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은 올해를 100년 장수기업으로 지속 성장하는 원년으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2015년까지 총자산 100조원, 당기순이익 1조원 이상의 재무성과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근 신창재 회장은 “그 동안 효율과 성과 중심의 내실 다지기에 중점을 둬 왔다면 앞으로는 내실을 전제로 한 성장 전략을 펼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교보생명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종신, 연금보험 중심의 생명보험 고유 영역과 퇴직연금 등 핵심 사업 마케팅 강화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비즈니스 영역에서 성공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그래서 단순한 외형 성장보다는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성장’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해외 시장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다져진 내부 역량을 바탕으로 성장 잠재력이 많은 중국 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는 것. 현재 비즈니스 모델 개발과 합작 파트너 선정을 위해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운용 부문도 글로벌화하고 있다. 최근 자회사인 교보투신을 세계 최대 보험그룹인 AXA그룹과 손잡고 조인트벤처로 전환시키기로 했다.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풍부한 장기 자산운용 노하우를 갖고 있는 세계적 강자와 손잡게 됨으로써 자산운용의 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시장에서 고객이 가장 선호하는 회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먼 미래의 꿈이 아닌 현실의 목표로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100년 장수기업으로 웅비할 교보생명의 새로운 50년은 과거 50년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외부 지원 없이 단일 기업 20위 규모로 성장
창업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기업이 부지기수인 우리 현실 속에서 교보생명의 성장은 세인의 눈길을 끌 만하다. 주인이 바뀌지도 않고 50년간 이름을 그대로 지켜온 데다 어떠한 외부의 지원 없이 오직 생명보험 한길을 걸어오며 독자적으로 생존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매출은 12조3000여억원. 단일 기업으로 국내 20위 규모다. 창립 첫해 2200만원이던 자산은 이제 50조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계약자는 530만 명, 보유계약은 1000만 건이 넘는 ‘국민기업’이 됐다.
교보생명은 국내 보험 산업을 이끌고 있는 리딩 컴퍼니(Leading Company)다. 특이한 점은 다른 생명보험사와 달리 재벌 그룹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2008년 3월 현재 자산 규모는 46조1664억원으로 50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매출 규모로는 삼성생명에 이어 두 번째다.
그 동안 교보생명이 역경에 처한 고객에게 지급한 보험금은 무려 115조원. 현재 보유계약 기준으로 향후 지급하기로 약속된 보험금(주계약 기준)도 244조원에 이른다. 국민 1인당 500만원을 보장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주목할 점은 창업 이후 50년간 주인이 바뀌지 않고 외부 지원 없이 독자 성장해온 점이다. 국내 금융회사로는 유일하다. 자고 나면 금융회사들이 문을 닫고 주인이 바뀌던 외환위기 와중에서도 교보생명은 단 한 푼의 공적자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다. 경영 혁신에 박차를 가해 경영 효율, 이익 창출 능력 등을 한층 강화시켜 더욱 강한 회사로 탈바꿈한 것. 실제 1990년대 교보생명의 이익 규모는 400억~500억원 수준이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2000년에는 한 해 동안 2540억원의 적자를 내기도 했다. 회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2001년 이후 현재까지 평균 순이익은 3000억원을 상회해 1990년대보다 무려 7배나 뛰었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외환위기의 파고를 헤치며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서일까? 창립 50주년을 맞은 교보생명 임직원의 표정에서는 남다른 감회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50년 성장의 비결…철학이 있는 회사
이처럼 교보생명이 50년 동안 한결같이 성장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신창재 회장은 최근 “고객과 시장의 환경 변화에 따라 적시에 잘 대응해 왔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 우물'을 판 회사라는 점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생명보험이라는 핵심 사업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생명보험업은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없고 오랜 세월 신뢰를 바탕으로 약속을 지켜야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어느 사업보다 철학이 중요하다. 업계에서 교보생명은 ‘철학이 있는 회사’로 통한다. 남다른 경영철학은 ‘모든 사람이 미래의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돕는다’는 핵심 목적에 잘 녹아 있다.
‘고객 지향’, ‘정직과 성실’, ‘도전정신’으로 집약되는 핵심 가치는 항상 경영의 나침반이자 방향타였다. 이러한 경영철학에 따라 생명보험 본업에 충실해 왔고 핵심 역량을 ‘좁고 높게’ 쌓아 올렸다.
M&A를 통해 인위적으로 덩치를 키우지도 않았다.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다각화할 만한데 좀처럼 본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때 손해보험업에 진출했지만 “생명보험업과의 시너지가 크지 않다”며 사업을 접기도 했다. 이렇게 쌓아 올린 생명보험사로서의 전문 역량은 상품 개발, 리스크 관리, 자산운용 등 생명보험 전 영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00년 이상 장수하는 글로벌 초우량 기업들이 대부분 본업에 충실하며 지속 성장해 온 것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발 앞선 변화 혁신도 성장의 비결로 꼽을 수 있다. 교보생명은 보험 산업의 중요한 시점마다 획기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으며 보험 시장을 이끌어 왔다. 외환위기를 맞아 외형보다 내실을 중시하며 지난 8년간 부단히 추진해온 변화 혁신은 더욱 강한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또 교보생명은 탈세, 정경유착, 뇌물 등과 거리가 먼 윤리적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에 거저와 비밀은 없다’는 경영철학이 확고했기에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수십 년간 윤리적 기업으로 명성을 쌓아 왔다. 이러한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은 고객 신뢰의 기반이 됐다. 이는 강력한 기업 이미지로 구축돼 무형자산이 되고 있다. 사회적 평가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장 환경 속에서 또 하나의 차별화 포인트라 할 수 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1958년 8월7일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열린 개업식에서 신용호 창립자는 이렇게 약속하며 대한교육보험의 닻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약속을 3년이나 앞당겨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광화문의 랜드마크 교보빌딩을 우뚝 서게 했다.
교보생명의 반세기 발자취는 한국 보험 산업 발전의 역사다. 한국전쟁의 상처로 피폐했던 1958년 8월, ‘대한교육보험’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라는 창립 이념을 내세운 교보생명은 회사명부터 달랐다. 다른 생명보험사와 달리 ‘생명보험’이 아닌 ‘교육보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교육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사명이었다.
창립과 동시에 내놓은 상품은 교육보험의 효시인 ‘진학보험’이었다. 교육과 보험을 접목시킨 독창적인 상품으로 다른 나라 어느 보험사에도 유래가 없었다. 교육보험은 당시 ‘배울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높은 교육열과 맞아떨어지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교육보험을 발판으로 교보생명은 창립 9년 만인 1967년, 업계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로도 교보생명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숱하게 거머쥐었다. 1984년 업계 최초 순보험료식 책임준비금 100% 적립, 1988년 업계 최초 계약자 이익배당 실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최초라는 타이틀은 보험 산업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업적으로 기록된다.
한편 교보생명은 전환기마다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으며 보험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1958년 첫선을 보인 교육보험은 곧바로 전 생명보험업계로 확산돼 개인보험 시장의 주력상품으로 떠올랐다. 198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암 보험은 보장성 보험 대중화의 신호탄이었다. 암 보험 출시 후 저축성 보험, 단체보험에 의존하던 보험업계는 점차 보장성 보험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한다.
2000년대에 들어 국내 최초로 내놓은 변액보험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됐다. 창립 25년만인 1983년에 총자산 1조원, 35년 만인 1993년에는 10조원을 돌파하며 발전을 거듭하던 교보생명은 1995년 4월 회사명을 ‘대한교육보험’에서 ‘교보생명’으로 변경한다.
내실경영으로 외환위기 파고 넘어
이렇게 국내 보험업계를 선도하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교보생명에게도 외환위기는 큰 시련이었다. 거래하던 여러 대기업들이 연쇄 도산하면서 무려 2조5000억원에 이르는 손실을 입게 된 것. 2000년에는 무려 2500억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한다. 이 시기에 경영일선에 나선 신창재 회장은 변화 혁신을 선포하고 “매출 순위는 의미가 없다”며 업계의 오랜 관행인 외형 경쟁을 중단시켰다. 경영의 패러다임을 볼륨(Volume)에서 밸류(Value)로 전환, ‘퀄리티(質)경영’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한 것. 질적 성장과 내실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교보생명의 변신은 고객 중심의 생산성 향상, 즉 ‘효율 높이기’에서 시작됐다. 생활설계사 수를 절반 이상 줄이고, 점포도 통폐합해 정예화했다. 덩치를 과감히 줄인 것이다. 마케팅 전략도 단기 저축성 보험 판매에서 중장기 보장성 보험 위주로 180도 전환하며 영업 관행을 혁신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 부문은 과감히 정리했다.
또 ‘떡은 떡집에 맡겨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며 유가증권 자산운용을 외부 전문회사에 통째로 맡겼다. 이 과정에서 외형은 줄었지만 변화 혁신의 약효는 교보생명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 놨다. 경영 혁신의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견고한 성장기반을 다졌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신 회장의 변화와 혁신에 따른 재무적 성과는 눈부시다. 취임 직전 503억원에 불과하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8.6배 늘어 4335억원을 기록했다. 취임 첫해 2540억원에 이르는 적자로 3500억원으로 줄어들었던 자기자본은 2002년 이후 매년 3000억~4000억원대의 이익을 창출하며 2008년 3월 현재 2조4400억원으로 커졌다. 7년 동안 7배나 성장시킨 경이적 기록이다.
최근 도이치방크, UBS 등 글로벌 금융사들이 ‘우수한 비즈니스 기반을 구축한 데다 성장 전망이 밝아 투자 매력도가 높은 기업’이라는 리포트를 잇달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교보생명은 지난 6년간 매년 3000억원대의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해 왔다.
지난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당기순이익은 4335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이익을 실현했다. 보험계약 유지율, 설계사 정착율·이익률 같은 제반 경영 효율은 업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수익성을 가늠해 볼 수 자기자본이익률(ROE)도 지난해 23%를 기록해 탁월한 이익 창출 능력을 입증했다. 다른 대형 생명보험사보다 2~3배 높은 수치다. 대표적인 재무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도 매년 꾸준히 향상돼 2008년 3월 현재 글로벌 수준(200%)을 넘어서 223%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신정평가’와 ‘한국기업평가’의 신용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AA’ 등급을 획득해 재무 건전성이 국내 최고임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러한 탄탄한 재무 건전성과 탁월한 이익 창출 능력 때문에 전문가들은 교보생명의 기업가치는 지속적인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5월 현대증권은 대형 3사 중 최고 수준의 이익 안정성과 확고한 영업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교보생명의 적정주가가 주당 32만원, 시가총액은 6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전망했다. 그야말로 블루칩 중의 블루칩으로 평가했다. 주식시장에서는 교보생명 같은 초우량 주식이 조속히 상장돼 주식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하고 있다.
교보생명 2人
신용호 창립자와 신창재 회장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6형제 가운데 5남으로 태어났고, 슬하에 4명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회사 경영만큼은 매우 단순하다. 창립자와 그의 장남인 신창재 회장 외에는 일절 경영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창재 회장은 2003년 9월 신 창립자가 86세의 나이로 타계한 뒤 교보생명을 이끌고 있다.
신용호 창립자는 1958년 8월 교보생명의 전신인 대한교육보험을 창립하면서 반세기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신 창립자는 우리나라 보험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7월14일 대만에서 열린 세계보험협회(IIS) 연차총회 행사장. 전 세계 32개국 보험사 CEO와 임원, 보험학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이 토마스 사게르 (Thomas W. Sager) 미국 텍사스대학 교수 등 4명에게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을 수여했다.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은 신 창립자의 뜻에 따라 세계보험협회(IIS)가 1997년에 제정한 상이다. 보험 분야 연구에 공로가 많은 학자 등에게 매년 수여한다. 한국인 이름으로 유일하게 전 세계 보험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보험업계에서 차지하는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반세기 기반 마련한 신용호 창립자
대한교육보험을 설립하고 반세기의 기반을 닦은 창립자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교육과 보험을 접목시킨 교육보험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재무부 장관을 면담하기 위해 반년을 문전에서 기다려 설득했고, 숱한 고비를 넘기며 ‘대한교육보험’을 설립했다.
‘영업 전략’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초창기, 한 사람이 한 학교를 전담해 개척하는 ‘1인1교’전략을 전개해 황무지와 같았던 보험 시장을 개척했다. 교육보험으로 ‘자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꿈은 커다란 호응으로 이어져 성장의 발판이 됐고 1967년 단일 계약으로는 최고액인 170억원짜리 육군 단체계약을 따내면서 창립 9년 만에 대한교육보험을 업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또 경호를 이유로 건립 중인 22층 건물을 17층에서 자르라는 청와대 경호실의 요구에 뜻을 굽히지 않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차라리 내 몸을 자르라’는 편지를 써 빌딩을 지켜낸 일화도 유명하다.
광화문 교보빌딩 지하 1층에 국민의 책방 ‘교보문고’가 자리 잡은 것도 신 창립자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보유 장서가 500만 권에 이르고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연간 4000만 명. 우리나라 인구와 맞먹는다.
이런 교보문고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산고가 있었다. 신 창립자가 그야말로 금싸라기 땅에 서점을 열기로 마음먹자 임직원들은 노른자위 상권에 돈도 안 되는 서점을 왜 세우냐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사통팔달 이곳에 청소년들이 와서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하는 게 어찌 고급상가를 들이는 것에 비기겠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감독 당국과 중소 서적상의 반대에도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1981년 6월 교보문고를 개업할 수 있었다.
교보문고는 개장하자마자 곧 대한민국의 명소가 됐다. 2700평 매장은 단일 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고 서가 길이는 무려 24.7㎞이었다. 교보문고는 신 창립자의 말대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누워서 보려면 누워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하루 종일 보려면 종일 보고, 사기 싫으면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고 싶으면 사가도 되는” 광활한 ‘책의 숲’이 됐다.
100년 기업 토대를 만든 신창재 회장
가장 큰 위기에서 변화혁신으로 교보생명의 체질을 바꾼 것은 신창재 회장이다. 신 회장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학 의대 교수로 재직하다 불혹을 넘겨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회장에 취임해 경영일선에 나선 시기는 2000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모든 금융기관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다. 수조원에 이르는 손실로 말미암아 교보생명도 생존을 걱정할 만큼 큰 위기였다.
이 때 신창재 회장은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변화와 혁신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경영 혁신에 착수했다. 5만 명이 넘던 설계사(컨설턴트)를 절반 이상이나 줄여 영업조직을 정예화했다. 종신, 연금보험 등 장기 보장성 상품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여 상품 포트폴리오를 선진화했다. 그는 회사의 모든 조직과 전략, 규정, 제도, 업무 프로세스를 ‘브랜드 1위 회사’라는 비전에 맞게 바꿔나갔다.
신 회장의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중요한 시점마다 임직원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며 위력을 발휘했다는 평이다. 그는 올해 초 정기 임원 인사를 마치고 호루라기를 불어 화제가 됐다. ‘대표선수를 선발했으니 새로운 전략과 목표를 향해 새 출발하자’는 의미였다. 신 회장이 울린 호루라기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2000년에는 ‘교보생명 파산’이라는 충격적인 가상뉴스를 제작해 변화를 주저하던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며 변화와 혁신의 첫 단추를 끼우기도 했다. 지난 2001년 회사 비전과 CI를 선포하는 자리에 개그맨 이경규씨 가면을 쓰고 나타난 일화도 유명하다. 간판만 바꾼다고 회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야 비로소 변화와 혁신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달한 것이다.
그의 감성경영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 5월 고객만족FP대상 시상식에서는 컨설턴트의 수고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을 해 찡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의 한결 같은 ‘칭찬경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신 회장은 매월 ‘이달의 칭찬 직원’들과 유쾌한 점심식사를 가진다. 1999년부터 시작한 ‘칭찬 오찬’은 9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벌써 100회를 넘었다. ‘칭찬을 주고받는 기업은 반드시 성공하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