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속결의 귀재(鬼才) 광개토대왕
원문
손자왈범용병지법치차천사혁거천승대갑십만천리궤량칙내외지비빈객지용교칠지재차갑지봉일비천금연후십만지사거의기용전야승구칙둔병좌예공성칙력굴구폭사칙국용부족부둔병좌예굴력탄화칙제후승기폐이기수유지자불능선기후의고병문졸속미도교지구야
孫子曰 凡用兵之法 馳車千駟 革車千乘 帶甲十萬 千里饋糧 則內外之費
賓客之用 膠漆之材 車甲之奉 日費千金 然後十萬之師擧矣 其用戰也 勝久則鈍兵挫銳 攻城則力屈 久暴師則國用不足 夫鈍兵挫銳 屈力貨 則諸侯乘其弊而起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 故兵聞拙速 未睹巧之久也
해석
손자가 말했다. “무릇 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려면, 치거(馳車; 속력이 빠르고 가벼운 전차) 1000대와 혁거(革車; 운반용 수레) 1000대와 대갑(帶甲;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10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 더욱이 1000리 밖에 있는 군영에 식량과 전쟁 물자를 보급하려면 전방과 후방에 걸쳐 소요되는 비용, 빈객이나 사신의 접대와 교섭에 쓰이는 비용, 무기와 장비를 수리하는데 들어가는 재료, 수레와 갑옷을 고치고 보충하는데 쓰이는 비용을 합쳐서 하루에 1000금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을 써야 한다. 따라서 하루에 1000금을 사용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춘 후라야 비로소 1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켰다면 길게 끌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질질 끌게 되면 병사들은 둔해져 날카로움이 꺾이고, 적의 성을 공격하면 병력을 많이 잃게 되어 전력이 떨어진다. 또한 군대가 오랫동안 나라 밖에 있게 되면 나라 재정이 말라 버리게 된다. 무릇 병사들이 둔해지고, 날카로움이 꺾이고, 전력 손실이 심하고, 재정이 부족하게 되면 곧 이웃 나라의 제후들이 그 어려운 틈을 이용해 공격해 온다. 비록 제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자라도 그 배후를 수습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속전속결로 승리한 경우는 들었지만, 완벽하게 준비를 갖췄더라도 장기전을 치러서 승리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살펴보면 그가 동·서양의 여러 정복 왕들이 즐겨 사용했고 또한 손자가 병법과 전략의 핵심 덕목 중 하나로 지목한 ‘속도전과 속전속결’에 탁월한 식견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1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2년의 짧은 치세 기간 동안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당시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백제였다. 특히 서기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고국원왕이 죽임을 당한 이후 20여 년이 넘게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패배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7살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가 임금이 되었으니 백제가 고구려를 어떻게 쳐다보았을지 상상해 보라.
속도전의 핵심은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고 준비하기도 전에 놀랄만한 기동력으로 갑작스럽게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상대방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더 빠르게 행동하는 것, 이것은 속도전과 기습전의 최고 덕목이다. 광개토대왕은 속전속결의 대가답게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백제의 방심과 안일을 무참히 짓밟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로 쳐들어가 10개의 성을 함락하고 한강 유역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너무나 창졸 지간에 당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백제의 진사왕은 반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적에게 당한 공격과 패배는 훨씬 더 큰 충격과 혼란을 야기하는 법이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북쪽의 거란을 공격해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간 고구려의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그 해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또 다시 공격해 함락시켰다. 특히 이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에 바닷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점령이 불가능한 곳이라 여겨졌으나 광개토대왕은 20여 일을 밤낮 없이 공격해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나이 어린 자신을 우습게보고 마음을 놓고 있는 적국(백제와 거란)을 전광석화처럼 기습공격해 단숨에 제압해 버렸다. 특히 백제에 대한 두 번의 승리는 오랫동안 고구려를 괴롭혀온 ‘패배의식과 백제 콤플렉스’를 말끔히 씻어내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거란을 그 다음해 백제를 다시 정벌했는데, 이때는 단순한 기습공격에 그치지 않고 남쪽과 북쪽의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기 위해 두 곳을 완전히 제압할 목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특히 백제 정벌 때는 기마군단과 수군(水軍)의 양면 작전으로 수도 한성을 공격해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老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고 왕족과 대신을 비롯한 1000여 명의 포로를 끌고 돌아왔다. 이 두 전쟁은 광개토대왕이 본격적으로 만주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는 원정길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그 후 398년 숙신 정벌을 시작으로 정복 전쟁에 나선 광개토대왕은 불과 10여 년 만에 숙신과 후연 그리고 동부여를 정벌하고 신라를 신하국(臣下國)으로 복속시켜 만주 일대와 한반도를 호령하는 대제국 고구려를 세웠다. 당시 광개토대왕에 맞서 싸운 적국의 왕과 장수들은 자신들이 예측한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고구려 군사에 번번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은 어떻게 적군보다 빠르게 행동하고, 적군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 병법과 전략의 원천은 다름 아닌 고구려 ‘기마 군단의 기동력과 기습작전’에 있었다.

속도전과 기습공격의 대가들은 대개 소규모 병력으로 최대의 전투 효과를 얻는 능력이 탁월했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4만7000명(보병 4만, 기병 7000)의 마케도니아 원정군으로 이소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대왕이 지휘하는 페르시아의 25만 대군(보병 20만, 기병 4만5000)을 물리쳤다. 전혀 예측하지 못할 속도로 정체불명의 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자신을 공격한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리 숫자가 많고 잘 훈련된 군대와 병사들일지라도 미처 대형을 갖출 사이도 없이 창졸 지간에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 닥치면 어떤 군대도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신보다 병력이나 전투력에서 열세라고 여겼던 적에게 급습을 당할 경우, 그 패배의 여운은 더욱 치명적이다.
연전연승·무적불패의 기록
광개토대왕 역시 고구려 기마군단의 속도와 기습공격을 십분 활용해 소규모 병력으로 최대의 전과(戰果)를 올리는 병법과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그는 많을 때는 4만 내지 5만, 적을 때는 5000 내지 7000명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지휘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마 연전연승과 무적불패의 기록으로 따지자면 우리 역사에서 광개토대왕은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지 않나 싶다. 여하튼 391년 즉위와 동시에 불과 4개월 동안 남쪽으로 백제를 2차례, 그리고 북쪽으로 거란을 1차례 공격한 상황을 보면 그가 일찍부터 속도전과 기습공격의 ‘천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당시 광개토대왕의 나이 불과 18살이었다).
광개토대왕 즉위를 전후해 거란과 백제는 고구려의 북쪽 및 남쪽 변경과 영토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침입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백제 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했는데, 문제는 백제를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 북방의 거란이 고구려를 침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제와 거란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교란작전을 구사한다. 즉, 고구려 원정군이 거란을 공격할지 아니면 백제를 공격할지 알아챌 수 없도록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환도성을 떠나서 일부 병사는 백제로 또 일부 병사는 거란으로 진군시켰다. 북쪽의 거란과 남쪽의 백제는 5000여 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두 곳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공격한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광개토대왕은 이 점을 십분 활용했다. 즉, 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교란작전에 속아 아무런 대비도 갖추고 있지 않다가 기습공격을 당해 한수 북쪽의 10여 개 성(城)과 수많은 마을들을 순식간에 빼앗겼다. 당시 급습을 당한 백제의 진사왕이 “담덕(談德: 광개토대왕)이 용병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나가 싸우지를 못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속도전과 기습공격이 전투의 결과는 물론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고 위축시키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속도전과 기습공격은 적군이 아군의 진로와 속도 그리고 공격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광개토대왕의 교란작전은 병사들의 진로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고,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속도를 예측하지 못하게 했다. 군대의 진로와 속도를 예측할 수 없다면 공격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은 전쟁과 전투는 ‘빠르게 행동하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손자의 메시지에 가장 충실한 병법이자 전략이었다.
속도전의 원리: 천천히→천천히→빠르게→빠르게
속도전의 원리를 ‘빠르게 더 빠르게’라는 기동성에서만 찾는다면, 그 사람은 ‘하류(下流)의 전략가’에 불과하다. 최고의 전략가는 적군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속도전을 구사할 때 반드시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준비 태세를 갖춘 다음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서 재빠르게 공격해 끝낸다. 이와 같은 속도전의 전략은 ‘천천히→천천히→빠르게→빠르게’의 과정과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천천히’ 단계에서는 공격의 전략적 목표를 결정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움직인다. 두 번째 ‘천천히’ 단계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약점을 드러내거나 방심하여 경계를 게을리 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적군을 흔들어 동요하게 만든다. 세 번째 ‘빠르게’ 단계에서는 상대방이 예상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기습공격을 가해 혼란과 공포감을 조성한다. 마지막 네 번째 ‘빠르게’ 단계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나 대규모의 군대를 휘몰아서 아주 신속하게 적군을 제압해버린다(로버트 그린, <전쟁의 기술> 273페이지 참조).
이러한 속도전의 원리는 비단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혹은 상업(기업 경영)의 현장에서도 다양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특히 정해진 시간 이내에 상대방과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협상’의 전략에서 속도전의 원리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큰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로 알려져 있는 임상옥이 거상(巨商)으로 청나라에까지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1821년 청나라 북경 상인들의 ‘인삼 불매 동맹’을 깨뜨리고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으로 인삼을 판매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삼은 북경 상인들이 가장 탐낸 조선의 특산품이었다. 그만큼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나라 상인들에게 ‘인삼’은 한 해 사업의 명운(命運)이 걸린 중요한 거래였다. 청나라 사신 길을 따라 사행무역(使行貿易)에 나선 조선 상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인삼’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막대했다. 그것은 한 해 사업의 성패는 물론 자신의 상업 활동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거래였다. 임상옥은 이때 특히 대규모 거래를 성사시킬 목적으로 엄청난 물량의 최상품 인삼을 사들여 북경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북경에 도착해보니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을 싼값에 매입하기 위해 일제히 ‘불매 동맹’을 맺어 일체의 ‘인삼 거래’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나라 상인들은 사행무역이 지닌 특수성, 곧 사신이 돌아갈 때가 되면 인삼을 다시 조선으로 되가지고 돌아갈 수 없는 조선 상인들이 헐값에 인삼을 거래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놓고 벌이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자 협상’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 상황의 주도권은 청나라 상인들이 쥐고 있었다. 인삼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큰 손해를 입게 될 조선 상인들은 불리한 입장에서 결국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 상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임상옥은 사신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선상인들 못지않게 청나라 상인들도 초조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조선 상인들이 인삼을 팔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 해 사업을 완전히 망치게 되고 결국 파산할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었다.
임상옥은 여기에서 속도전의 첫 번째 ‘천천히’ 단계, 곧 공격의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다음 준비를 해나갔다. 그것은 조선 상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청나라 상인들의 ‘불매 동맹’에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큰 손해를 볼까봐 전전긍긍하는 조선 상인들은 어떻게든지 더 값이 떨어지기 전에 인삼을 팔 생각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임상옥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이에 임상옥은 아직 팔지 않은 조선 상인들의 인삼을 자신이 모두 사들여 버렸다. 이때까지 임상옥은 자신의 의도와 전략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단계 생략한 ‘빠르게’ 전략은 독이 될 수도

청나라 상인에 대한 공격 준비를 모두 맞춘 다음 임상옥은 두 번째 ‘천천히’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방심하여 느긋해져 있는 청나라 상인들을 흔들어 놓을 목적으로 “모월 모일 모시에 인삼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며 유포시켰다. 임상옥의 이 말은 청나라 상인들의 심리를 크게 동요시켜 ‘불매 동맹’을 약화시켰다. 어떤 사람은 한 번 해보는 협박이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반면 어떤 사람은 자칫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순간에도 청나라 상인은 임상옥의 진정한 의도와 계획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드디어 약속한 모월 모일 모시에 이르러서 임상옥은 세 번째 ‘빠르게’ 단계, 곧 ‘설마 불태우겠어?’ 하는 심정으로 나타난 청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실제 쌓아둔 인삼에 불을 지르는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 혼란과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제 임상옥이 내뱉은 말이 단순한 협박이나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청나라 상인들은 완전히 혼란에 휩싸여서 임상옥을 만류하며 ‘불매 동맹’을 깨고 종전대로 거래를 하자고 제의해왔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임상옥은 자신의 본심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상옥은 네 번째 ‘빠르게’ 단계, 즉 청나라 상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래 조건을 내놓으며 만약 자신이 제시한 가격에 인삼을 살 생각이 없다면 인삼을 모두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여 버린 청나라 상인들은 임상옥이 내세운 조건을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래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은 임상옥은 황현이 <매천야록>에 남긴 기록처럼 조선과 청나라 양국에서 이득을 얻어 쌓은 부가 왕실과 견줄 만 했고, 북경 사람들이 오래도록 그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빠르게 행동하고 빠르게 끝내라!”는 병법의 메시지를 해석할 때 ‘천천히’ 단계를 생략한 채 ‘빠르게’ 단계만을 살핀다. 그러나 ‘천천히’ 단계와 과정이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빠르게’는 오히려 자신을 덮치는 ‘덫’이 될 수 있다. 신중함이 전제되지 않는 빠른 행동은 충동과 무모함으로 얼룩지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