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도 유통기한이 생기고 있다. 그만큼 패션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고가에 대한 망설임으로 세일을 기다렸다가 장만한 옷은 이미 철 지난 느낌으로 다가오고, 소장 가치를 따지며 어렵게 장만했던 명품도 한 철 지나고 나니 유행에 뒤지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빠른 유행에 대응하자니 얄팍한 지갑이 야속하다. 이 같은 사람들을 공략하는 옷이 바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다. 마치 햄버거 굽듯 유행하는 옷을 시장에 내놓으면 소비자들이 바로바로 구매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시장 변화에 빠르고 융통성 있는 대응…

1주일 단위로 신상품 쏟아내

일주일 단위로 신제품을 소량 생산해 쏟아내는 패스트 패션의 진원지는 유럽이다. 유럽인들은 거리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 만나는 것을 최악으로 여길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패스트 패션이 그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패스트 패션 트렌드는 미국과 아시아로까지 퍼지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길거리 복장을 몰래 찍은 일명 ‘파파라치 컷’이 인터넷에 뜨면 어느새 패스트 패션 매장에는 비슷한 액세서리와 옷이 걸린다. ‘나도 저렇게 입고 싶다’는 소비자들의 욕망이 바로 매출로 연결된다.

불황 속에서도 매출 ‘훨훨’

드디어 한국도 패스트 패션의 흐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계 패스트 패션계 1위에 등극한 자라(ZARA)는 지난 4월, 명동과 코엑스에 잇달아 매장을 열면서 한국 진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오픈 당일 하루 매출이 1억원을 넘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도 하루 매출 6000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 여성복 브랜드의 하루 평균 매출이 500만~1000만원, 한 달 평균 매출이 3억원 이상 되는 브랜드가 전체 여성복 중 20%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라의 성적은 가히 ‘돌풍’ 수준이다. ‘경기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과거 국내에 수입된 해외 패션브랜드들이 주로 고가 명품 위주였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합리적인 가격대에 트렌디하고 다양한 디자인을 앞세운 중저가 브랜드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68개국에 3750여 매장을 갖고 있는 자라는 패션유통업체인 인디텍스가 보유한 브랜드다. 세계 최대 패션유통업체인만큼 인디텍스는 지난해 14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이 중 2/3 이상을 자라 브랜드를 통해 거둬들였다. 한국은 69번째 진출국이다. 자라의 국내 진출이 다소 늦었다는 지적에 대해 관계자는 “2006년 한국 시장 입성을 결정했으나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찾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고 했다. 제조와 소매유통을 겸하는 자라는 고객과의 접점인 ‘매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오후, 자라 명동 매장은 쇼핑객들로 꽉 차 있었다. 쇼핑객들은 마치 빨래를 걷듯 옷걸이에서 옷을 척척 골라 한쪽 팔에 걸쳐 놓은 채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는 쇼핑객들 역시 무더기로 옷을 내려놓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국내 소비자들의 눈을 현혹시킨 자라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제1의 비결은 바로 ‘속도’다. 일반 패션 브랜드들이 시즌별로 신상품들을 내놓는다면, 패스트 패션 브랜드인 자라는 1주일 단위로 신상품을 쏟아 낸다. 끊임없이 변하는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다.

자라 매장을 자주 방문한다는 대학원생 장리나씨(25)는 “자라 고객이라면 매주 화·금요일에  두 번씩 신상품이 들어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다”며 “시즌별로 신상품이 들어오는 국내 브랜드는 신선도 측면에서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자라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신기하고 예쁜 디자인이 너무 많아요. 보기만 해도 얼마나 재밌는지…. 친구들이랑 시간 날 때마다 들르는 편인데,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요(웃음).”

200명이 넘는 자라 디자이너들은 고객의 취향과 요구사항, 선호 제품에 대해 꾸준히 연구를 하고 있다. 작년에만 1만2000개 이상의 모델을 매장에 공급했다. 

자라 매장에는 20·30대 젊은 여성 고객이 유난히 많다.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유럽풍 첨단 패션제품을 구입할 수 있어서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중 우위를 다투는 H&M(스웨덴)과 GAP(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상품 전략 덕분이다.

백아름 자라 코리아 매니저는 “자라의 목적은 고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물건들을 출시하면서도 시장의 과포화 현상을 막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저렴한 가격 또한 발길을 붙잡는다. 국내 체류 중인 재미교포 알렉시스(Alexis, 38)는 “다른 해외 브랜드는 현지보다 비싼 가격을 받는데 비해 자라는 국내외 가격이 동일해서 좋다”며 “오늘도 예쁘고 싼 청바지를 샀다”고 만족해했다. 또한 “한국 보통의 매장은 점원들이 달라붙어 불편한데, 자라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며 매장 분위기와 점원들의 서비스에도 극찬을 했다. 

한편, 매장 매니저들은 매출 통계와 창고의 제품 수를 비교해 그에 맞게 추가 주문을 한다. 나라와 도시 등 여러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스타일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상품을 필요한 만큼만 주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라는 재고량이 늘 0%다.

또한 현장에서 소비자의 구매 요구를 파악해 본사에 즉각 전달한다. 최단 기간 내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간’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 유통센터에서 주문을 받아 제품을 매장에 전달하기까지 유럽의 경우 평균 24시간, 미국이나 아시아의 경우 최대 48시간 내에 이뤄진다. 이를 토대로 본사는 새로운 컨셉트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전 세계에 있는 자라 매장은 일주일에 두 번씩 똑 같은 신상품을 공급받지만, 소비자 반응에 맞춰 차별화된 상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백 매니저는 “자라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기본으로 한다”며 “다양한 아이템의 옷을 조금만, 그러나 빨리 만들어 회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최신 유행 스타일의 옷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업체로서는 재고 부담을 줄이면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자체 보유한 유통망을 통해 생산과 판매, 배달 기능을 수직적으로 통합했다. 또 융통성은 확보하되 리스크는 줄여 재고를 최소화한 것도 성공 비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음껏 쇼핑 즐길 수 있는 장 마련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매장이다. 자라는 일단 매장이 넓고 상품이 많다. 명동점은 920㎡, 코엑스점은 그보다 넓은 1150㎡다. 상품 수도 1만5000여 점에 달한다. 매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디스플레이에 있어 패션의 탁월함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이는 고객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패션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백 매니저는 “공간 배치, 조명, 가구, 소재 등 매장 내 모든 것은 고객이 자유롭게 최신 패션 트렌드를 찾을 수 있도록 신중하게 채택된다”고 말했다.

환경 문제, 쇼핑중독 문제 야기?

매장 쇼윈도에도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전문 팀에 의해 디자인된 쇼윈도는 자라의 제품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쇼윈도 이미지는 시즌마다 새롭게 바뀌며 전시 제품 역시 판매를 위해 최신의 패션 트렌드와 변화를 반영해 선택된다.

10개나 되는 탈의실도 고객을 모으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점원 눈치 보느라 몇 벌 못 입어 보는 국내 타 매장과 달리 자라는 원하는 제품을 마음껏 골라 입어볼 수 있기 때문. 입어본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냥 두고 나오면 탈의실 전담 직원이 알아서 정리해 준다.

명동 매장에 들른 김지연씨(35)는 “저렴한 가격도 만족스럽지만 옷을 편하게 입어 볼 수 있어 자주 오게 된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패스트 패션 열풍이 많은 사람들을 저가 쇼핑에 중독 시킨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주저하지 않고 사기 때문이다. 또한 쉽게 입고 버릴 수 있어 환경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자라는 풍력발전을 사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제조환경을 갖춤으로써 이에 대응하고 있다.

백 매니저는 “패스트 패션이라는 명칭이 패스트푸드(fast food)처럼 나쁜 이미지로 쓰이는 것이 애석하지만, 기본 컨셉트는 소비자에게 양질의 상품,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한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자라는 ‘동일한 패션 문화를 공유하는데 국경선은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옷에 관련된 아이디어, 트렌드, 고객의 기호에 따라 움직이는 자라는 각기 다른 문화와 세대의 고객들에게 사랑을 받아 결국 세계적인 브랜드로 우뚝 솟았다.

자라는 이번 9월 명동에 3호점을 내는 등 연내에 3개 매장을 추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