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브와 엑스캔버스란 브랜드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 큼직한 프로젝션 TV는 소수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화질 면에서 오늘날 LCD TV와 비교 선상에 올려놓기조차 민망할 프로젝션 TV의 55인치 보급형 가격은 600만원대, 65인치는 무려 1300만원대였다. PDP TV 가격은 더 어마어마했다. 현재 100만원대인 42인치 PDP TV의 당시 가격은 1200만원대였다. 60인치 PDP TV의 가격은 당시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XG 값인 3000만원대였다. 생소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된 시절의 일이다.
파브와 엑스캔버스의 초창기는 이렇듯 일반 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파브와 엑스캔버스가 일본의 소니·파나소닉·샤프, 네덜란드의 필립스 등과 경쟁한다 했을 때 ‘제대로 경쟁이 되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디자인과 기능 어느 것 하나 걱정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치열한 브랜드 전쟁을 벌이면서 세계시장에 진출했고, 어느새 이들은 세계 최고가 됐다. 디자인과 기술력에서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파브와 엑스캔버스의 우위와 가치에 대한 평가는 TV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두 브랜드 이름을 달고 나오는 신제품 대부분에 ‘세계 최초’, ‘세계 최고’란 타이틀이 붙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TV 시장 쟁탈전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디자인, 사이즈, 고화질, 다기능, 마케팅 전략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경쟁을 벌인다. 여기에다 엄청난 속도전까지 진행된다. 수시로 번갈아 출시되는 파브와 엑스캔버스 신제품 경쟁에 외국 TV 생산업체들이 잘못 끼어들었다간 마라톤에서 페이스를 잃고 중도에 나가떨어지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한다.
양사의 첨단 경쟁은 ‘유행’을 타기도 한다. 파브와 엑스캔버스는 지난 한 해 동안 뼈를 깎는 ‘슬림전쟁’을 벌였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얇은 TV는 엑스캔버스의 LCD TV 모델 ‘스칼렛 슈퍼슬림’이었다. 두께가 44.7mm에 불과했다. 하지만 몇 달 뒤인 지난해 9월 44.4mm짜리 크리스털 슬림 LCD TV ‘파브 보르도 850’이 이 기록을 깼다.
또 양사는 올 상반기 중 차세대 첨단기술인 발광다이오드(LED)를 백라이트로 사용한 LED TV를 본격 선보일 예정이다. LED TV 시장의 전망은 밝다. LED가 수은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부품인 데다 ‘인터넷TV’ ‘3DTV’ 등 차세대 TV 군 가운데 상용화 확대 가능성이 클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때문에 2009년 하반기엔 LED TV 시장 주도권을 놓고 브랜드 간의 전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 침체를 고려한 실속형 제품 경쟁도 예상된다. 미래형 제품과는 별도로 TV 본연의 화질과 깔끔한 디자인으로 벌이는 ‘실속 경쟁’은 이미 불이 붙었다. 불경기에 따른 침체된 TV 시장에서 실속형 제품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경쟁이다. 이렇듯 둘의 경쟁은 다양한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특징이 있다.
브랜드 출시 나이로 따지자면 파브(1998년 9월)가 엑스캔버스(2000년 8월)보다 형님뻘이다. 세계시장에서의 판매성적표도 파브가 엑스캔버스를 앞선다. 지난 2008년 말 브랜드 평가기관인 브랜드스톡의 평가 순위에서도 파브(826.8점)가 엑스캔버스(788.8점)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파브가 엑스캔버스보다 확실히 우위에 섰다고 보긴 어렵다. 우선 기술력과 디자인 면에서 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또 파브가 엑스캔버스를 앞지른 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2007년 3분기 이전엔 PDP TV 시장에서 파브가 엑스캔버스에게 뒤졌다. 불황기에 빠진 TV 시장이 어떻게 재편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양사에게 2009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TV 시장 불황기 전략을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따라 격변기 TV전쟁에서의 지위가 바뀔 수도 있다.
파브 …‘1등’ 굳히기 돌입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TV 시장 침체기는 삼성전자에겐 독주체제를 굳힐 절호의 기회다. 세계 최대 TV 시장인 북미 평판TV 시장은 지난 2008년 4분기를 기점으로 마이너스 신장을 기록했다. 지난 10여 년간 TV 시장은 확장일로를 달렸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다. TV 시장의 최고 인기 품목이자 삼성전자가 강세인 LCD TV 부문에서조차 마이너스다. 지난 2000년 LCD TV의 등장 이후 판매율이 뒷걸음질 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불황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했다.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가 지난 2월 중순에 발표한 2008년 4분기 북미TV 시장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북미 지역에서 LCD·PDP TV 합계 20.4%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6분기 연속 1위를 차지했다. TV 시장의 ‘프리미어리그’ 격인 무대에서 소니(14.2%), 비지오(12.3%), LG전자(8.1%), 도시바(7.9%)를 확실히 따돌린 것이다.
파브가 북미 평판TV 시장에서 수량 기준으로 처음 20%대 점유율을 돌파하게 된 것은 LCD와 PDP TV 부문에서 골고루 점유율이 상승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LCD TV 점유율을 지난해 3분기 18.2%에서 19.2%로 끌어올리며 1위를 고수했다. 또 LCD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PDP TV 분야에서도 3분기(24%)보다 상승한 27.8%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1위 파나소닉(46.9%)에 이어 2위권을 지켰다.
화려한 독주체제가 있기까지 파브는 끊임없는 혁신을 거듭했다. 쥐어짜듯 신제품들을 개발하고 또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다. 파브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국내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가면서 개발에 전력했다. 1998년 첫 출시 이후 지난해 9월까지 10년 동안 국내에서 300만 대 이상의 TV를 팔면서 얻은 경험이 세계시장 1위의 밑거름이 됐다.
프로젝션 TV로 시작한 파브는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을 전후해 LCD TV를 등장시켰다. 대형 화면이면서도 얇고 가벼운 새로운 디스플레이 방식에 시장이 열광했다. 국내 대형TV 시장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파브는 다양한 제품군으로 거듭났다. 2005년 로마 LCD TV, 2006년 보르도 LCD TV, 2007년 2007년형 보르도 LCD TV, 2008년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 LCD TV 등 부지런히 국내외에 히트작을 쏟아냈다. 지난해 출시된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의 ‘라이브러리 TV’엔 첨단 ‘쌍방향 기능’을 탑재해 ‘보는 TV’에서 ‘즐기는 TV’로 종전의 TV 개념을 또 한 번 바꾸었다.
파브의 모델 가운데는 밀리언셀러가 많다. LCD TV 보르도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6년 6월 출시된 보르도는 출시 6개월 만에 100만 대 이상 팔린 최단기 밀리언셀러 제품의 기록을 세웠다. ‘V’자형 LCD TV 로마 시리즈도 출시 1년 만에 평판TV 단일 시리즈로 밀리언셀러 기록을 세웠다.
3월 중으로 파브의 LED TV 신제품이 새롭게 출시된다. ‘삼성 럭시아(LUXIA) LED TV’란 이름으로 런칭이 계획돼 있다. LED TV는 기존에 나와 있는 프리미엄 LCD TV 중 LED 백라이트를 채용한 제품이다. 파브 신 모델은 2009년에도 부지런히 쏟아질 예정이다.
엑스캔버스 …‘PDP 고수 LCD 공략’ 전략
LG전자 엑스캔버스는 삼성전자의 파브와 함께 한국 TV 혁명을 이끈 장본인이다. 엑스캔버스는 지난 2000년 브랜드 런칭 이후 6년 만에 국내 시장에서 100만 대 이상을 판매하면서 디지털TV 시장을 이끌었다. 엑스캔버스는 PDP TV 부문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다. 국내 시장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또 지난 2006년부터 내장형 저장장치가 적용된 타임머신 LCD·PDP TV를 내놓으며 시장 주도권을 이었다.
하지만 현재 LG전자는 엑스캔버스의 화려했던 1위 재탈환을 꿈꾼다. TV전쟁에서 삼성전자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PDP TV 부문에선 명성이 여전하지만 파브가 세계 디지털TV 부문에서 괄목할 성장을 보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제법 뒤쳐진 양상이다.
LG전자는 지난해 초 자존심을 내건 PDP TV 보보스로 세계시장에서 각광 받았지만 PDP TV 시장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PDP, LCD 부문 할 것 없이 파브에 밀렸다. 엑스캔버스가 대형 TV 시장에서 ‘신흥 황태자’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PDP TV 덕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LCD TV 선호도가 높아짐에 따라 경쟁력이 위축됐다.
엑스캔버스가 PDP TV 시장에서도 파브에게 뒤지고 있는 것을 두고 ‘전략상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 파브가 북미 시장 등 선진국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에 비해 엑스캔버스는 상대적으로 신흥시장에 주력하다 보니 브랜드 파워가 부족해 점유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의 경우 PDP TV는 50인치 이상 대형 시장에만 집중했다.
도마 위에 오른 ‘전략의 부재’는 이뿐 아니다. LG전자는 지난 2007년 하반기부터 32인치 이상 PDP TV 양산 시스템을 가동했다. 32인치짜리 PDP TV 생산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면서 물량 공급율 상승과 신흥시장 개척 등의 효과를 얻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LCD TV 가격 하락 현상에 부딪히면서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32인치의 PDP와 LCD TV의 가격이 거의 같은 수준이 돼버린 상황에서 LG전자의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LG전자는 이번 TV 시장 침체기를 통해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각오다. ‘불경기 터널’을 거치는 동안 특유의 기술력과 폭넓은 마케팅 전략으로 시장을 재편할 기회를 노린다. LG전자는 자체 모듈 양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점이 삼성전자에 앞선다. PDP TV에서 만큼은 파브보다 엑스캔버스가 한 수 위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우선 PDP TV의 자랑거리인 보보스의 라인업을 계속 살려나갈 계획이다. LG전자가 보보스에 거는 기대는 여전히 크다. PDP TV 시장에서의 국내 우위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신흥 세계시장 교두보 마련의 선봉장 역할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엑스캔버스의 ‘간판 모델’이다.
보보스는 지난해 1월 미국 CES 2008 전시회에서 세계 전자업체의 TV 중에서 유일하게 최고혁신상(best of best innovation)을 수상하는 등 ‘PDP 명품’으로 인정받았다. ‘보보스(bobos: The Best of Best on Style)’는 말 그대로 ‘세계 TV 중에서도 최고 스타일리시한 TV’라는 의미다. LG전자는 보보스의 스타일과 기능의 강점을 앞세워 고화질(HD급), 초고화질(풀HD급), 타임머신 기능을 갖춘 보보스 PDP TV 시리즈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 라인의 최근작인 보보스 풀HD 60인치와 50인치 2개 모델은 화질을 200만 화소로 높였고, 국내 유일 THX 인증 영화모드도 채용했다. 보보스 타임머신 60인치, 50인치, 42인치 등 3개 모델은 미리보기 화면 11개를 썸네일 방식으로 제공하는 스마트 타임머신 기능을 덧붙였다.
LG전자는 올해 들어 또 하나의 보보스를 내놓았다. 국내 TV 시장의 첫 신제품인 보보스 PDP TV(모델명 50/42PQ60D)은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만큼 심플한 디자인에 밝은 조명 아래서도 선명한 패널, 빠르고 부드러운 영상 등 최고의 화질을 집약했다’는 올해의 전략 제품이다.
보보스 라인업을 이어가면서도 실속형 TV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LCD TV 부문에서 실속 제품군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LCD TV 시장 점유율 상승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LG전자는 LCD 전략 제품인 스칼렛 시리즈 출시와는 별도로 지난 2월 중순 디자인과 화질에 충실한 실속형 LCD TV LH30FD를 내놓았다. 올해 첫 LCD TV다. 디자인, 화질, 편의성은 물론 가격까지 꼼꼼히 따지는 고객층을 겨냥한 기획 제품이다. 이 모델은 타임머신 기능 등 부가기능보다는 화질 등 TV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풀HD 60Hz제품이다. 스칼렛급과 비교했을 때 42인치와 47인치는 50만원가량이나 저렴하다. 32인치의 경우 30만원 정도가 더 빠진다. 불경기 시장에서의 기획 제품이라 불릴 만하다.
LG전자는 PDP TV 시장에서의 우위를 고수하면서, LCD TV 부문에 대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시장 점유율을 1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