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피렌체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목숨까지 걸고 주장했던 ‘지구는 둥글다’는 말이 21세기에는 옛말이 됐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로 유명한 세계화 전도사 토마스 프리드만이 국경이 없어진 21세기의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 ‘세상은 평평해졌다’고 떠들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둥근 지구가 하루아침에 납작해질 리는 만무하나 그만큼 세상이 좁아졌다는 의미다.

 미국 어느 시골의 개인 병원 안내전화를 인도에서 받고, 한국의 아내와 앙골라로 파견 나간 남편이 인터넷으로 화상통화하고, 그것도 무료로, 중국 어느 시골의 인권 유린 현장이 한 시간도 안돼 유튜브(youtube.com)에 올라 온 세상 사람들이 공유한다. 이 세상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쉽게 눈에 띄는 한국 기업들의 간판과 기업 행위 역시 이미 신선하지 않을 정도다. 불과 한 세대전만 하더라도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의 눈시울을 달궜던 한국 기업들의 로고들이 이제는 여행사진의 배경으로도 삼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이게 됐다.

 사실 유럽 공항 카터의 손잡이 로고에서부터 필자가 살고 있는 캐나다 밴쿠버 어느 동네의 다리 건축 그리고 미국 미식축구 경기의 막간 광고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예상외로 활발하다. 한국 자본과 한국 인력은 이미 세계 시장 속에 충분히 스며들었다.

현지화에 일천한 한국 기업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글로벌화’의 이면에는 일반 여행객 수준에서는 차마 상상하지 못할 치열한 문화 충돌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한국 기업이 한국 땅을 떠나 현지화 되는 것이 ‘국제화’의 진정한 목표라면, 그리고 그 현지화가 16세기 콜럼버스 식으로 단순히 낯선 땅에 깃발을 꽂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을 수용하고 포용해 궁극적으로 생산성을 제고하는 것이라면, 한국 기업들의 수준은 아직까지 일천하다. 현지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주재원들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명령하기를 좋아함(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하라고 함), 술을 좋아함, 철저히 윗사람 중심임(권위주의), 일중독(현지와 한국 시간 둘 다 일함, 근면성), 영어나 현지어에 서툼(명령하는 단어와 부탁하는 단어의 차이도 모름),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덮으려고 함(갈등 회피 문화), 의사결정이 아주 빠름(탑다운), 일을 처리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음(상황주의)’ 등.

 한국 기업들의 현지 적응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말과 문화가 다른 현지인들의 채용과 유지, 해고 과정에 쏟아 붓는 돈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천문학적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특히 소송의 나라 미국의 많은 한국 기업의 해외 법인들은 지긋지긋한 법정 투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교육 중에 만난 현지의 흑인 인사 담당자에게 “그건(That case)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많아 기억을 못한다고 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상식이 된‘인종 문제’와 ‘성희롱’, ‘균등 고용’과 같은 단어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초일류 기업들의 현장에서는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1970~1980년대의 수출 드라이브에 이어 1990년 중반 한국에 세계화 바람이 불면서 한국의 기업들은 너도나도 외국 땅 밟기에 앞장섰다.

 지금 2008년은 한국 기업들이 첫 외국 땅을 밟았을그 때로부터 족히 한두 세대는 흘렀다. 이러한 긴 세월동안 많은 돈이 투자됐고, 정보가 공유됐고, 사람이 오갔다. 하지만 이러한 경영 자원의 교환에 한국 기업들의 세계화는 비례하지 않았다. ‘글로벌’이라는 게 최소한 본국 중심도 아니고 현지 중심도 아닌 제3의 문화 창출에 있다는 기본적인 개념은 이해하지만, 여전히 한국 기업은 세계 어디를 가나 국내 기업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들의 해외 경영 현장에는 여전히 투박하고 일방적인 한국식 밀어붙이기 경영과 불투명한 탑다운(Top-Down)식 경영 방식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주재원들은 더욱 철저히 본국이나 본사 중심이 되어가고, 현지인들은 더욱 철저히 현지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them and us)’의 분리 사고가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해외 현장에 현지인 사장이 거의 전무하다는 단적인 사실만 보더라도 한국 기업의 현지화 수준을 알 수 있다.

합리적 문화 창출로 차별화

 글로벌 기업을 꿈꾸는 한국 기업들이여, 이제 건물은 됐다. 현지의 토종 기업들과 경쟁할 만큼 자본도 준비됐다. 그간 산전수전 다 겪은 우수한 인력들도 있다. 한국의 국가적인 이미지도 부끄럽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바로 문화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수평적인 문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몇몇이 밀실에서 기획해 단숨에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구전으로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전수되는 게 아니고, 전형적인 탑다운 방식으로 강요되는것도 아니며, 긴 시간 동안 상하와 공공의 합의와 노력으로 이해되고 명문화되어 국경과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 공유되어야 한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 차는 세상에서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일본 차들이 차의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에서 아무리 겅호를 외치며 분발해도 그들은 이방인 이었다. 일본 차의 고품질과 고난도 마케팅도 자동차 종주국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 일본 차가 이제 자동차 제국인 미국 시장을 선점하고, 유럽 시장마저 넘보고 있다. 이들이 단순히 ‘하드웨어’나 ‘기술’로 세상을 제패한 걸까?

 이제는 과거의 노동적 근면성만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는 세상이다. 밀어붙인다고 밀어붙여질 세상도 아니다. 세상은 다차원적이고 복잡다단하다.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고 합리적인 문화의 창출만이 차이를 만드는 세상이다. 한국 기업들이여, 제발 문화에 눈을 떠라! 잊지 마라, 문화가 미래요, 생명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