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 있는 것은 빌리지 않고, 빌릴 수 있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

그중에서 올해 41세인 궈광창은 중국 명문대학인 상해 푸단대 철학과를 졸업한 대표적인 인텔리형 부호로, 중국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창업형 CEO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92년 자본금 10만위안으로 과학기술자문회사 광신을 창업했고, 15년이 지난 지난해에는 자산 362억3000만위안으로 중국 3위 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농민공 부모 밑에서 푸단대 진학
궈광창의 고향은 저장성 동양 현으로 가족들은 농촌 호적(후크우)을 가진 농민신분이었다. 궈광창의 아버지는 1980년대 개혁개방정책으로 저장성 도처가 공사현장으로 변하자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공사 현장에 농민공으로 뛰어 들게된다. 그러나 얼마 후 폭약 작업을 하던 중 손에 심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월급 15위안을 받는 공장 경비원으로 취직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때 궈광창은 14세였으며, 누나 두 명과 힘겨운 생활을 이어 나가면서도 대학 입학을 꿈꾸었다. ‘농민’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중점대학입학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고향에서 편하게 교직생활을 할 수 있는 사범전문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궈광창은 고집을 꺾지 않고 대학 진학이 가능한 일반 고교에 진학했고, 1985년 중국 최고 명문대 중 하나인 상하이 푸단대 철학과에 입학하게된다. 1989년 학교를 졸업한 궈광창은 대학 강사직에 있으면서, 그 시기 많은 명문대 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을 위해 TOEFL과 GRE 자격을 취득했고 친척들로부터 유학 자금까지 빌려 놓았지만, 1992년 궈광창의 인생방향을 바꾼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유학 대신 창업의 길로
1992년은 덩샤오핑이 화남 지역을 순방(남순강화)하며 개혁개방 의지를 천명한 때였다. 당시는 1989년 6월 일어났던 북경 천안문 사태로 개혁개방정책이 주춤했던 때였는데,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천명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25세였던 궈광창 역시 그중 하나였다.
궈광창은 결국 고민 끝에 유학 준비 자금을 이용해 푸단대 출신 친구 네 명과 함께 자본금 10만위안으로 광신과기자문공사를 창립했다. 당시에는 생소한 정보자문회사로, ‘광신(廣信)’이라는 회사 이름은 본인 이름 한 자와 동업자 양신쥔(梁信軍)의 이른 한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동업자였던 양신쥔 역시 현재 <포브스> 중국 부호 31위에 올라 있다.
명문대의 후광과 남순강화 이후 중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등장한 상하이라는 지리적 여건에 힘입어 회사는 설립 10개월 만에 100만위안의 이익을 냈다. 첫 종자돈을 만든 궈광창은 과감하게 고위험 고수익 업종을 찾았고, 생물·의학 분야로 전업을 결정한다. 1993년 회사 이름을 지금의 푸싱(復星)으로 바꾸고, 이후 유전공학을 전공한 왕쥔빈, 탄지엔, 판웨이 등 또 다른 푸단대 졸업생을 영입한다. 푸싱공사의 첫 번째 제품은 B형 간염 진단을 위한 핵산증폭검사(PCR)진단 시약이었는데, 이 제품으로 사세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푸싱의 자본금은 1995년에 이르러 1억위안으로 늘었다.
M&A로 푸싱그룹 일구다
푸싱공사는 한 달에 한 제품 꼴로 간염, 성병, 유전병 관련 제품을 출시하면서 성장세를 이어갔다. 또한 전국적으로 자체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해 중국 전체 시장을 100% 활용하는 수완도 갖추게 된다. 1998년 푸싱공사는 주식회사 형태인 푸싱실업(復星實業; 이후 푸싱의약으로 재편)으로 전환한 후, 그해 7월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당시에는 주식시장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 공모자금이 3억5000만위안에 불과했으나, 궈광창은 상장을 계기로 주식시장을 주목했고, 이후 궈광창은 주식시장을 활용해 사업을 확장한다.

2001년 8월, 궈광창은 전국적인 판매 네트워크를 보유한 예원상성의 지분 13.25%를 매입해 1대 주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궈광창이 실제로 노린 것은 예원상성의 자회사(보유 지분 53.33%)였던 상해동함춘제약을 간접 소유하는 것이었다. 이 회사 인수로 당시 자산 6억위안에 불과하던 청년 기업 푸싱실업은 1966년 설립된 중약 전문제조사인 상해동함춘제약의 브랜드와 기술을 일거에 흡수할 수 있었다. 상해동함춘은 육미지황환, 동충하초 관련 중의약 분야의 특허와 기술을 보유한 국유 제약회사였다. 이후 우의그룹에 대한 지분 투자를 통해 중국 대형 유통업체인 상해연화 슈퍼마켓 지분 51%도 확보하는 등 궈광창의 활약은 계속됐다.
푸싱그룹이 사업을 확장하는 방식은 ‘살 수 있는 것은 빌리지 않고, 빌릴 수있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다. 현재 푸싱은 산하에 20여 개 제약회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처음부터 투자해 설립한 곳은 한 개 사에 불과하다.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하면서도 궈광창은 M&A에 분명한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첫째, 피인수 업체는 해당 업종에서 수위에 들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었을것, 둘째는 피인수 업체의 중간관리층이 푸싱의 도전적인 경영 스타일을 수용할수 있는 적응력이 있을 것이다.
실제 푸싱은 중간관리층의 적응력 부족으로 M&A 후 경영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푸싱은 제약업의 매출 신장률을 능가하는 외형 확대를 위해 한 제약 회사의 지분 60%를 인수한 적이 있었다. 그 회사는 자본금 600만위안, 세후 이익 약 300만위안, 5년 연속 흑자를 내던 기업이었다. 5년 동안 교수, 제약사 전문경영인, 다국적기업 영업임원 출신의 사장으로 교체해가며 매출 신장을 꾀했으나 중간관리층의 적응 부족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푸싱은 미련없이 이 회사를 한 보건식품 회사에 양도해 버렸다.
변함없는 우정과 철저한 분권
푸싱그룹의 또 다른 경영 특성 중 하나는 동업 관계를 잘 유지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나 친척과 동업한 기업들 중 상당수는 회사가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동업자들이 초창기 창업정신을 잊고 분쟁을 겪게 된다. 그러나 푸싱의 창업 멤버는 푸싱그룹의 최고 경영진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1993년 푸싱과기공사를 설립할 당시 정했던 궈광창(58%), 양신쥔(22%), 완쥔빈(10%), 판웨이(10%) 등의 동업자 지분율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안정적인 경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궈광창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업자의 결점이 아니라 장점을 찾고, 또한 본인의 단점을 동업자의 장점으로 보완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방침으로 궈광창은 동업자들의 신임을 얻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궈광창의 인사 스타일은 ‘인재를 모으고, 사업을 집중화하며, 능력을 배양할수 있는 업무를 주어, 업적을 통해 인재를 평가한다’로 요약된다. 이러한 원칙 아래 철저한 분권화를 실시해 동업자의 능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언변에 능하고 사교 능력이 뛰어난 양신쥔은 그룹 부회장으로서 대외업무를 전담하고, 그룹 전략 투자에 대한 주요 결정권을 행사한다. 왕쥔빈은 푸싱실업사장으로 원래 전공인 생물·의약 분야를 챙기고 있으며, 판웨이는 푸띠 회장으로 부동산 사업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현재 푸싱그룹의 나머지 이사 3명은 재무, 법률, 인력 관리 등 각자의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 정부 부처에서 내린 낙하산 인사들이 경영을 맡는 국유기업이나 업무와 무관한 친인척이 요직을 맡는 민간기업과는 달리 철저히 전문성에 따라 분권화하는 것은 푸싱이 가진 여러장점 중의 하나다.
바닥일 때 진입한다
푸싱의 확장 전략은 새로운 사업 영역에 진출하는 시점을 그 사업의 경기가 바닥일 때로 정한다는 것이다. 푸싱이 건룡강철에 투자할 당시는 정부의 강력한 위축정책으로 철강 시황이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건룡강철은 민영 철강사로서 단점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한 단계 도약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푸싱은 최소 자본을 투입해 현재 많은 수익을 내는 건룡강철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3년에 덕방증권을 인수하던 때 역시 주식시장의 퇴조로 너나없이 증권사를 팔려는 분위기였다. 2004년 초금광업공사에 투자할 때는 황금 가격이 최저점이던 시기였다. 현재 푸싱그룹 본사가 위치한 본사 사옥도 이런 투자 방식의 소산이다. 이 건물은 1999년 매입 당시 후미진 곳에 위치한 낡은 건물이었다. 당시 매입가는 1평방미터당 4500위안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공시지가만 5만위안이 넘는다.

이러한 투자 스타일은 ‘항상 남보다 반 보 먼저’라는 사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제2의 성장 엔진, 철강업
의료, 제약 부문에 주력하던 푸싱은 외형 성장에 한계를 느껴왔고, 그 대안으로 철강업을 주목하게 된다. 우선 진입장벽이 낮은 민영 철강사인 당산건룡을 목표로 했다. 당산건룡은 장즈샹(張志祥·41)이 2000년 허베이 성 당산시 준화강철창(遵化鋼鐵廠)을 매입한 후, 2003년말에는 연산 조강 257만 톤, 강재 241만 톤 규모의 민영 철강그룹으로 성장했다. 푸싱그룹은 2002년 8월 당산건룡유한공사 주식 30%(3억5천만위안)를 매입하여 철강업에 진출하게 된다.
당산건룡 CEO 장즈샹은 푸싱그룹 궈광창과 동갑내기로 절강공업대학을 졸업했으며, 적자 국유기업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해 왔다. 두 사람은 대표적인 민영기업가로서 친분이 있었다. 건룡강철 투자 이후 궈광창은 푸싱그룹이 철강업 진출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을 들었다. ①철강업의 국유기업 집중도가 높아 시장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②해외 유명 철강사의 중국 진출이 많지 않으며 ③민영기업 대부분이 철강업에 대한 투자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후 푸싱그룹은 철강업에 대한 본격 투자를 결정하고, 2003년 남경강철 및 영파건룡의 지분 인수를 동시에 진행하게 된 것이다.
푸싱의 남경강철 M&A는 지금도 중국 내에서 대표적인 민영화 성공사례로 꼽힌다. 국유기업의 M&A 성공을 위해서 인수자는 재산권 소유자인 정부, 이해 관계자인 종업원, 절차 인허가권자인 관계기관 3자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시켜주었다. 푸싱그룹은 무엇보다 장쑤 성 정부와 남경강철 경영층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남경강철 종업원은 고용 승계 문제로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M&A 전에 상당 규모의 자사주를 받은 중간관리자 이상 경영층은 적극적으로 M&A에 협력했다. 민자 유치로 부실채권 건전화를 꾀할 수 있었던 정부 부처들 역시 긍정적 입장이었다.
국유 중점 철강사 중 하나였던 남경강철 민영화에 대한 중국 철강 업계의 의견은 상반되게 나타난다. 철강업 진입장벽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반면, 이번 기회를 계기로 부실한 중소형 국유 철강사에 민영자본과 경영 방식을 대거 수혈해 경쟁력 있는 철강사만 생존할 수 있는 시장 경쟁구도를 구축하자는 의견도 있다.
푸싱의 미래
푸싱그룹은 2005년 IBM 노트북 사업 부문을 인수했던 리엔샹, 최대 민영 철강사인 사강, 가전 유통업체인 수닝전기에 이어 매출액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다른 3사가 사업 다각화를 이루지 못한 반면, 푸싱은 상호 보완적인 사업 다각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국책 연구기관인 국가발전연구센터(DRC)는 푸싱에 대한 사례 분석을 통해 푸싱이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최적의 사업 다각화를 수행했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즉, 푸싱은 경기 사이클이 비교적 길고 수익이 안정적인 철강업과 그와 반대로 경기 사이클이 짧고 사업 손실 위험이 높은 부동산업, 중간 성격인 의약업과 상업을 보유하고 있어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궈광창은 향후 연원료 자원 확보를 통해 철강 부문 사업을 강화하고 금융 서비스 분야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발전 계획을 갖고 있다. 이 계획은 이미 2004년 초금광업공사에 대한 착수로 개시되었으며, 2007년에도 화하 광업에 대한 투자로 가시화된 바 있다. 특히 남경강철과 산동 초금광업공사는 대형 국유기업의 민영화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 사업 다각화에 성공한 케이스로, 향후에도 이러한 성공사례를 추가할 예정이다.
공익활동에 적극적
푸싱그룹은 민영기업으로는 보기 드물게 사회·공익활동에 적극적이다. 이미 설립한 희망프로젝트 장학기금, 과학교육 발전기금, 빈곤 교육지원기금 등을 통해 2007년까지 약 4000만위안의 자선기금을 집행했다. 궈광창 모교인 상해 푸단대에는 1000만위안을 기증해 건물 증축에 사용하도록 했고, 그중 한 건물은 ‘푸싱관’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 또한 국가문화재인 황제릉 개보수에도 500만 위안을 기증한 바 있다. 궈광창은 이러한 공익활동이 중국 민영기업에 대한 사회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해 11월6일 궈광창은 ‘상해 대학생 창업 포럼’에 성공한 창업자로 초청돼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그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는 제2의 궈광창을 꿈꾸는 수천 명의 대학생들에게 날 선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창업정신의 제1원칙은 처음부터 너무 큰 것을 원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라고 밝히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가 푸단대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한 돈벌이는 유행가 인기 순위를 매기는 일이었는데,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왕복 2시간을 자전거로 출퇴근했다는 것이다.
궈광창은 중국에서 보기 드물게 철학과 출신의 CEO다. 인텔리형 CEO인 궈광창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푸싱의 주주들은 또 어떤 신업종에서 활약을 계속할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