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요동 정벌론’ VS
이성계의 ‘전쟁 불가론’
원문
부미전이묘산승자득산다야미전이묘산불승자득산소야다산승소산불승이황어무산호오이차관지승부견의
夫未戰而廟算勝者 得算多也 未戰而廟算不勝者 得算少也 多算勝 少算不勝 而況於無算乎 吾以此觀之 勝負見矣
해석
대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조정에서 전략을 세우면서 승리를 확신하는 자는 승리할 계책이 충분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아직 싸우기 전에 조정의 전략회의에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계책이 적기 때문이다. 승리할 계책이 다양하면 이기고, 승리할 계책이 적으면 이길 수 없다. 하물며 아무런 계책조차 없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나는 이것으로써 어느 편이 승리하고 어느 편이 패배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다.

전쟁을 해야 할 때와 해서는 안 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전략가의 근본 덕목(德目)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을 구분하는 규준은 무엇인가? 손자는 ‘승산(勝算)’, 곧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의 유무와 다소(多少)라고 말한다. 이때 손자의 기본 사상은 다섯 가지 전략적인 조건과 일곱 가지 계책으로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되 승산이 없거나 적다면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섯 가지 전략적인 조건은 ‘정치(道)·천시(天時)·지리(地理)·장수(將帥) 그리고 군대의 법제(法制)’이며, 일곱 가지 계책이란 ‘지도자는 누가 더 명분을 갖추었는가, 장수는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 천시와 지리는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 법령의 집행은 누가 더 제대로 하고 있는가, 군대는 누가 더 강한가,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는가, 상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하게 행하고 있는가’ 등이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고려 조정 내부에서 벌어졌던 전략 논쟁과 그 후 전쟁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승산이 없는 전쟁을 서둘러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이 전쟁의 결과는 물론 이후 내부 정치적 역학관계와 왕조(국가)의 생사존망에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명나라는 개국 초기 고려가 요동에 잔존하는 원나라 세력과 연합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매우 염려해 사신 왕래를 제한하는 등 고려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폈다. 더욱이 요동에서 원나라 잔존 세력을 정벌한 1387년부터는 요동이 자신들의 세력권이라면서 고려의 영토인 철령 이북을 예속시켜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최영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정벌’을 비밀리에 의논하고 전국 5도의 성(城)을 수축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군사를 서북 방면에 배치해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했다. 또한 수도 개경의 방리군(坊里軍)을 동원해 남쪽 한양의 중흥성을 수축하도록 했다. 만약 명나라와 전쟁이 발발해 개경이 위험할 경우 왕실과 귀족들을 안전한 남쪽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최영과 우왕은 명나라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요동 정벌’을 은밀히 준비하면서 “철령 이북으로부터 공험진까지는 예부터 고려의 땅”이라면서 명나라에 당장 철령위 설치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요동도사를 압록강까지 파견해 철령위를 세우겠다는 뜻을 확실히 했고, 뒤이어 철령위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고려에 통보해왔다.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최영과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개경을 수비하라고 한 다음 5부(部)의 장정들을 징발해 군대를 편성하고 표면상으로는 서북 방면(해주 백사정)으로 사냥을 하러 간다고 하고서는 친히 서해도로 나가 요동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들여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명분과 시기 모두 적합하지 않다면서 ‘전쟁 불가론’을 들고 나왔다.

우왕: “내가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모든 힘을 다 쏟아 진격하라.”
이성계: “지금 군대를 출병시키는 것은 4가지 이유 때문에 불가합니다. 첫째,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둘째, 여름에는 군사를 동원할 수 없습니다. 셋째, 전국에서 군사를 징발해 원정군을 내보내면 그 틈을 이용해 왜적들이 공격해올 것입니다. 넷째, 지금은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군대에 전염병이 퍼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성계가 말한 ‘4 불가론’은 첫째 이유를 제외한다면 철저하게 병법과 전략의 원칙에 따라 내린 판단이었다. 즉,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철을 놓친 백성들의 민심 이탈과 군사들의 사기 저하가 우려되고, 전국에서 군사를 모아 요동 원정군을 동원한다면 지역 방비가 허술해져 왜적의 침입을 부를 수 있고, 장마철에 전쟁을 개시하면 아군의 전투력 약화는 물론 군대의 행군 역시 크게 어려움을 맞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성계가 이렇듯 4가지 이유를 들어 반복해 승산 없는 전쟁은 불가하다고 얘기하자 우왕의 뜻 역시 일시적으로나마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최영이 다시 우왕을 뵙고 ‘다른 말에는 일체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자 다음날 우왕은 다시 이성계를 불러 들였다.
우왕: “일이 이미 군대까지 동원했으므로 여기에서 중단할 수는 없다.”
이성계: “전하께서 반드시 ‘요동 정벌’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러 계시면서 가을을 기다려 출병하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럼 오곡이 들판을 덮을 것이니 대군의 군량이 풍족해 계속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출정할 시기가 아닙니다. 설령 요동의 한 개 성(城)을 함락시킨다고 한들 곧 장맛비가 내리면 군사들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군대의 사기는 떨어지고 군량미는 부족해 재앙을 재촉할 뿐입니다.”
우왕과의 두 번째 대화에서 이성계는 ‘전쟁 불가론’의 입장에서 후퇴해 ‘가을 출병론’을 주장했다. 이미 전쟁을 중단할 수 없다면 가장 ‘승산’이 있는 시기를 선택해 군대를 출정시키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전쟁 전략은 최영과 우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최영을 8도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하는 5만의 ‘요동 정벌군’은 평양을 떠나 요동을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최영은 이성계가 우려한 장맛비와 행군 및 군량 보급에서 발생할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단지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면 된다는 안이한 계책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인지 최영은 요동 정벌군이 평양을 떠날 때 “이제 대군이 행군을 만약 열흘 혹은 한 달을 끌게 되면 큰일을 성취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스스로 행군 속도를 단속하고자 했다.
최영은 백전노장이며 이성계를 능가할 만큼 전장에서 이름을 드높인 고려의 최고 명장이다. 그렇다면 평생토록 온갖 전투와 싸움터에서 전략과 전술을 갈고 닦았을 최영이 왜 이토록 무모하고 서투르게 전쟁을 서둘렀던 것일까? 이와 관련한 실마리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이성계의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또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까지 퍼져서 최영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뚜렷한 명분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마침 명나라에서 철령위를 설치하자 이를 기회 삼아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군의 지휘를 맡겨 명나라에 죄를 짓게 만든 다음 그것을 핑계로 제거하기 위해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세종 때 편찬한 조선의 공식 역사서인 <고려사 열전>에서 최영과 이성계의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웠고 특히 우왕에게 이성계를 모함하려는 자에게 최영이 분노해 “이성계는 국가의 기둥이다. 만약 나라에 큰 일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느냐?”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연려실기술>에 실린 내용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영처럼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장수가 국론 분열과 민심의 이탈 그리고 천시(天時)의 불리함까지 모두 무시한 채 전쟁을 감행했다는 사실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우왕과 더불어 밀실에서 비밀리에 전략과 작전을 세웠다는 사실도 쉽게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단순한 ‘모함’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여하튼 <연려실기술>의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최영이 이후 당한 비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병법과 전략의 기본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에 자초했던 결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 왕조의 몰락
동아시아에서 손자와 더불어 병법과 전략의 쌍벽을 이룬 또 다른 전략가는 오자(오기)다. 손자가 전쟁의 전략적 조건으로 ‘도(道)·천(天)·지(地)’를 꼽았듯이 오자 역시 ‘인화(人和)·천시(天時)·지리(地理)’를 전쟁 개시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국론의 통일, 전쟁의 시기, 유리한 지형을 자세히 헤아리고 살펴서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요동 정벌’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요동 정벌은 승리의 가능성이라곤 도대체 찾아볼 수 없었던 전쟁이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만약 속전속결로 적군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격해 유리한 입지를 확보한 다음 ‘외교와 협상’을 통해 명나라를 압박했다면 최소한 그들의 침략 야욕을 물리치고 북방 국경을 안정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즉, 전쟁은 ‘제한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외교와 협상은 ‘전면적’인 방식으로 ‘요동 정벌’ 전략을 짰다면 고려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최영의 요동 정벌군이 평양을 떠날 때 스스로 ‘행군 속도’를 단속하려고 했던 의도 역시 여기에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여름철, 그것도 장마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확고히 취하고 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군’의 진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설령 적군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격해 점령했다고 해도 장맛비를 만나게 되면 오도 가도 못한 상황에 갇힐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더욱이 친명파(親明派)인 신진 사대부 세력과 정치적으로 밀착해 있던 이성계가 볼 때 ‘요동 정벌’은 승산은 물론 명분도 뚜렷하지 않은 무모한 전쟁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압록강에 가설한 배다리를 이용해 위화도에 상륙해 주둔한 이성계는 초기 선발부대를 요동에 침입시켜 몇 차례 적진을 공략했을 뿐 본대의 진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장맛비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불어나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강력하게 회군(回軍)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영과 우왕이 회군을 허락하지 않고 진격을 명령하자 마침내 조민수와 더불어 ‘쿠데타’를 결심하고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진군한다. 회군한 이성계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개경에 진입해 순식간에 최영을 무너뜨린 사실만으로도 ‘요동 정벌’이 조정 내부의 의견과 군대의 사기 그리고 민심을 충분히 살피지 않고 서둘러 얼마나 무리하게 추진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성계가 진군하자 “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아무도 반항하지 않고 개경의 남녀노소가 앞 다투어 술을 가지고 나와 환영하며 위로하고 장애물을 제거해 길을 열어주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에서 보듯, 여론과 민심은 이미 최영과 우왕을 떠나 이성계에게 쏠려 있었다. 결국 요동 정벌은 최영의 몰락과 이성계를 정점으로 한 권력의 일대 지각 변동을 불러왔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 왕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승산이 없는 전쟁이 빚은 너무나 혹독한 대가이자 참혹한 정치 비극이었다.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은 승산에 있을 뿐이다.
승리할 계책, 즉 승산이 있는 전쟁과 그렇지 못한 전쟁이 낳는 결과의 차이는 고려의 숙종과 예종 시대에 치러진 윤관과 여진간의 전쟁에서 보다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모두 3차에 걸쳐 무려 3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결정적 승리를 거둔 고려는 그 후 100여 년 가까이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숙종 시대 말기인 11세기 말부터 여진족의 한 갈래인 완안부가 여진을 통일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고려의 동북 방면(두만강 이남)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1104년 오아속(烏雅束)이 이끄는 여진 기병이 고려의 정주성 관문 밖까지 침입해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이 사태를 심각한 침략 행동으로 간주하고 병마사 임간에게 군대를 이끌고 정주성 밖으로 나가 여진족을 격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병법과 전략이라고는 도대체 모르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진족을 취급한 고려 조정의 ‘전략적 실책’임이 금방 드러났다. 고려군은 보병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반면 여진족은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 그런데 정주성 밖의 드넓은 평야에서 전투를 벌였으니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여진족 기병의 기동력에 대형이 무너진 고려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나마 척준경의 활약으로 살아남은 병사들은 정주성 안으로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렇듯 기병 중심의 여진족과 보병 중심의 고려군의 전투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고려 조정은 임간에게 책임을 물어 관직을 파면하고 다시 윤관을 여진 정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파견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계책도 내놓지 못했다. 윤관이 아무리 당시 고려 최고의 명장이라고 해도 승산이 없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다. 여진족의 기병과 맞선 윤관은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도 겨우 적병 30여 명을 참살했을 뿐이다.
그러나 윤관은 고려 조정의 무능한 관료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전쟁의 패인이 ‘기병과 보병의 기동력과 전투력의 차이’에 있다는 사실을 즉각 간파했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은 오직 ‘기병의 양성과 훈련’에 있다고 확신한 윤관은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기병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제한 ‘별무반(別武班)’이라는 일종의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1107년에 들어서 여진족이 재차 고려의 동북 방면을 위협해오자 고려 조정은 여진 정벌을 논의해 결정하고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17만의 대군을 출정시켰다. 그리고 지난 번 제1차 여진 정벌과 달리 여진족의 기병부대에 맞서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 편제를 갖춘 윤관의 고려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새롭게 ‘동북9성’의 영토를 개척하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듯 3년 전 제1차 여진 정벌이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던 전쟁이었다면, 제2차 여진 정벌은 고려 조정이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완벽하게 갖춘 전쟁이었다. 당시 동북 방면 국경 지대의 불안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서 새롭게 영토를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고려 조정이 승산을 충분히 헤아리고 살펴서 여진 정벌을 개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손자는 승산의 유무와 다소를 살펴서 “어느 쪽이 승리하고 어느 쪽이 패배할지를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전략가는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 승산을 따져 살펴보고 난 후 승리와 패배의 향방과 결과를 예측하고, ‘전쟁을 개시해야 할 때인지 혹은 섣불리 나서면 안 되는 시기’인지를 반드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