 입는다. 시계나 펜도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
인도인들은 대체로 매우 가정적인데, 무케시 회장도 자신은 큰 그림만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실행은 권한을 이양 받은 핵심 팀에게 일임하고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보낸다. 그는 아들 둘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딸의 대학입학능력 시험 준비를 도와주며, 부인과 함께 주말 산책을 나간다. 또한 캘리포니아 페블비치나 보츠와나 야생공원 등에서 보내는 가족 휴가에는 언제나 함께 한다.
무케시 회장은 가족 모임이나 친구의 50회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산업체 모임이나 글로벌 포럼도 빠질 정도로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소중히 한다. 늦은 밤 동료들과 함께 카페에서 군것질하면서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며, 부인과 산책하고 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홈씨어터로 영화 보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꼽는다.
그동안 조용하게 지내던 무케시 회장이 최근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뉴스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 최고 명차인 125만달러짜리 마이바흐(Maybach)를 구입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도로 폭이 좁고 교통체증이 심한 뭄바이 도로에 맞지 않는다고 반품했다. 대신 무케시 회장은 맞춤 제작한 벤츠를 이용하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는 것은 뭄바이 북부 반드라(Bandra)에 대규모 사옥을 신규 건설하고, 뭄바이 남부 알타마운트 로드(Altamount Road)에 1억5000만달러를 들여 가족 6명이 살 30층짜리 저택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저택은 360도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게 설계되며, 홈시어터, 헬스클럽, 풀장, 헬기장 등을 갖추게 된다.
인도의 국토 면적이 남한의 33배나되기 때문에 많은 인도 재벌들은 전용기를 보유한다. 무케시 회장은 현재 비행기 6대를 보유하고 있고, 조만간 비행기 2대(Airbus Corporate Jet, Global Express XRS)를 새로 도입할 것이다. 글로벌익스프레스XRS는 빌 게이츠와 이건희 회장도 사용하는 전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