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에 소용돌이치고 있다. 국내 은행이 롤 모델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계 투자은행들은 몰락하고 있다. 환율과 주식시장의 불안 등 금융시장 전반의 위기는 지난 외환위기와 비교될 정도로 한국 금융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 금융의 돌파구는 어디인가. 2009년 1월 창립 11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은행의 혁신경영에서 이를 찾아보자.

위기를 기회로 바꾼 원동력은 ‘혁신’

지난 2005년 조흥은행을 합병한 통합 신한은행의 출범으로 우리은행은 은행권 자산 순위에서 국민은행(197조), 신한은행(163조)에 이어 3위의 위치에 놓이게 됐다. 만약 자산 규모 4위인 하나은행(103조)이 외환은행을 인수할 경우 은행권 4위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한 MOU 체결로 인해 M&A를 통한 우리은행의 성장전략은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다. 자체 성장전략 추진만이 위기 돌파의 해법이다. 하지만 해법을 찾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에겐 110년 역사 동안 숱한 위기를 헤쳐 오면서 위기 극복 DNA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위기 때마다 혁신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으며, 오히려 위기는 한 단계 도약의 계기가 됐다.

지난 110년 우리은행 역사 속에서 최근 10년 동안의 큰 위기라면 외환위기로 인한 공적자금의 투입과 합병 그리고 2003년 카드대란, 2007년부터 불어 닥치고 있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를 들 수 있다.

체계적 변화관리로 위기 극복

우리은행에게 있어 가장 큰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한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그해 11월 우리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은행권의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기업들의 줄도산은 은행의 부실채권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경영상의 악화는 피할 수 없었다.

1998년 대동은행을 비롯한 5개 은행의 퇴출을 시작으로 1999년 1월 금융 구조조정 추진과정에서 상업·한일 두 대형 은행은 한빛은행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총자산 105조원, 자기자본 4조원으로 일단 몸집은 커졌다. 하지만 부실채권이 14조8000억원으로, 대출금(63조원)의 23.6%에 이르렀다. 공적자금 8조원이 투입됐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빛은행은 403개 점포의 통폐합, 직원 5569명을 감원하는 등 뼈를 깎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99년 8월 해외 DR 10억달러 발행, 사업부제 중심으로의 조직 개편을 단행해 위기 극복을 시도했다. 이러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한빛은행은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대우그룹 사태와 금융권 제2차 구조조정으로 인해 공적자금 4조6000억원이 재투입되는 또 한 번의 시련을 치러야 했다.

결국 2001년 4월2일 정부는 공적자금 12조7000억원을 투입해 한빛·평화·광주·경남은행과 한아름종금을 하나로 묶어 우리금융지주회사를 탄생시킨다. 2001년 평화은행을 흡수 합병하고, 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했다.

우리은행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으로는 혁신과 체계적인 변화·관리활동이 꼽힌다. 우리은행은 BPR 프로세스, 신용리스크 관리 시스템, 성과급제 등을 도입하고, 전산 시스템을 전면 교체하는 시스템적인 변화를 꾀했다. 2001년 백두대간 대장정을 통한 조직문화 혁신과 변화 관리를 통한 의식혁신 등이 추진됐다.

2000년부터 기획돼 2002년 도입된 BPR 시스템은 프로세스 혁신을 넘어 직원 개개인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기존의 가치, 관행, 관습에 대한 저항을 새로운 가치체계로 변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 관리가 이뤄졌다.

변화·관리활동은 COP(Community of Practice)시스템을 통해 개인별·조직별 마일리지로 평가되고, 철전한 보상이 뒤따랐다. ‘해보니 좋던데요, 바꿔주세요, 도와주세요’ 등의 코너를 통해 다양한 업무 노하우를 공유하고, 우수 사례를 발굴해 전 직원이 업무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게 했다. 특히 ‘마감 후 30분만 투자 하세요’라는 업-셀(Up-Sell) 마케팅은 일반 다수 고객은 수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창의적인 마케팅 기법이었다.

2005년 경쟁은행이 M&A를 통한 성장전략을 구사했으나 우리은행은 자체 성장전략으로 시장에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황영기 행장(현 KB금융지주회장)은 신년사에서 자신의 둥지를 부리로 깨부수는 장산곶매를 언급하며 비장한 각오와 변화를 주문했다. 또 솔개가 제2의 인생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낡은 부리를 깨뜨리고, 무뎌진 발톱과 낡은 깃털을 차례로 뽑는 고통을 거쳐 재탄생하듯이 전 임직원의 과감한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은행 직원들은 결사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2005년 우리은행 자산은 140조원, 신한은행은 163조원이었으나 다음해엔 우리은행이 186조원, 신한은행이 177조원으로 역전됐다. 2006년 당시 황영기 은행장과 이종휘 현 은행장(당시 수석부행장)은 고객 위주의 정도영업을 통해 한 해 동안 자산 47조원의 성장과 함께 연체율 0.96%를 함께 달성하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냈다. 이는 시장에서 우리은행의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켰고, 직원들에게는 과거 패배주의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됐다.

2007년에는 4S(Speed, Spirit, Service, Share)운동인 포스 업(Force-Up) 혁신운동을 전행적으로 전개해 영업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이 혁신운동으로 인해 영업력이 약했던 신용카드 부분은 ‘우리V카드’라는 대표상품을 통해 괄목한 성장을 이뤘다. 또 퇴직연금, 외환 등 사업 영역 대부분 분야에서 시장점유율을 높혀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원칙과 기본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에 맞서

2008년 6월 합병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내부 출신 은행장으로 취임한 이종휘 행장은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진정한 혁신을 주문하고 있다. 이 행장은 취임 후 매월 1회 ‘은행장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등 영업현장과 경영방침·전략의 일체화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소통의 장을 계기로 은행업무나 혁신활동 등에 공이 있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기업문화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이 행장의 이러한 감성경영은 ‘Think-W혁신’이라고 불린다. 우리은행의 영문 이니셜 ‘W’에서 따온 것으로 ‘We!, Win!, Wonderful!(우리가, 1등 은행을 달성하고, 즐겁고 멋지게 살자)’이라는 의미다. 은행과 직원, 고객의 3자 상생(Win-Win-Win)을 이룬다는 비전도 담고 있다.

이종휘 은행장은 2008년 10월 서울, 경기, 인천 지역을 시작으로 부산 지역 등 지방을 직접 순회하며 위기 진화에 본격 나서기도 했다. 영업의 최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지점장들과 현 금융위기 상황을 공유하고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운영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이 은행장은 “지금은 국민의 힘으로 재기한 우리은행이 선도적으로 금융위기를 타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라며 “10년 전 그 어려운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되살려 금융위기를 돌파해 나가자”고 말했다.

그는 “은행장을 포함한 전 임원들이 위기 극복에 앞장 설 것”이라며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계기로 삼기 위해 지점장들이 솔선수범해 아궁이에 불을 활활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어 달라”고 강조했다.

어려울수록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라는 이 은행장의 주문은 우리은행의 위기극복을 위한 혁신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우리은행은 이를 통해 2009년 경영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내부 평가기준인 KPI를 2008년 11월에 조기 종료했고, 2009년 전략 방향에 맞추어 본부조직을 변경하는 등 위기대응체제를 신속히 갖추었다.

은행 측은 경기 침체 등으로 급증하는 기업개선 및 회생지원 업무에 선제적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영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영업지원과 시너지 창출에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국내외 금융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짐에 따라 향후 경기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위기상황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경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또 기존의 영업방식에서 벗어나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영업체제 및 평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본부 조직의 역할 변경과 영업혁신을 통해 영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은행은 향후 은행의 하드웨어인 조직과 제도, 소프트웨어인 구성원의 의식 그리고 기반이 되는 기업문화를 바꾸는 영업혁신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여타 은행들이 영업력을 확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뛰어들 때 한 발 앞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은행으로 출발

우리은행은 우리나라 금융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정통 은행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87%의 지분을 예금보호공사 및 국내 자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자체 성장을 통해 자산 200조원 돌파, 2003년 이후 5년 연속 당기순이익 1조원 이상 시현 등 110년이라는 한국 금융사에 있어 최고(最古)의 역사적 전통을 넘어 성장성, 수익성, 건전성 전 부문에서 대형 우량은행의 면모를 지닌 최고(最高)은행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1월30일 설립됐다. 하늘아래 첫 번째 은행이라는 의미의 대한천일은행은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 즉 금융 발전이 곧 경제 발전의 기초’라는 창립 이념을 바탕으로 삼았다. 당시 설립 1년이 안 돼 문을 닫고만 기존 국내 은행들과는 달리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서울의 유력 상인들이 중심이 됐다. 특히 황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지원으로 자주적 근대은행이자 민족 정통의 은행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예금과 대출을 담당하는 일반은행의 역할과 더불어 화폐 발행과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1899년 5월 최초 은행지점인 인천지점을 설치했으며, 1909년 조선의 대표은행으로 성장한 것을 기념해 서양식으로 본점 건물을 신축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신은행령 공포(1912년10월)로 일제의 경영 간섭이 이루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일본인들의 경영 참여, 일본계 부실은행과의 합병으로 동반 부실화로 경영 침체를 맞았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북한 지역 영업망 상실은 은행 영업에 큰 타격을 주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부산에 임시본부를 설립하고 전시 비상경영체제하의 악성 인플레이션과 싸우며,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54년 시중은행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은행법의 시행으로 금융기관이 정비됐다. 1956년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의 합병으로 한일은행의 전신인 한국흥업은행의 설립으로 상업, 한일, 조흥, 제일, 서울은행의 5개 시중은행의 골격을 형성하게 됐다.

한국 경제와 동반 성장

1960년대 들어서 정부는 경제개발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원활한 국내 자본 동원을 위해 저축장려운동을 펼쳤다. 우리은행도 ‘예금제일주의’를 내걸고 예금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5년 6월 우리은행은 시중은행 최초로 예금 잔액 100억원을 돌파했고, 1967년 9월 종합통장의 효시인 ‘3세트 예금통장’, 1968월 11월 당시 최고의 히트 금융상품인 ‘안심예금’을 판매했다. 1967년 5월에는 시중은행 최초로 외국환 업무, 1968년 시중은행 최초의 동경지점 개점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하는 등 금융산업 전반을 선도했다. 1970년대 경제개발 시기에는 기업이 은행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과감한 투자를 해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우리은행은 43개 주 채무 계열 중 삼성, LG, 두산, 한화 등 16개 계열기업의 주거래은행으로서 국내 최고의 기업금융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바탕에는 오랜 경험을 통해 기업금융 전문가(RM)들이 맞춤형 컨설팅과 금융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중소기업과 상생성장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국내 은행 중 유일하게 중소기업 전문가 그룹(SRP)을 양성, 운영하고 있다. 2007년에는 시중은행 최초로 중소기업대출 부문 50조원을 돌파했다. 특화된 상품과 적극적인 지원으로 국가 경제의 기반인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소기업 경영개선 지원을 위해 관련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컨설팅 팀을 운영해 중소기업 니즈에 맞춘 컨설팅뿐만 아니라, 재활력화(Revitalization) 지원, 가업승계 컨설팅 등 특화된 컨설팅을 제공함으로서 중소기업과의 진정한 동반자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 IB, PB, e-비즈니스 등 은행 전 사업 영역에 있어 고른 경쟁력을 갖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성장동력 6대 분야에 선제적인 지원을 위해 특화상품으로 ‘로봇 시대론’, ‘그린 솔라론’의 출시하기도 했다.

우리은행은 디지털 금융의 리딩 뱅크이기도 하다. 와이브로 뱅킹 서비스, 2D 바코드 서비스 등 국내 최초의 다양한 U-뱅킹 서비스 도입으로 디지털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2007년 5월 전 세계 12개국 16개 점포를 대상으로 해외 인터넷뱅킹 서비스 시스템을 오픈해 글로벌 네트워크 기반을 구축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은행의 투자금융 부문은 다소 위축된 게 사실이다. 우리은행이 투자했던 CDO, CDS의 손실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두바이에서부터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6대륙, 27개국에 이르는 영업활동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2007년 말 기준 시중은행 IB중 영업이익 1위 및 ABS, 선박금융, 외화 신디케이트론 주선 부문 국내 1위 등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공헌활동 전개

우리은행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토종은행으로 남다른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단순 성금 전달 및 후원과 같은 일시적이고 시혜적 차원의 사회공헌이 아닌 지역과 밀착한 임직원 참여 위주의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2007년 창단한 ‘우리은행 자원봉사단’이 자리 잡고 있다. 전국 1000여 개의 자원봉사팀이 다양한 사랑 나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4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투게더 우리(Together Woori) 임직원 자원봉사 캠페인’은 우리은행 자원봉사문화 확산과 정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 부서와 지점이 봉사처 및 봉사 프로그램을 직접 선정해 활동하고, 은행은 활동경비를 지원함으로써 자발적이고 실질적인 사랑나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2008년 11월까지 1만5958명의 임직원이 자원봉사에 참여해 소외된 이웃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었다. 특히 2008년부터는 자원봉사 캠페인 기간을 연중으로 확대해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자원봉사운동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도농상생을 통한 농어촌 지원을 위해 1사(社)1촌(村)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05년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내곡마을과 자매결연한 후 매년 정월대보름 한마당, 과실수 및 텃밭분양 사업, 농촌 일손 돕기 그리고 농산물 직거래 장터 운영을 통해 농촌 소득 증대에 기여함은 물론 직원과 직원가족들에게 농촌 체험의 살아있는 체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2007년에는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1리 어촌계와 자매결연하고 1사(社)다촌(多村)운동으로 농어촌 교류활동을 확대했다. 불가사리로 인해 어장의 피해가 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두 차례에 걸쳐 불가사리 퇴치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태안 기름유출 사고 직후에는 긴급 자원봉사단을 꾸려 자매마을을 찾아 기름 제거 자원봉사 및 지원금을 전달했다.

우리은행은 서울시민의 쉼터이자 상징인 남산 가꾸기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1994년 ‘1사(社)1산(山) 남산 가꾸기 은행’으로 선정된 후 매년 식목행사 및 남산 자연보호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우리은행은 일반 시민들에 대한 문화적 욕구 충족 및 국내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찾아가는 음악회’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서울시 25개 구를 연중 순회하며 구민회관, 대학 공연장, 도서관, 대학병원 등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음악 공연을 정기적으로 선사하고 있다. 특히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독거노인 등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활동에 적극 나서는 등 문화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에도 역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