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줄까, 처음 줄까?”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주인이 묻는다. 한동안 고민에 빠졌던 대학생들은 “ 오늘은 이슬이 한 병!” 을 외친다. 대학가 술집이든 고급 한정식집이든 언제부턴가 종업원이 공식처럼 묻게 돼 버린 질문이 있다. 바로 ‘ 참이슬’ 소주를 먹을 것인가아니면 처음처럼’ 소주를 먹을 것인가다. 그런데 이 ‘ 참이슬’ 과 ‘ 처음처럼’ 이란 브랜드 이름은 공교롭게도 한 사람이 지었다. 바로 ‘ 브랜드 네이밍의 대가(大家)’, ‘ 브랜드의 천재’ 라고 수식어가 따라 붙는 손혜원 크로스포인트 대표다.

“본질 속에서 장점 강조하고 단점 바로 잡아나가야 소비자 설득”

만약 소주를 마시다가 ‘레종’ 담배라도 한 개비 물어 피웠다면 당신은 손 대표가 그려낸 담뱃갑 고양이 디자인을 보게 될 것이다. 손 대표는 전설 속 고대 연금술사처럼 흔한 제품을 ‘금(金)’처럼 탈바꿈시킨다. 얼마 전 그의 연금술은 ‘눈물’을 만들어냈다. 지난 1월 인사이트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삼일제약 ‘EYE₂O’라는 인공눈물 브랜드가 인공눈물 분야 인지도 1위를 차지했다. ‘눈’ 두 개, ‘물’의 화학공식 H₂O를 합쳐 만든 인공눈물 브랜드는 그의 연금술을 통해 ‘EYE₂O’라는 단순명쾌함으로 표현됐다.

홍익대 미대 출신으로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을 거쳐 1986년 크로스포인트라는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의 창립 멤버가 돼 성공한 그는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브랜드와 디자인을 함께 잘 해’ 업계에서 알아주는 전문가가 됐다. 이런 손 대표만의 비결을 알아본다.

본질을 찾는 ‘무당’

그가 업계에서 유명한 만큼 그를 호칭하는 별명도 많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이 ‘신 내림’을 받고 내지르는 것처럼 줄줄이 유명 브랜드가 터져 나온다는 의미에서 나온 ‘무당’이란 별명은 손 대표 직원들이 그가 기막히게 만들어낸 이름을 보고 감탄할 때마다 내지르던 일성(一聲)이다. 공기 속에서 손을 휘저어 비둘기를 만들어내듯 브랜드를 만들어낸다고 ‘마술사’라고도 한다.

또 내부 직원들은 그를 ‘마녀’라 부르기도 한단다. 그는 사실 직원들에게 1년에 한달씩 뉴욕 근무 기회를 주고 애완 고양이와 함께 사무실 환경을 꾸미고 부엌에서는 요리사가 식사를 준비하는 등 최고의 업무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만큼 직원들의 능력을 최대로 뽑아내는 데 능한 그를 ‘마녀’라고도 한다.

이렇듯 그가 업계에서 유명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이너’가 된 이유는 우선 제품의 본질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손 대표는 “모든 브랜드는 결국 그 제품 본질 안에서 표현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 제품의 브랜드를 새로이 할 경우, 결정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는 기존 제품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그는 조언했다. 손 대표는 “브랜드는 ‘현재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고 정의하며 “브랜드는 본질 속에서 장점은 강조하고 단점은 바로 잡아나가는 것이지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본질을 분석해 만든 브랜드의 대표적 예가 ‘참眞이슬露’다. 지난 1998년 진로는 두산의 ‘그린’ 소주에 밀린 시장 점유율을 탈환하기 위해 손 대표를 찾았다. 당시 진로는 알코올 도수를 23도로 낮춘 ‘순한진로’를 출시했지만 시장에서 반응은 좋지 못했다. 손 대표는 “본질을 분석해 전통의 몸에 현대의 옷을 입힌다는 컨셉트로 제품 브랜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23도로 도수를 낮춰 ‘순하고 부드러운 맛’과 ‘대나무숯에 걸러낸 소주’라는 제품 본질을 고민했다. 또한 이 본질을 살려 대나무를 소재로 라벨 디자인을 하고 ‘진로’ 브랜드라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조화시켰다. 그래서 탄생한 브랜드가 ‘참眞이슬露’다.

그는 본질을 브랜드에 녹여 만들어낸 또 다른 사례로 울진군 브랜드를 만든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 울진군 일을 맡게 됐을 때 울진은 이미 ‘청나빌레’라는 기존 브랜드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브랜드는 반드시 울진이 아니어도 어디서든 쓸 수 있는 브랜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는 울진의 ‘울’은 ‘우리’의 줄임말로 사용되고, ‘진(珍)’은 한자로 ‘보배’란 의미에 착안해 ‘우리珍’이란 울진군만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제품 본질만으로 브랜드 작업이 끝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손 대표는 “본질로만 경쟁이 되지 못하면 뭔가 수술을 해야 한다”며 “이때는 변신을 통해 차별화 요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남과 달라야 한다’는 명제는 대부분의 마케터에게는 마케팅의 고정관념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요즘 한 개 대형마트 매장에 입점한 총 업체 수는 평균 2000개가 넘고 브랜드 개수로는 10만 개 이상이다. 10만 개의 브랜드 속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차별화’는 마케팅의 지상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브랜드 수술하기

하지만 손 대표는 “무조건적인 차별화만이 능사는 아니다”며 “1등 제품의 힘이 강할 때 그 이미지를 따를 것인지 차별화할 것인지 충분히 검토한 후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 1등 제품의 이미지 중 어떤 요소들은 선택할 수도 있고 ‘다르다’는 점을 부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 대표는 브랜드 수술로 차별화에 성공한 예로 두산의 ‘처음처럼’을 들었다. ‘처음 처럼’은 기존에 있었던 ‘산’ 소주를 대체하고 경쟁사에 대항해 새로운 브랜드를 내겠다는 계획에서 시작됐다. 손 대표로서는 본인 스스로 만든 ‘참眞이슬露’ 브랜드에 새로운 브랜드로 도전장을 내야했다. 당시 손 대표가 두산에 제시한 기획서는 ‘작전명 -아나콘다(Operation Anaconda)’였다. 상대방을 정면으로 공격할 무기는 없지만 막강한 경쟁사를 뱀처럼 차츰 조여 가며 공략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기획이었다. 그 ‘조이기 기술’이 바로 차별화였다.

손 대표는 기존 주류 시장의 브랜드 이름에서 벗어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박 하고 대중적인 이름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처음처럼’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말과 글씨를 따왔다. 손 대표는 “두산이 경쟁사 제품과 비슷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이고 소박한 의미에다 신영복 선생님의 서예에서 모티프를 딴 브랜드로 차별화해 소주 시장을 공략해 적중했다”고 말했다.

손 대표가 2006년 펴낸 저서 <브랜드와 디자인의 힘>의 서평에서 예종석 한양대 교수는 “‘설득하지 못하는 굿 디자인은 박물관에나 걸어야 한다’는 그(손혜원 대표)의 도발적인 발언은 그가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타고난 경영전략가이자 커뮤니케이터임을 감지하게 한다”고 했다.

그가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업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소비자를 설득하는 디자인과 네이밍 (naming)으로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그는 “미대 출신인 제가 디자인을 보고 이름을 만들게 됐다는 것은 거꾸로 이름을 보고 디자인을 만들 수도 있단 얘기” 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가 브랜드 네이밍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 기초는 디자인에서 시작했다”며 “저는 이름을 지을 때 단순히 말을 붙이고 빼고 하지 않아요. 어떤 제품의 전체 컨셉트를 머릿 속에 그린 상태에서 그림으로 함축할지, 말로 함축할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제대로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전체 컨셉트를 머리에서 생각하고 동시에 브랜드를 그려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디자인’과 ‘이름 짓기’가 시너지를 이뤄 소비자를 설득시킨 예가 침구류 전문 브랜드인 ‘이브자리’다. ‘이브자리’는 손 대표가 처음부터 창조해낸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손 대표가 처음 프로젝트를 맡았을 2001년 당시에는 기존 ‘이브자리’ 브랜드의 시각적 이미지가 실제 제품 수준에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브자리의 영문 이름인 ‘evezary’에서 ‘e’를 띄어내 접어놓은 이불을 형상화한 심벌을 만들어냈다. 또한 ‘이브자리’를 ‘이브(eve)의 자리’와 순 우리말인 ‘이부자리’의 합성어로 뜻을 정리해 로고를 만들어 냈다. 이는 그가 전체 제품 컨셉트를 바탕으로 ‘이름’을 보고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데 기인했다.

고급 소주 브랜드인 ‘화요(火堯)’도 ‘디자인’과 ‘이름 짓기’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화요란 이름은 ‘소주(燒酒)’의 ‘소(燒)’자에서 나왔다. ‘소(燒)’는 ‘불사르다, 익히다’는 의미다. 손 대표는 이를 파자(坡子)해 소주의 증류주를 의미하는 ‘화(火)’와 풍요로운 요나라 시대를 의미하는 ‘요(堯)’로 분리해 새로운 브랜드 ‘화요’를 만들어 냈다. 그는 “화요라고 파자해서 브랜드 디자인을 할 때부터 디자인적인 요소를 함께 생각했다”고 말했다. 브랜드 디자인과 네이밍이 함께 어우러져 브랜드 아이덴티티(BI)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디자인’과 ‘이름 짓기’의 시너지 효과

손 대표의 명함에 있는 그의 공식 직함은 ‘creative director’. 그는 강의를 통해 제품 브랜드를 만들 때는 본질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차별화 방법을 쓰라고 했다. 또한 전체 컨셉트를 머리에 그려 이름과 디자인을 함께 구상하라는 주문을 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그의 직함처럼 창조적(creative)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는지 궁금증이 남아 비법을 물었다. 아이디어 비법을 설명해주는 대신 손 대표는 일본 만화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와 얼마 전에 읽었다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비법’을 쉽게 설명해 줄 수는 없고 자신이 하는 얘기를 통해 비법을 상상해 달라는 말이었다.

54살의 여성 CEO 입에서 “일본 만화 <몬스터>를 읽었다”며 “<몬스터>는 삼국지 처럼 한 질을 서재에 고이 모셔두고 봐야 할 명작”이란 말을 들었을 때 느낀 비법은 ‘다독(多讀)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고 상상력의 나래를 펴는’ 그의 노력이었다. 다양한 정보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읽고 소화했던 것이 그를 브랜드와 디자인 전문가로 만든 비결 중 하나였다.

다음 화제는 ‘이순신’. 손 대표는 경상남도 통영 지방자치단체를 위한 브랜드 작업을 하다가 이순신에 빠져들었다. 그는 ‘통영’이라면 ‘이순신’이라 했다. 그리고는 이순신에 대해 숨 한 번 안 쉬고 30분 동안을 설명했다. 이미 저녁으로 시켜놓은 스파게티는 우동발이 됐다.

두 번째 그녀의 비법은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손 대표는 “이순신에 관련된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모조리 샀다”며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이 제일입니다”, “학익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세요? 왜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적을 속박하고 거북선으로 적의 배를 까부신 작전이래요”라며 흥분했다. 이미 저녁밥을 먹을 생각은 진즉 잊은 상태로 ‘임진왜란’ 전투의 한 장면에 서 있는 그는 여장군이 된 듯했다.

손 대표는 “요즘엔 ‘이순신’에 관련된 책에 푹 빠졌어요. 책을 읽다가 감동해서 한동안 눈을 감고 책을 가슴 위에 올려 놓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그가 2006년에 펴낸 <브랜드와 디자인의 힘>이란 300페이지가 넘는 저서도 그의 집중력으로 석 달 만에 완성됐다.

“뉴욕에 노트북 가지고 가 한 달 동안 쓴 책입니다. 좌충우돌했지만 생각나는 걸 정리해서 쓴 책이에요. 이 책은 저희가 표지 디자인부터 직접 작업했어요. 뉴욕에서 돌아와 두 달 정도 더 정리해서 나온 책입니다. ”

손 대표는 “지식은 창고에서 나오고 지혜는 샘에서 나온다”고 했다. 보통 브랜드 이름을 짓는 사람들은 말을 조합 하거나 사전에서 찾아서 ‘창고’를 뒤지지만 손 대표는 이 제품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결과를 먼저 생각한다고 했다. 단어 자체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품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먼저 생각해야 ‘샘’처럼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