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탄 타타(Ratan Tata) 회장의 이름은 매년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부호 명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인도 최고의 부자 명단에도 들지 못한다. 그러나 <타임>, <뉴스위크>, <포브스> 등 유력 잡지들은 모두 라탄 타타 회장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기업가로 선정하고 있다. 라탄 회장이 이렇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6년 10월 500만 톤의 생산능력을 가진 타타스틸(Tata Steel)이 거의 4배 규모인 영국·네덜란드 합병 철강사인 코러스(Corus)를 인수하는 ‘모험’을 시도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라탄 회장은 마치 ‘인기 관리’를 하는 연예인처럼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다. 올해 1월에는 세계 최저가인 250만원대 승용차인 ‘나노(Nano)’를 선보였으며, 3월 말에는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인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했다. 라탄 회장의 이런 명성은 140년 동안 장수한 타타그룹의 저력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함께 개인적인 비전과 결단력이 빚어낸 것이다.

비즈니스 뛰어넘는

국가와 국민 향한 경영철학

타타그룹(Tata Group)은 1868년 페르시아계 파르시(Parsi) 상인가문 출신인 잠세트지 타타(Jamsetji Tata)에서 출발했다. 파르시는 1000년 전에 ‘우유에 설탕이 녹아들 듯 조용히 융화되어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인도에 정착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인도의 국가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바로 타타그룹을 통해서였다. 타타그룹은 1907년 타타스틸 설립을 시작으로 수력발전, 화학, 항공, 기초과학연구, 학교 등 기간산업들을 일으켰다. 타타스틸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네루 총리도 잠세트지 타타를 ‘1인 경제기획원’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변화의 파고를 넘다

1947년 독립 이후 ‘사회주의식 경제체제’를 운영했던 인도 정부는 외국 기업들의 단독 진출을 불허했다. 이 때문에 외국 기업들은 현지 기업과 합작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기업이 바로 가장 믿을만한 현지 파트너로 평가받던 타타그룹이었다. 이 때문에 타타그룹은 수많은 사업 분야로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었고, 자회사 수가 300개 이상으로 늘었다. 여기에는 J.R.D. 타타가 1938년부터 53년간 그룹회장직을 맡으면서 카리스마를 통한 느슨한 연방체제 형태로 운영해 온 덕도 있었다.

라탄 타타 회장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했으며, 삼촌인 J.R.D 타타 회장이 불러 들여 1962년에 타타그룹에 입사했다. 이후 타타스틸 제철소 등 여러 그룹 자회사에서 현장경험을 쌓은 후 1971년에 처음으로 한 그룹사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1981년에는 그룹의 지주회사 중 하나인 타타 인더스트리즈(Tata Industries)의 회장에 임명되었다. 타타 인더스트리즈는 그룹의 전략을 수립하는 씽크탱크(Think-Tank)인 동시에 하이테크 부문의 신규 진출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그룹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철강과 유틸리티 같은 전통 산업과 정보통신(IT)과 생명공학(BT) 등 미래 산업을 포함하여 8개 핵심 사업 부문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계획은 너무 혁신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 뒤인 1991년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인도 정부는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J.R.D 타타는 최연소 이사였던 라탄 타타를 그룹 회장으로 임명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후 라탄 회장은 그동안 구상해 온 구조조정 계획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최우선으로 추진한 것은 타타그룹을 ‘진정한 하나의 그룹’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그룹사들을 냉정히 평가하는 작업을 했다. 기준은 해당 분야 세계 톱3에 들 수 있는 능력, 글로벌 경쟁력, 수익력이었다. 이런 기준에 미달하는 그룹사들과 새로운 경영방침에 저항하는 경영진이 운영하는 회사들은 매각했다. 그 결과 화장품, 쿠킹오일과 같은 비핵심 사업과 섬유, 시멘트 같은 경쟁이 치열한 사업은 퇴출시키고 그룹 수를 90여 개로 줄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피(彼)인수를 방지하고 이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그룹사들의 평균 지분보유율을 3%에서 26%(현재 주요 회사 지분율은 30~80%)까지 높였다. 나아가 직접 핵심 그룹사들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통제와 결속력을 강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라탄 회장이 타타스틸의 구조조정을 추진한 과정을 살펴보자. 타타스틸은 1907년에 설립되어 1912년에 최초로 철강을 생산했고, 독립 후에는 정부가 정해준 물량과 가격대로 생산하고 판매하여 거의 ‘사회서비스기관’으로 전락했다.

타타스틸의 회장직에 취임한 후 라탄 회장은 첫 경영회의에서 화물료 상승으로 그 해에 2600만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를 듣고 당장 비용을 8% 줄일 것을 지시했다. 경영진들은 이 지시에 크게 당황하고 반발했다. 비용은 매년 상승하는 것이고 정부가 지정한 인상률에 따라 철강 판매가격을 인상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 라탄 회장은 6개 대형 컨설팅 회사들로부터 경영자문을 받았다. 이 중 맥킨지는 타타스틸을 당장 매각할 것을 권고했다. 규모, 마케팅 경험, 제품믹스에서 열위일 뿐 아니라 철강관세 인하정책(과거 80%에서 20% 이하로 감축)으로 인도 시장에 수출하는 외국 기업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라탄 회장은 많은 고민 끝에, 타타스틸이 고품질의 대규모 광산과 탄광을 보유하고 있어 규모 확장, 설비 현대화, 제품 다양화를 추진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작업으로 가장 먼저, 그룹 내 엔지니어들을 총동원하여 자체적으로 용광로를 설계하고, 교대작업을 하며 26개월 만에 용광로 건설을 마치고 가동했다. 이는 신일본제철에서 파견 온 자문단이 예상했던 것보다 6개월이나 빠른 것이었다. 또한 엄격한 노동법으로 대규모 인원 감축이 쉽지 않았지만, 인도 최초로 자발적 퇴직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직원을 7만9000명에서 4만1000명으로 줄이기도 했다. 

과감한 결단력과 신속한 추진력으로 타타스틸은 100년 흑자경영 역사에 오점이 될 수 있었던 위기를 잘 극복했다. 철강 생산량도 1992년에 200만 톤에서 400만 톤 이상으로 증대됐고, 2001년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계 최저 원가를 가진 ‘세계 최고 경쟁력 보유 철강사’로 선정되었다.

최근 세계 자동차 메이저 회사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타타모터스도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쳤다. 1945년에 설립된 텔코(Telco; 2003년에 타타모터스로 사명 변경)는 증기기관차를 생산하는 회사였다. 한때 연간 100대의 기관차를 생산했던 텔코는 철도 산업이 사양화하자 1954년에 독일 벤츠와 합작으로 트럭과 엔지니어링 제품을 생산했다. 정부 규제 때문에 승용차 부문으로는 진출할 수가 없었다.

이후 규제가 풀리자 라탄 회장은 오랫동안 품어 온 승용차 생산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이번에는 외국 기업과 합작하는 쉬운 길을 걷지 않고, 자체 기술로 승용차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도요타와 폭스바겐 등의 합작 제의를 거절했고 벤츠와의 기존 합작투자도 정리했다. 라탄 회장은 고유 기술로 승용차 개발을 성공시켜 인도 제조업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애국심’이 있었지만, 금융시장의 반응과 산업분석가들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유럽의 3분의 1 수준인 3억5000만달러의 개발비를 들여 3년 만인 1998년에 마침내 인디카(Indica)를 출시했다. 그러나 품질이 형편없어 외부의 반응은 더욱 냉소적으로 변했다. 더욱이 인도 정부의 핵실험 강행에 따른 심각한 경기침체로 텔코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라탄 회장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종업원 수를 3만6000명에서 2만2000명으로 줄이고, 공급업체 수도 절반으로 감축했으며, 엄격한 품질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3년간의 분투 끝에 경영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은 인도 승용차 부문 2위인 현대자동차를 바짝 뒤쫓고 있다. 

제2의 성장을 위한 ‘글로벌 전략’ 추진

10년 동안 추진해온 그룹 구조조정이 성과를 거두자 라탄 회장은 새로운 천 년을 맞으면서 다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시 금융, 자동차, 제약, 광물, 석유 같은 산업에서는 M&A를 통한 글로벌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더욱이 인도계인 미탈(L. N. Mittal) 회장이 세계를 무대 삼아 부실 철강사들을 인수하여 급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럭키-골드스타가 1995년에 LG로 사명과 로고를 바꾸고 기술력을 앞세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벤치마킹했다. 결론은 ‘제2 성장’을 위해 더 이상 인도 시장에 집착하지 않고 글로벌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작은 타타 티(Tata Tea)였다. 타타 티는 2000년에 규모가 3배인 영국 테트리(Tetley)를 차입인수(LBO) 방식으로 4억3500만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세계 2위 차(茶) 생산업체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런 학습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확보한 라탄 회장은 2003년에 M&A와 전략개발 전문가 2명(한 명은 영국인)을 외부에서 영입했다. 이후 철강, 자동차(대우상용차 인수), 호텔, 통신 등의 사업 부문에서 잇따라 해외 M&A를 성사시켰다.

2005년에 200여 명이 참가한 연례 그룹경영진 회의에서 화두는 ‘글로벌 전략 추진’이었다. 라탄 회장은 “대담해라, 크게 생각하라, 앞서 나가라, 결코 쫓아가지 마라(Be bold, Think Big, Lead, Never Follow)”고 강하게 주문했다. 이 결과 타타그룹은 2005년에 총 17건의 M&A를 성사시켰으며 이 중 14건은 해외 M&A였다.

인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최대 재벌그룹

타타그룹은 현재 인도 최대의 비즈니스 그룹이다. 2006년 매출액은 288억달러이며, 코러스를 포함할 경우 500억달러에 육박한다. 27개 상장 그룹사들의 시장가치 합계는 663억달러(2008.4.30 현재)로 2005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룹은 엔지니어링, 재료, 에너지, 화학, 서비스, 소비재, 정보 시스템 및 커뮤니케이션 등 7개 사업 분야의 98개 그룹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탄 회장의 오랜 비전은 “10년, 15년 후에 규모뿐만 아니라 품질과 인적자원, 사업 방식, 가치체계와 윤리에서 최고인 기업을 만드는 것”이었다.

타타그룹은 인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그룹이기도 하다. 잠세트지 타타가 민족자본을 모아 타타스틸을 설립한 이래 그룹의 역사와 경영철학이 언제나 국가와 국민들을 향해 왔기 때문이다. 타타그룹은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기업지배구조, 종업원복지제도, 기업사회적책임(CSR) 면에서 어느 선진국 기업보다 앞선다. 지주회사인 타타선즈(Tata Sons)의 약 66%는 타타가족들이 설립한 자선재단들이 보유하고 있다. 라탄 회장 지분은 1% 미만에 불과하다. 타타스틸은 1912년에 8시간 근무제도, 1928년에 출산휴가, 1934년에 종업원 이익공유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그룹사들과 자선재단들을 통해 사회복지 및 환경 사업에 기여하고 있다. 2006년에 그룹 자체만으로 이익의 2.2%인 6070만달러를 이 분야에 지출했다.

올해 초 선보인 나노자동차에도 비즈니스 개념보다는 인도 서민들의 복지수준을 개선시켜보고자 하는 라탄 회장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승용차 바디패널을 시골의 중소 업체들에게 키트 형태로 판매하여 조립하게 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보통사람들을 위한 차(People’s Car)를 만든다는 방침이다.

‘부자는 지루하다’고 라탄 회장은 말한다. 과시하기 위해 요트 따위를 소유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출근용 승용차는 타타모터스가 생산하는 인디고(Indigo; 인디카의 세단형)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으며 소박한 생활을 한다. 조용하며 수줍은 성격으로 명성을 싫어하고 연단이나 청중들의 박수를 피한다.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공정 공평하고, 모두에게 개방적이다. 정직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라탄 회장은 공식행사가 없으면 매일 저녁 7시30분에 그룹 본사인 ‘봄베이 하우스(Bombay House)’에서 퇴근하여 꼴라바(Colaba)에 있는 집으로 간다. 저녁 외출은 드물다. 골프를 그만둔 지는 오래되었으며, 주말에는 직접 설계한 해안가 집에서 독서를 하거나 애완견들과 함께 해변을 산책한다. 디자인하기를 좋아하는 라탄 회장은 은퇴한 후 조그마한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여 취미로 제품을 개발할 거라고 말한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하면 가능하게 만들까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연례 휴가는 항상 연말에 있다.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사라져 거의 8일 동안 연락을 단절한 채 지낸다. 당연히 12월28일인 그의 생일 축하 파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