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들이 위기경영을 외치고 있다. 세계무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기업들이 위기경영을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기업들이 우려하는 위기는 환율이나 유가와 같은 외부 요인과 지속적인 혁신의 실패 등 내부 요인이 기업들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성공만큼 더 큰 실패 요인은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정 수준의 성공을 경험한 후 과거의 성공 방식을 고수하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경영에 강한 기업들은 시장 변화에 앞서 필요한 경쟁력을 미리 확보한다. 8월로 10주기를 맞는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위기경영이 그런 점에서 지금도 주목받고 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위기에 미리 대처하면서 이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특히 SK그룹 급성장의 밑바탕이 됐던 정유 사업 등은 거듭된 실패에도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 선대회장의 뚝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우리 기업들의 위기경영 방식은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후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데 급급한 형태였다. 외환위기 당시 진행된 기업들의 위기경영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 저수익 사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 과다한 차입 등으로 인해 상당수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많은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서 자산을 매각하고, 인원을 감축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반면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위기경영은 미래를 위한 준비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해 잘 나갈 때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순이익 1조원 클럽에 가입한 기업이라도 방심하다가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잠복하고 있는 위기 요인들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나누는 기준은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 가능한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위기에 미리 대처하고, 위기 요인을 적절히 관리해야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SK그룹이 위기 때마다 재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최종현 회장의 이 같은 위기경영 덕분이라 것이 재계 평가다.

선택의 기로에 선 CEO

지금부터 시계를 1967년으로 되돌려보자. 당신은 자본금 5000만원짜리 평범한 직물 회사의 사장석에 앉아 한숨을 내쉰다. 옷감이건 이불감이건 찍어내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경기가 좋지 않은 데다 경쟁업체들까지 난립해 살아남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직물의 원료인 원사 공급마저 불안정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기가 좋지 않은 것은 내 책임도 아니고,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다. 경쟁업체의 난립? 일일이 그들을 찾아다니며 공장 문 닫으라고 사정할 수도 없다. 다만 경쟁업체보다 더 나은 품질의 상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장의 기술을 보유하지 않는 한 품질을 높이려면 결국 비용이 늘어난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인건비를 줄여서라도 비용을 낮춰 경쟁사보다 값싼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원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거래처 사람들을 구워삶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물론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사 공급이 문제가 된다면 아예 자체적으로 원사공장을 짓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이 불황인데 원사공장을 짓는다? 국내 시장은 불황일지 모르지만, 시장이 꼭 국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 된다.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원사공장을 지어 놓으면 원자재의 안정적인 공급에서부터 새로운 시장의 개척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각도의 활로가 열릴 수 있다.

당신은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언뜻 보기에 첫 번째 방법이 가깝고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망하는 길이다. 무리하게 인건비를 낮추면 노사 갈등이 발생한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제품의 품질은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 이 모든 것을 가격 경쟁력 하나만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쩌면 회사를 경영할 자질이 없는 CEO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방법은 상당히 화끈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원사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만 30억원, 자본금 5000만원짜리 회사에 그런 거금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한국 땅에서 버티는 것도 만만치 않은 마당에 무슨 재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한단 말인가.

 이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판이다. 당신은 지금, 연매출 55조원의 대한민국 대표기업 SK가 30여 년 전에 맞닥뜨린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조금 덜 위험해 보인다는 이유로 제 살을 갉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길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1960~1970년대의 숱한 직물공장 가운데 하나로 끝날 것이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후자를 선택했다. 1969년 완공된 원사공장을 필두로, 언뜻 봐서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석유 사업과 이동통신 사업, 나아가 생명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무한 성장의 발판을 다진 사람이 바로 최 선대회장이다. 그때마다 주변사람들은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우려와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 있게 성장 전력을 추진했다.

대통령에게 경제 위기 직언

1997년 10월 청와대. 최종현 선경그룹(현 SK그룹)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고 있었다. 경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김 대통령이 경제인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의견을 듣기 위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겸하고 있는 최 회장을 초청한 자리였다. 최 회장은 당시 폐암수술을 받은 직후여서 산소통과 함께 산소호흡기를 갖고 오찬에 임했다.

그날 최 회장은 김 대통령에게 외환과 환율, 은행 이자율에 관해 직언을 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 난다”는 경고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최 회장은 긴 한숨만 내쉬었다.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알아보겠다”는 말뿐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도 만나 의견을 들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1997년 11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한번 김 대통령을 만났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최 회장은 임창열 부총리 겸 제정경제원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한국에 대한 IMF 긴급자금 지원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보도를 접하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폐암말기 진단을 받은 그가 산소통까지 짊어지고 기어이 청와대를 찾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재계를 대표하고 있다는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병마와 싸우다 1998년 8월26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병상에서 그는 여러 차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에 몰두하고 싶다.”(<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 최종현 지음)


19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국내외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1978년 10월 이란에서 발생한 정치적 소요 사태는 폭동으로 발전했고, 이듬해 1월16일에는 결국 팔레비 왕정이 무너졌다.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과 함께 국제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세계 경제는 다시 마비됐다. 제2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다. 이런 와중에 국내에서는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데 이어 12월12일에는 쿠데타가 발생한다.

“정치적 혼란도 혼란이지만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원유 재고가 10일분밖에 없는데 현물시장 가격은 40달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12월13일 선경그룹 긴급회의에 모인 사장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석유 때문에 모든 기업은 비상이 걸려 있었고, 부도 위기에 내몰린 기업도 적지 않았다. 최종현 회장의 시선은 말석에 앉은 김창호 부장을 향했다. 그는 사우디의 인맥을 연결하는 SK그룹의 창구였다.

“김 부장, 사우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하루에 한 5만 배럴만 달라고 해.”

하루 5만 배럴이면 수급 안정이 가능한 물량이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가. 사장들에게 최 회장의 지시는 꿈같은 얘기로 들렸다. 최 회장이 그토록 자신 있게 큰 소리를 친 이유는 특별히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6년 넘게 우정을 쌓아 온 사우디아라비아의 친구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김 부장은 불과 이틀 뒤 최 회장에게 희소식을 전해왔다. 김 부장은 런던에 머물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민간인 창구인 압둘라 박쉬를 만났고, 그를 통해 야마니 석유장관에게 사정을 전했다. 최 회장의 친구였던 야마니는 황태자를 설득해 벨기에로 향할 예정이던 5만 배럴을 선경에 배정하도록 했다.

최 회장은 3년간 하루 5만 배럴의 원유를 배럴당 24달러에 공급받는 내용의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현물시장 가격은 42달러였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당초 최 회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약을 1월분부터 소급해서 적용했고, 몇 개월 후에는 5만 배럴을 추가로 공급했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졌던 원유 공급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최 회장의 오랜 투자 덕분이었다. 1973년 최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목적으로 왕비의 조카인 베드라위의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유공장 설립은 중동전쟁 발발과 석유파동으로 결국 무산됐다. 정유공장의 설립 무산에도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인맥에 대한 신뢰를 계속 이어갔다. 좀처럼 남을 믿지 않는 아랍인들도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일단 열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작은 이익에 연연해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언젠가 닥쳐올 미래를 위한 투자였던 셈이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석유의 무기화’에서 비롯됐다면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은 ‘공급 부족’에서 기인했다. 이란을 비롯한 일부 산유국들이 감산을 단행하자 메이저 석유 기업들도 원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한석유공사 지분 50%와 경영권을 갖고 있던 걸프도 1980년 3월 대한석유공사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한다. 최 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구해오기 직전이었다. 걸프는 결국 8월19일 철수를 공식 결정했고, 2개월 뒤 정부는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방침을 발표한다. 당시 유공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국내 대부분 대기업들이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정부는 인수 자격 기준으로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을 우선적으로 내걸었다.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원유 확보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자금 조달 능력과 투자 유치 능력, 경영 관리 능력, 산유국과의 교섭 능력 등도 조건으로 제시됐다.

1980년 11월 28일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의 기자회견은 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선경그룹이 유공 인수자로 최종 결정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과 선경그룹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정부의 선정 이유는 이랬다.

“우리나라 종합상사로서는 처음으로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하고 있고, 앞으로 원유 추가 확보의 잠재력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산유국과의 친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유공 인수전에 뛰어든 대부분 대기업들이 자산 규모와 재계에 대한 영향력, 현금 동원력만을 앞세우고 있는 동안 최 회장은 오랜 기간 쌓아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해 원유 확보 능력을 직접 입증해 보였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친구들이 운영하고 있던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달러를 조달, 오일머니 유치 능력까지 증명했다. 정유 사업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준비해온 선경그룹의 숙원사업이었다. 

거듭된 실패에도 투자 지속, 산유국의 꿈 이뤄

“회장님, 터졌습니다. 초대형입니다.”

1984년 7월 어느 날 SK그룹 회장실. 노크도 없이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김항덕 유공 사장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최 회장에게 내밀었다. 예멘 마리브 유전의 운영을 맡고 있던 ‘헌트오일’이 투자자들에게 보내온 일일보고서였다. 거기에는 매일매일 진행되는 작업 경과와 결과가 담겨 있었다.

“알리프 제1유정에서 석유가 나왔습니다. 매장량이 3~4억 배럴은 되는 모양입니다.”

“왜 그리 호들갑이냐”며 김 사장을 진정시키면서도 최 회장은 ‘억’이라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깊이 4000m를 예정하고 시추를 시작했는데 2000m도 안 된 지점에서 석유가 나왔다. 예상보다 빠른 결과였다. 이번에는 최 회장이 안절부절 못하고 김 사장의 주위를 맴돌았다. 일부에서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말렸지만 해외 유전에 대한 투자가 옳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김 사장은 아직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회장님은 ‘정말 억 단위냐’고 몇 번이나 되물으시면서 자리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셨죠. 그리고는 금방 매장량을 금액으로 환산해 내시더군요. 그때처럼 기뻐하시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만큼 유전 개발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거죠.”

북예멘 정부는 시추정에서 원유가 발견된 지 16개월만인 1985년 11월 “상업성이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추정 매장량은 10억 배럴에 달했다. 마리브 유전은 생산시설과 송유관 건설을 거쳐 1987년 12월13일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20일 유공해운 소속 ‘Y위너스호’가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한다. 산유국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유전 개발은 성공률이 5%에 불과할 정도로,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사업이다. 유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리브 유전 이전에 이미 실패의 경험이 있었다. 1983년 4월 100만달러를 투자해 미국의 코노코(Conoco)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에서 8개의 탐사정을 시추했지만 미미한 가스층을 발견하는데 그쳤다. 이듬해 미국의 옥스코(Oxco)와 공동으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 제9광구에서 또다시 개발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석유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개발권을 모리타니아 정부에 반환하고 철수했다.

거듭된 실패에도 유공은 1989년 말 미얀마에서 거액을 투자한 초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미얀마 정부로부터 육상에 위치한 C광구 개발권을 따내고 독자적인 석유 탐사에 나선 것이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브리티시오일’이 지하 500m의 얕은 깊이에서 원유를 생산한 적이 있어 세계 석유 업계가 눈독을 들이는 지역이었다. 더군다나 세계 메이저 업체들이 아직 본격적인 탐사를 벌인 적이 없는 ‘처녀지’였다.

1990년 2월 유공은 미얀마에 지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탐사에 착수했다. 시추 비용을 부담하겠다며 지분 참여를 요구하는 제의가 잇달았지만 유공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작업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당시 미얀마에서 작업에 참여했던 이양원 SK㈜ 자원개발팀 부장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석유 탐사는 대체로 해상보다 육상이 용이한데 미얀마는 예외였어요. 시추 지역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밀림 한 가운데 위치해 있었습니다. 헬기가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해 자재도 모두 헬기로 실어 날라야 했죠. 회장님은 세 번이나 현장을 찾아와 직원들을 격려했을 정도로 이 사업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습니다.”

탐사작업은 외부와 단절된 열대우림의 악조건에서 4년 동안 계속됐다. 가끔 작은 유징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규모 유전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의 석유 업체 아모코(Amoco)가 인근 B광구에서 탐사를 벌이고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유공은 1993년 말까지 모두 5600만달러를 쏟아 붓고 결국 철수했다.

“당시 5600만달러면 웬만한 기업 하나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죠. 제조업은 실패하면 공장에 시설이라도 남지만 석유개발은 흔적도 없습니다. 그때 회장님이 그러시더군요.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라 기업인이라고. 물론 기업의 최종 목적은 이윤이 되겠지만 회장님은 유전 개발을 통해 유공을 석유개발 기업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해외에 유전을 갖고 있던 걸프가 유공을 경영할 때와는 사정이 달랐습니다.”(김항덕 SK그룹 고문)

실패에 대한 문책보다는 용기 북돋워

석유개발 사업은 고도의 기술과 대규모 자본 투자가 요구되고, 미얀마의 경우처럼 위험성도 높다. 이 때문에 최고경영자의 의지와 결단이 없이는 결코 시작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는 사업이다. 최종현 회장이 1991년 11월 쓴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제목의 자서전에는 석유개발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개발 사업이란 본래 1~2년 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그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경상이익금의 일정 부분을 무조건 석유개발 사업에 투자하기로 회사 차원에서 결정해야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석유개발 사업에 참여한 사람을 문책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실패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실제로 최 회장은 ‘미얀마 실패’에 대해 아무도 문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사업’이라며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석유개발 사업을 흔들림 없이 계속 진행했다.

유공은 미얀마에서 시추작업 중이던 1990년 6월 이집트 수에즈 만 중북부 해상에 위치한 북 자파라나 광구에 대한 탐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투자 4개월 만에 원유층이 발견됐고, 4년 후에는 생산에 돌입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유공은 석유와 가스뿐만 아니라 다른 광물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1989년 12월 터키 최대의 광물 생산 회사인 에게메탈(Ege Metal)과 합작해 크롬 광산 개발에 나섰고, 이듬해 4월에는 호주의 유연탄 개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94년 1월 탐사권을 획득한 호주 토가라 지역의 유연탄광은 추정 매장량이 7억7000만㎥으로 국내 기업의 해외 자원개발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같은 최종현 회장의 열정으로 시작된 SK에너지가 지금까지 확보한 원유 환산 매장량인 5억 배럴을 배럴당 120달러로 환산하면 그 가치는 60조원에 달한다. SK에너지 전체 자산 규모인 15조원의 4배에 이르고, SK그룹 전체 자산 60조원과도 맞먹는 규모다.

SK의 원유 확보량은 자원개발을 시작한 지 20년 만인 지난 2004년 말 3억 배럴에 불과했으나 2004년 이후 최태원 회장이 자원개발 조직과 인력, 투자를 대폭 늘리면서 불과 3년 만에 2억 배럴 이상 증가했다.

SK 관계자는 “비산유국인 대한민국에서 해외 석유개발은 경쟁력 확보의 의미를 넘어 생존 자체를 담보하는 중대한 사업”이라며 “SK는 25년간의 석유개발 노하우를 활용해 정유 기업에서 석유 기업으로 변모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 해외 석유개발 사업 초기 잇단 실패에도 최종현 회장의 석유개발 의지와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이미 처음 해외 자원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석유개발 사업은 막대한 투자비를 필요로 하고, 성공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우리로서는 자원의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고, 그 일이 설사 회사에는 큰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우리나라의 자본이 돼 국가적인 이득을 안겨주는 결과가 되므로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침내 SK는 1984년 7월 북예멘 마리브 광구에서 처음으로 추정 매장량이 10억 배럴에 달하는 대규모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1987년 12월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 생산이 시작됐다. ‘무자원 산유국’을 향한 최 회장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최종현 회장 사후 회사 경영을 맡은 최태원 회장은 선대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해외 자원개발 사업을 한층 강화했다. 이 같은 2대에 걸친 노력 덕분에 SK그룹은 현재 전 세계 16개국에서 31개에 달하는 탐사 및 생산 광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확보한 원유 매장량만 5억 배럴에 달한다. 이는 우리 국민이 약 250일가량 쓸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한편, SK그룹은 올해 초 ‘회사 내 회사’, 곧 CIC(Company In Company)제도를 도입해 해외 자원개발 부서의 의사결정 구조를 최대한 간소화하고, 자원개발 지원부서 2곳을 새로 만들었다. 또 올해 4539억원을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투자하고, 카자흐스탄, 브라질 등 4개국 광구에서 새로 석유 탐사에 나설 계획이다. 1983년 최종현 회장이 먼 훗날을 기약하며 씨를 뿌렸던 ‘무자원 산유국의 꿈’은 지금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

만화로 보는 최종현 회장의 SK신화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열정과 도전정신을 만화로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1960년대부터 1998년까지 SK그룹 최고경영자로서 에너지ㆍ화학ㆍ정보통신 산업 등을 개척하며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만든 고 최종현 회장의 일대기를 만화로 제작, ‘하이경제(hi.korcham.net)’ 사이트에 지난 7월7일부터 연재하고 있다.

이 만화는 최 회장의 유년시절과 섬유 및 화학 산업을 바탕으로 한 선경그룹의 발전 과정, 그리고 SK그룹의 에너지ㆍ정보통신 산업 진출 과정 등을 상세히 담았다. 또 세계 최초로 CDMA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한 치열한 기술개발 장면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설치를 위해 고군분투한 내용,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다는 철학의 조림 사업과 장묘문화 개선을 위해 타계 후 화장을 치른 내용 등이 소개된다.

만화가 유영수 화백이 제작을 맡은 이번 <10년 앞을 내다본 경영인 최종현>은 총 16부로 구성됐으며 매주 두 편씩 8월말까지 연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